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2021.7.15. 목요 cafe

목요 CAFE
작성자
akuc
작성일
2021-07-16 09:20
조회
968
틸리히 신학 되새김 - 노트  39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칭의 신앙

‘역설로서의 새로운 존재 체험’을 종교개혁자들은 칭의 신앙이라고 이름했다. 종교개혁의 핵심 교리인 칭의 신앙은 개신교(protestantism) 가 서거나 넘어지는 핵심 교리로, 그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은총에 의한.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원리 (the principle of 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oith) 이다.
이 교리는 여러 중요한 교리들 중 하나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원리로 본다. 왜냐하면 앞에서 표현한 그 말 속에 개신교 원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칭의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개신교의 원리로 간주되어야 한다.
내가 개신교 원리라고 말하는 칭의 신앙의 내용은 이렇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하나님만이 구원 행위를 행하시는 것이요 어떠한 인간적 주장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어떠한 형태의 종교적 주장, 지적인 주장, 도덕적 주장, 헌신적인 일들(works)로도 하나님과의 재연합(reunion)에서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그럼에도 종교개혁 당시 로마 교회 당국과의 투쟁에서 ‘오직 믿음만 (sola fide)’이라는 모토를 내세움으로써 사람의 '공적(works)’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justification by faith)’고 주장했기 때문에 중요한 오해의 여지가 생겼다. 일반적인 종교개혁의 모토,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이라는 구절에서 마치 ‘믿음 곧 신자의 신앙’이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결정을 유발하는 원인, 조건, 보상처럼 오해하게 된 것이다.
그런 오해는 가톨릭 교회가 하나님의 의롭다는 선언이 교회의 사제 집단이나 신자들이 행하는 도덕적 선행이나 성례전적 바른 집례를 통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데 비하여, 개신교도는‘칭의 신앙’교리를 지적으로 수락하는 행위로 대체하는 데 불과한 것처럼 오해를 일으킨 것이다. 다시 말해 개신교에서는“믿음이라는 행위”가 또 다른 공적주의 신앙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인간의 믿음이 의롭다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의롭다 하시는 근거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이 행위 선언을 감사와 감동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일 따름이다. 이 받아들이는 행위마저 ‘은총의 선물(a gift of grace)’이라고 종교개혁자들은 주장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이라는 구절은 “은총에 의한, 믿음을 통한 의로움(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인간이 어떻게 자기가 용납되었다는 선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은 자신이 죄책감과 그에 따른 벌을 받아야 옳다는 감정과 동시에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양립시킬 수 있는가? 인간이 죄 용서를 받았다는 확실성을 그 무엇이 줄 수 있단 말인가? 대답은 오로지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무조건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의 은총에 달린 것이다. 루터의 유명한 말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simul Justus, simul peccator)”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바로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 원리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이러한 신앙을 가능하게 하며 인간 존재 안에 있는 선악 판단의 기준이나 선악 행위의 목록을 찾아내려는 시각을 돌려서 선악을 넘어서고 햇빛을 선한 이나 악한 이에게 고루 비추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선하심에 인간의 눈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역설적 진리 체험과 은총 체험은 종교개혁자들의 신앙 투쟁에서 “은총에 의한 믿음을 통한 칭의 원리(the principle of 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로 표현 되었는데, 이 진리 체험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주창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성 어거스틴을 통해 주창된 것이요, 그것을 마틴 루터가 다시 새롭게 재조명한 것이다. 십자가를 통한 은총의 승리이다. 一『조직신학』 제3권, 223-227쪽, 243〜245쪽

되새김
2017년은 종교개혁 5백 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국내외적으로 학술회의와 신앙 집회가 다양하게 열렸고, 교계에서도 여러 기념행사를 가졌다. 그 모든 학술회의와 신앙 집회 및 기념행사는 나름대로 각각 의미 있게 기획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종교개혁의 근본정신, 근본 토대, 근본 원리를 다시 한번 깊이 성찰하고 음미 하고 계승·발전·심화시키는 일보다 는 과거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 업적과 개신교 교회사에 나타난 이런 저런 일을 복송하거나 신줏단지 다루듯 특정 교파의 장점을 선전 홍보하는 일에 그칠 위험이 있다.
마틴 루터와 그 이전 종교개혁 선구자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당시 교황청의 과오에 대해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을 규탄하는 것이나, 속화된 교회를 말씀으로 정화하려는 열정에 관해 생각하면 루터와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 선구자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루터의 위대성은 단순히 드러난 신앙적 타락상이나 신학적 과오를 지적하고 교정하려는 수준을 넘어서 기독교 신앙의 근본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것’인데 예수를 믿는다는 말, 구원받는다는 말, 어떻게 왜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래서 루터가 찾은 대답은「로마서」에 나오는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7)를 붙잡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이라는 루터 종교개혁의 제1원리를 주창하게 되었다. 소위 믿음에 의한 칭의 신앙이란 것이요, ‘오직 믿음만(sola fide)’이라는 표어가 개신교도들에겐 핵심 교리로 교육되고 각인되었다.
그러나 지난 종교개혁 이후 5백 년간의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를 뒤돌아보면, 루터의 본래 의도와는 상당히 동떨어지게 ‘오직 믿음만’ 이라는 개신교 모토는 많은 오해와 부작용을 낳았다. ‘믿음’의 본래 뜻은 실종되고 교회가 가르치는 몇 가지 주요 교리를 지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잘못 받아들여졌다. 믿음만 가지면 구원받으니까 신앙의 실천과 삶의 책임성을 소홀히 하는 ‘싸구려 은총 신앙’이 개신교를 병들게 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타락과 혼란, 속화와 변질의 근본 원인이다.
질병을 치료하려면 대증요법도 필요하지만 병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의사의 임무다. 개신교 신학자인 틸리히는 오늘날 개신교를 병들게 한 원인을 찾아내는 의사로서 이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다루었다.
틸리히는 개신교가 본래적 역동성과 신선함을 회복하려면 특별히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개신교의 원리 (protestant principle)’를 재확인하고 그 원리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요, 둘째는 ‘믿음으로만’이라는 오해를 일으키는 모토를 바로잡아서 ‘믿음을 통해, 은총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음(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 이라고 재천명하는 것이다.
‘개신교의 원리’라고 틸리히가 주장하는 것, 그 원리가 철저히 관철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바른 신앙, 참된 교회 , 개신교다움이 서거나 넘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신교의 원리란 무엇인가? 틸리히가 갈파했듯이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과 은총 위에 확고히 서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바로 기독교가 동아시아의 위대한 세계 종교들, 예를 들어 불교와 유교, 노장사상 등과 어떻게 그 종교 유형적 특징이 다른가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핵심이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라는 종교는 하나님의 초월성 못지않게 하나님의 내재성을 믿는 종교이다.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는 하나님”(엡 4:6)이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그분(하나님)에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행 17:28)고 고백한다. 그처럼 하나님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불가분리적 관계성을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양자 사이에 불가혼동성을 강조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이다.
하나님과 인간을 비롯해 모든 피조물 사이의 질적 차이를 깊이 인지하고 고백하는 종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일 뿐이다. 인간의 지성, 감성, 덕성, 영성이 아무리 높고 깊고 순수할지라도 그것을 곧바로 하나님이라고 동일시하거나 일치시키지 않는다. 우리 마음속에 이미 들어와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분여(自己分與)를 인간 자신의 본질이라고 착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고백은 개신교 원리를 이해하기 전에 우리가 다시 한번 성찰해야 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특성이다.
그 점을 분명히 하고서 틸리히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원리’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적어도 인간 구원의 문제와 관련되는 사안인 경우, 구원의 시작과 과정과 종결 그 모든 과정의 순간순간이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 능력, 성실, 은총 때문에 가능하고 성취된다는 기본 원리인 것이다. 어떤 형태의 인간적 공로, 노력, 협동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이성적으로나 도덕적 합리성으로 생각하면 신인협동설(神人協同說)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펠라기우스나 에라스무스처럼 인문주의적, 이성주의적 사상가들은 신인협동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바울과 성 어거스틴, 루터, 칼빈, 바르트 등은 오직 하나님 은총의 능력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놀랍게도 이 점에 대해선 틸리히도 동의한다. 틸리히는 실존철학적 신학자요 변증신학자이기 때문에 신인협동설을 더 지지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가톨릭 신학계에서도 아주 많이 연구되는 신학자이지만 철두철미 ‘개신교 원리’에 충실했다.
‘개신교 원리’에 충실히 따른다면, 인간의 구원은 물론이요 인간이 신앙을 갖게 되는 사건 자체도 은총의 사건이 된다. 틸리히는 전통적인 ‘믿음에 의한 칭의’라고 표현하는 신앙 표어(모토)를 ‘은총에 의한, 믿음을 통한 칭의’라고 바르게 수정해서 표현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유는 개신교의 믿음 행위가 중세 가톨릭 신앙의 행위를 통한 공로 업적 신앙과 차이가 없어져서 그것을 대체하는 위험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중세 가톨릭 교회가 ‘도덕적 선행 공적, 영성 수도의 수행 공적’에 따라 하나님의 보상적 구원 등급이 주어진다는 주장을 하듯이, 개신교 또한 결국은‘신앙행위’가 또 다른 공적 목록으로 대체되는 위험이 된다는 경고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개신교 안에서 특히 정통주의 신앙가임을 자처하는 신학자나 신자 대표들은 근본주의 신학의 5대 강령 조목처럼 이런 저런 기독교의 주요 교리를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개신교 원리 ’에 충실히 따른다면 하나님 신앙 곧 믿음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어머니는 자식이 아무리 몹쓸 짓을 저지르더라도, 또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비난을 받더라도 끝까지 자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죽어서 지옥불에 떨어져 죗값을 치르는 곳에 함께 가서 새사람이 되는 모습을 보길 바라며 자식을 믿어준다. 자식 또한 어머니의 절대적 신뢰를, 어머니의 무한 사랑을 믿는다. 그것이 믿음이다.
루터가「로마서」1장을 읽을 때, 구약 성서「하박국서」에서 인용한 바울의 인용문(롬 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구절에는 교리 신조에 대한 믿음이란 개념은 전혀 없고 하나님의 자비, 신실, 의로우심을 믿는다는 인격적 신뢰, 인격적 의탁, 인격적 고백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러한 하나님의 자비, 신실, 긍휼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고 깨닫는 것이다.
루터가 기독교인의 실존을 가리켜 ‘의인이면서 죄인’이라는 역설적 표현을 한 것은 절반은 의인이고 절반은 죄인이라는 말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불꽃 눈으로 보면 인간은 철저히 죄인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심층심리학이 발견한 대로, 인간의 이성적 자기 성찰 능력으로는 인간 심령의 깊은 차원에 자리한 부정적인 것을 모두 간파하고 깨끗하게 정리해낼 수 없다. 설혹 깊은 명상과 수행을 통해 지금까지 쌓인 부정적인 것들을 씻어내고 닦아낸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살아 생동하는 의지적 존재이고, 죽어 있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자기 본성에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죄 가능적 존재이다.
그러한 현실적 죄인을 하나님이 용서 하시고 용납하시며 사랑하신다는 선언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본질상 매우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종교로 보이며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이 결단과 선언을 받아들이는 용기이며 수용하는 응답인 셈이다. 그 순간, “용서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많이 사랑한다.”(눅 7:47)는 유명한 예수님의 역설적 응답 윤리가 작동한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죄인 용납의 진리를 진심으로 수용하는 죄인은 변화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전환 된다. 그렇게 변화하지 않는 것은 그 ‘믿음’이 관념적이거나 교리 수용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 아직 ‘믿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잘 믿는다’ 혹은 ‘잘못 믿는다’라는 잘잘못의 문제 가 아니며, 옳은 믿음과 틀린 믿음이라는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라는 양(量)의 문제도 아니다. 믿음은 진실로 믿는가, 성실하게 믿는가, 몸과 마음을 다하여 지극정성으로 믿는가의 여부가 중요할 뿐이다.
여기에서 되새김자는 동아시아의 종교 유산 아래서 자라난 사람으로서 불교적 구원과 기독교적 구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절감한다. 쉽게 말해 “불교란 무엇입니까?”라고 고승에게 묻는다면 “불교란 전미개오 견성성불(轉迷開悟 見性成佛)하자는 종교라네”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불자들의 인사를 들어보면 “성불(成佛)하십시오!”라고 한다. 탐진치 세 가지 독에서 벗어나서 자기의 본성을 바르게 보고 ‘깨달은 자(佛, 붓다)’가 되자는 것이다.

“기독교란 무엇입니까?”라고 원로 목사에게 묻는다면 “기독교란 예수 믿고 구원받자는 종교라네"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노방전도의 짧은 권고는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이다. 여기에서 불교는 본질상 ‘깨달음의 종교’요,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는 것이 드러난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불교에서는 무엇을 깨닫자는 것인가? 그리고 기독교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데,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불교의 핵심 종지에 의하면, 깨달음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삼라만물이 인연생기적 실재(實在)이기 때문에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개체적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밖에서 구원을 찾거나 타력(他方)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찾고 자력(自方)으로 깨달아 득증(得證)하자는 것이다. 그 두 가지를 깨달으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은 온갖 두려움과 제약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아직 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타자들을 돕고 ‘큰 슬픔의 자비〔大悲〕’로써 일하는 보디사트바(보살)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주장 또한 깊이 생각해볼수록 놀라운 복음이다. 흔히 이 명제는 서양 기독교의 강렬한 영향 아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교리로만 윤색되어 있는데 ‘십자가의 대속론 교리’는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을 설명하고 구체적 사례로 드는 사건인 셈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교리’로만 국한시킨다면 기독교 신앙은 빈약해진다.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 교리 신앙은 틸리히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원리’라는 더 큰 진리의 빛 아래에서만 바르게 해석된다.
예수가 짊어진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만인을 죄에서 구원하고 영생을 가져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세 안셀름이 가르친 대속적 속죄론, 곧 인류가 지은 죄를 예수가 대신 짊어지고 징벌을 받음으로써 죗값을 치렀다는 ‘법적 보상설’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점점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법정 논리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인격성의 대체 불가능한 존엄성과 신성성을 감안할수록 부모가 자식의 죄를 대신 치러줄 수 없다는 걸 깊이 깨닫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신적 속성 자체가 사랑이신 하나님이, 풀잎만도 못한 인생을 사는 인간의 죄를 기어이 찾아내서 그 죗값을 묻는 대 심문과 같은 재판관으로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진면목은 예수의 무한한 용서, 사랑,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일체감, 그가 아버지라고 불렀던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 불의를 폭력으로가 아니라 사랑의 힘으로 무장해제시킨 역설적 승리 등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예수의 십자가에서 보여준 모든 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과 뜻의 드러남이요 행동이었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뜻의 일치, 사랑의 일치, 구원 사역의 일치를 살아내신 메시아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존재가 단순히 예수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 안에 있다고 본다.
짧게 말하면, 십자가 사건에서 그리스도인은 인간 실존의 적나라한 모습과 죄성의 깊이를 보고 부활 사건에서 실존의 비본래성이 극복된 인간의 본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결과, 불교의 구원론과는 전혀 다른 구원론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사람의 열매는 불교의 깨달음을 달성한 자와 놀랍도록 똑같은 모습을 지닌다.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으로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자가 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함을 기쁘고 보람 있는 일로 여기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성불했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두 가지 표현에서 두 종교의 유형적 특성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물론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불교 신앙에도 부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기원하는, 타력에 의존하는 은총 신앙의 요소가 있다. 기독교 또한 오랜 신비주의 영성 전통에서는 불교의 선수행(禪修行) 못지않은 명상기도와 관상기도의 깊은 전통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종교의 차이와 특성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기독교의 경우 ‘프로테스탄스 원리’라고 선언하는 두 가지 요소,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적 차이에 대한 신앙고백과 인간 구원에 관계 되는 사안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 영광, 은총의 초대와 선물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佛性)은 모든 사람의 본래적 마음이라고 곧바로 동일시한다. 불교는 브라만 종교를 혁신하고 나온 새로운 종교개혁 이지만, 인도 브라만 종교의 우파니샤드가 선언하는 ‘인도 종교의 원리 ’ 곧 ‘범아일여(楚我一如, Brahman-Atman Identity)’라는 핵심 사상을 종교 유산으로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기독교는 우리 속에 있는 신성, 하나님의 형상, 불멸적 본성은 하나님의 자기분여로서 선물이지 피조물 인간 자신의 본래성이거나 전유물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이고 기독교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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