성경공부

2021. 7. 8. 목요 Cafe

목요 CAFE
작성자
akuc
작성일
2021-07-04 16:10
조회
961
틸리히 신학 되새김 - 노트 36

성령 현존과 세계 종교들,
동서신비주의, 영 그리스도론

신적 영의 침입(invasion)은 외톨이로 떨어져 있는 개인들에게만 일어나지 않고 사회적 그룹에서도 일어난다. 인간적 영의 모든 기능은 ‘나와 너’가 만나는 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 현존은 모든 역사 안에서 드러난다. 물론 역사 그 자체가 성령 현존의 자기현시는 아니다. 성령 현존에 힘입어 종교의 속화와 마성화에 비판적으로 도전하고 심원한 사회 변혁 운동을 일으켰던 대표적인 운동이 이스라엘 야훼 신앙에 기초한 예언자들의 위대한 예언 운동이다.
인류는 지속적으로 성령의 현존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인류만 동떨어져 홀로 남겨지는 법은 없다. 다만 인류가 경험한 하나님 영의 현존 체험은 단편적이다(fragmentary). 동서 문명의 다양한 종교사에서 우리는 영적 현존의 다양한 양태를 경험하며, 각각의 문화와 역사가 지닌 유형적 특징 때문에 서양 기독교 문명에 익숙한 서구인은 동양의 종교들이 경험한 영적 현존의 진정성과 그 온전한 경험 내용을 왜곡시키지 않고 이해하기는 힘들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해석학적 원리 덕분에 그리스도인들의 성령 현존 체험에 근거해서 동양의 종교체험을 부분적으로 혹은 불완전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다.
세계 종교사는 초월적인 거룩 체험의 다양한 유형을 보여준다. 가장 오래되고 광범위한 유형은 ‘거룩한 힘(mana)’의 현존을 강조하는 성현종교(聖顯宗敎, mana religion, hierophany religion)이다. 성현 종교에 따르면 모든 것들 속에는 신적인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한 힘으로 특정 사제들의 정교한 종교 의례를 통해서만 접근 하거나 불러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성현 종교를 원시종교 형태라고 얕잡아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격의 성스러운 힘이 자연과 존재자들 안에 있다는 영적 현존의 경험과 신념은 고등종교라고 하는 것들 속에도 스며들어 있고(기독교의 성례전 신학), 낭만주의의 자연 신비주의 사상 속에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신적 영의 현존 체험이 세계 종교사에서 보여준 또 다른 유형은 인도 종교와 고대 그리스 종교에서 나타나는 ‘신화적 종교(the religion of the mythologies)’이다. 신들이 인간이나 동물로 직접 나타나는 신화를 즐기고, 또 그것들의 상징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종교학에서는 이것을 신현 종교(神顯宗敎, theophany religion)라고 부른다. 겉으로는 다신론적 신관을 숭배하는 듯하지만 궁극적 실재가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어 현시된다는 의미가 강하다. 신들의 위계질서는 사람들이 우주 속에서 그리고 세계 속에서 균질적이지 않은 다양한 원리나 근본 힘을 감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신론적 힘들의 긴장과 경쟁은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에서 선악 이원론으로 정리된다.
인간 심령이 경험하는 영의 현존 체험을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례는 불교로 대표되는 동양의 신비주의 운동과 유대-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의 신비주의 운동이다. 신비주의 운동의 공통점은 성현 종교나 신현 종교에서 인정하는 것, 다시 말해서 궁극적 실재가 자연물이나 동물, 특출한 인간 개인과 집단을 통해 신이 스스로 자신을 변신시켜 나타낸다는 일체의 신화론적 개념을 불식시키는 것이다.
신비주의 운동이란 신적인 것이 구체적 육체로 체화(embodiment) 한다는 신화적 관념을 유한한 인간의 사고 구조인 ‘주제-객체 구조’를 초월함으로써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주객 구조의 이분법을 초월하려는 시도의 대가로서 신비주의는 영적 현존을 체험하는 주체적 자기, 중심을 지닌 주체적 자아를 소멸시켜버릴 위험까지 겪는다.
바로 이 점에서, 동과 서의 대화(communication between East and West)는 가장 난해한 문제에 봉착한다. 왜냐하면 동양의 신비주의(불교적 신비주의)는 궁극적으로 주체적 자기의 소멸과 부정인 ‘무아(無我)’를 강조하는 데 반해, 서양의 신비주의(기독교 신비체험)에서는 ‘신앙과 사랑’이라는 황홀한 경험 가운데서도 개인과 공동체의 실재성을 보존하고 확보하려 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예언자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예언자 종교에서는 "성령 현존은 다름 아니라 ‘인간성과 정의의 하나님’의 현존(Spiritual Presence is the presence of the God of humanity and justice)”으로 고백되기 때문이다. 엘리야와 바알 사제들 간의 갈멜산상 대결 설화(왕상 18:20〜40)의 본질은 참 신과 거짓 신, 곧 야훼와 바알과의 대결 같아 보이지만 참 신과 거짓 신의 변별 기준은 초자연적 능력을 예언자나 사제들에게 분여해주는 일에 있지 않고, 인간의 존엄과 정의를 지켜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에 있다. 인간성과 정의가 없는 곳에 진정한 성령의 현존은 없다. 인간성과 정의를 방치하는 영적 현존의 황홀 체험에서는 속화되고 마성화된 초자연적 종교 현상만 나타난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증언에 의하면,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 왜곡 되지 않은 참된 영적 현존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성은 인류 종교사의 과거와 미래 모든 영적 현존의 진정성을 가름하는 판단 규범이 된다. 예수의 인간성이 성령의 현존에 온전히 붙들리시고, 그에게 무제약적으로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신앙고백적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이 그분 안에 계신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는 초대교회의 전승 안에서도 이러한 영 그리스도론(Spirit Christology)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음을 보여 준다.
영 그리스도론에 의하면, 세례 시에 예수는 성령을 충만히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함과 확신을 얻고, 성령에 의해 광야에 나가 시험의 연단을 받으며, 영적 충만으로 심신이 병든 자를 치유하고, 변화 산정에서(마태 17:1~8) 제자들과 함께 황홀한 신비체험을 한다. 제4 복음서의 출현을 계기로 헬라 교부들에 의해 로고스 기독론이 그보다 앞선 영 그리스도론을 압도해가지만, 영 그리스도론은 기독교 신앙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참다운 인간성을 위협하는 이단적인 가현론적 기독론(Docetic Christology)으로 빠져들지 않게 하는 안전핀 역할을 했다.
공관복음서가 증언하는 영 그리스도론의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추가적으로 있다. 하나는,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은 나사렛 사람 예수 자신의 영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의 현존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 말은 기독교 신앙이란 단순한 예수 개인 숭배 신앙이 아니고 예수 안에 나타난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6:16)라는 것이다.
영 그리스도론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 나타난 계시 사건의 독특한 성격과 모든 역사 속에 나타난 영적 현존 사건의 진정성을 가름하는 질적 중심 사건 (revelatory event for qualitative center)’이 된다는 기독교 신앙의 확신적 고백이다. -『조직신학』제3권, 138~149쪽

되새김

이번에 되새김할 주제는 틸리히 신학에서도 중요한 쟁점이요, 동아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뜨거운 감자가 되는 문제이다.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보자. 되새김자를 포함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자기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른바 기독교가 말하고 성경이 증언하는 성령이란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한 특별한 영이고, 교회나 심령부흥회나 기독교적 종파의 영적 수련회에서만 역사한다고 생각한다.
신구약 성경은 그 당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와 초대 기독교적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던 방대한 이교 문화에 맞서 대결하는 종교 문화 상황에서 기록되었다. 따라서 성령의 국지성(局地性), 배타성(排他性), 차별성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성령 곧 하나님의 현존은 우주적 보편성을 갖기 때문에 특정 종파나 종교 기관에 유폐당할 수 없다. 기독교 공의회의 신앙고백에 의하면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시다”. 그렇다면 참 생명이 살고 양육되고 진리와 성실로 삶의 열매를 맺게 하는 성령의 역사와 현존이 특정 종파, 특정 경전, 특정 시공간에 갇힌다는 것은 그 발상 자체가 비신앙적이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현존, 곧 성령이 우리 민족에게 접촉하시고 일하시기 시작한 때가 1874년 한국 가톨릭의 첫 명례방 교회가 탄생했을 때부터라고 생각한다거나, 1885년 개신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때라고 주장한다면 그것 자체가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조금 유치한 사례를 든 것 같지만, 사실 문제의 본질은 그런 것이다.
영적 현존, 곧 성령의 일하심과 인간의 영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신다는 걸 인정한다면,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에 세계 각 지역에 존재했던 종교적 삶을 좀더 긍정적으로 성찰해야 할 것이다. 주객 구조가 극복되고 인간 본질과 실존의 분리가 초극되면서 경험하는 황홀한 체험을 무조건 이교도적이라거나, 심지어 악령이 역사한 결과라고 매도하는 배타적 사고는 너무 편협한 생각이다. 그러한 신학적 패러다임은 이제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 열린 마음을 가진 진솔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귀의한 종교에 충성하고 충실하지만, 다른 문명과 다른 종파에서도 진리와 참된 영성과 선함과 성실이 드러났음을 직접 보고 느끼고 만나려고 한다.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구상에 나타난 모든 영적 현존 경험이 올바르고 왜곡되지 않은 성령의 임재 사건이요, 역사하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또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된다. 틸리히가 지적했던 것처럼 종교체험이 개인과 사회를 비인간화하고, 성숙과 전진을 가로막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참 영의 현존과 거짓 영 및 왜곡된 영 경험의 비진리성을 분별하는 기준이 필요하고 조직신학적 성찰은 그 분별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 이에 대해 기독교에서는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 기준은, 황홀한 영 체험이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영 체험을 하는 개인과 공동체는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인간성의 고양, 정의로움의 추구, 사랑과 자비의 봉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선한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선한 나무가 아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현존 체험이라면 그 구체적인 용어와 상징 표현은 문화마다 조금씩 다를지라도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열매(갈 5:22〜23)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번째 기준은 참다운 영적 현존의 판별 기준으로,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삶과 그것들의 결승점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드러난‘진리계시’를 판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웃 종교인들은 그러한 기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진리 현시가 모든 영적 현존 체험의 진정성과 계시 체험의 성숙도를 판별하는‘질적 중심(qualitative center)’이란 생각을 기독교라는 종파적 오만과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럼 에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고백하고 있으며, 그것은 실존적 고백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예수는 나사렛에서 살았던 아주 구체적인 실존 인물이다. 또한 모든 인간이 겪는 유한자로서의 한계상황(생로병사를 비롯한 실존적 유한성)을 철저하게 겪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한계상황과 ‘주객이분법’에 갇히지 않고, 그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과 온전히 일치되는 삶을 살았으며 동시대 인간과 자연과도 ‘하나’ 된 삶을 살았다. 그 ‘하나 된 삶’에서 우러나온 능력과 영광을 자신을 위해 주장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를 비워 ‘진리이신 하나님’을 온몸으로 투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그는 ‘사랑과 정의’를 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지만, 원수를 분노와 보복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천부님께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세상의 악과 죽음이 그를 무덤에 가두었으나 그것들이 예수 안에 있는 ‘죽음도 어찌할 수 없는 그것’까지를 가두어 둘 수 없었다. 하나님이 그를 다시 일으키신 것이 바로 부활이다. 하나님이 그를 부활시켰다는 말은 진리, 생명, 사랑, 신실이 그를 다시 일으켰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란 절대군주가 아니라 진리, 생명, 사랑, 신실 그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틸리히가 초대 그리스도론 형성 과정에서 공관복음서가 증언하는 ‘영 그리스도론’이 시기적으로나 제자들의 증언으로나 제1차적 그리스도론이고, 제4복음서와 헬라 교부들의 ‘로고스 그리스도론’을후차적 그리스도론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의미가 크다. 그러나 두 가지 그리스도론은 알고 보면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마치 동양의 성리학적 우주론과 인간 품성론에서 말하는 기(氣)와 이(理)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고, 혼동될 수 없으며, 서로 독립될 수 없다. 신적 영과 로고스의 관계도 그러하다.
동서양의 진리 체험과 하나님의 현존 체험은 서로 통하면서도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서로 강조하는 것이 다르다. 그 결과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개인과 공동체의 삶 또한 양탄자의 무늬처럼 차이를 드러낸다. 그 구체적인 특징은 동서 종교의 신비체험에서 드러나는데, 예를 들자면 불교와 기독교는 ‘진리 그 자체’와 하나 되는 체험의 양태(樣態)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불교와 기독교의 특징적 차이점은 뒤에서(제5부 ‘역사와 하나님 나라,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서)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영적 현존 체험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범위 내에서만 되새김해본다.
불교 중에서도 대승불교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아온 한국인으로서는 불교의 신비체험과 기독교의 신비체험을 비교 분석했던 틸리히의 탁월한 통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할 말도 많다.
대승불교든 부파불교(소승불교)든 불교의 핵심 종지는 인연생기설 (co-origination theory)이다. 이것은 물질적 실재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 실재도 영원불변한 자기의 본체(substance)를 독자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없으며, 삼라만물과 삼라만상은 어느 것이든 서로 이러저러한 관계적 구성체로서 잠시 생기(生起)했다가 사멸(死滅)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성주괴공(成住壞空)이요, 그래서 무자성(無自性)이라는 것이다. 광물, 식물, 동물, 인간, 신적 존재자들도 잠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적 실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집착이 생기고 고뇌가 생기고 독단과 분열과 비극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불교적 실재관은 개체아(個體我)에 대한 궁극적 긍정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개체아들이 집단적으로 이루어가는 역사적 공동체의 ‘의미 물음’이나 ‘역사적 실재성’ 가치에 대해 기독교에 비해 소극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승불교가 사회 정의나 인간의 불의한 현실에 대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비판 정신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공동체 안에서 사회적 정의의 실현보다는 개인의 깨달음과 수행을 더 중요시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불교적 신비체험이란 기독교의 그것처럼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신령한 영적 체험이 아니라, 삼라만물의 ‘인연생기법’을 확연하게 깨닫고 머리뿐만 아니라 몸으로 느낄 때 오는 ‘만물이 한 몸〔萬物同體〕’이라는 직접적인 체험이다. 타자의 행복과 불행이 곧 나의 행복과 불행으로 느껴진다. 타자의 고난은 곧 나의 고난이요, 나의 책임이 그 일부라는 깨달음을 갖는다. 그래서 보살행(蓄睦行)은 깨달은 자가 베푸는 동정적 시혜가 아니라 당연하고 동시적인 큰 슬픔〔大悲〕의 결과다. 『유마경』의 아름다운 표현에 의하면 “중생(衆生)의 병(病)은 무명(無明)에서 오고 보살의 병은 대비(大悲)에서 온다.”
기독교의 신비체험도 개체의 주체성이 성령의 임재, 혹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의 능력과 의미에 휩싸여 ‘주객 구조’ 관계가 초극되면서 황홀한 경지에 들어가고 지복 감정으로 충만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을 본질적으로 동일시하거나 ‘내가 곧 하나님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른바 범아일여 (楚我一如)란 본래 인도 브라만 종교 우파니샤드에서 주장하는 우주적 ‘브라만’과 소우주인 개체아의 본질인 ‘아트만’이 본질적으로 동일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 행하는 법회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천도교의 ‘시천주 인내천(侍天主人乃天)’도 글자 그대로의 ‘본질적 동일체’라고 보이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 본질적 동일체라면 예불(禮佛)이라는 종교 의례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한국의 대승불교는 유동식 교수가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성의 근본을 이루는 ‘하눌님 신앙’과 종교적 지평 융합(地坪融合)을 이룬 결실이 아닌가 여겨진다. 조계종으로 대표되는 한국 불교의 특징은 선사상(禪思想)과 화엄 사상(華嚴思想)의 융합이라고 말한다. 전자가 강조될수록 불교는 명상수행(暝想修行)을 강조하는 철학으로서의 불교 성격이 더 드러나고, 후자가 강조될수록 불교는 신심 보살행(信心菩薩行)을 강조하는 종교로서의 불교 성격이 더 드러난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어떠한가? 깊이 생각하고 철저하게 사유하면서 명상하는 것이 비신앙적이라 매도하는 반지성주의가 횡행하는 형국이 아닐까? 입으로는 ‘하나님 신앙’을 부르짖지만 머리와 마음으로는 교리적 기독교 신관을 자신의 부와 안전을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것은 아닐까? 종교개혁 정신의 본질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라!’는 것이며, 우상을 파괴하고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면서 봉사의 삶을 사는 데 있다면, 위에서 말한 불교 『유마경』의 보디사트바 정신을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자기와 자기 교회의 부귀 행복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족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과는 너무나 다르다. 또한 복음의 본질과도 상관없는 ‘이기적 기복 신앙’에 불과하다.

목요CAFÉ 매주 목요일오후 7시(2021.7.8 미주동부시간 오후7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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