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2021.8.5. 목요 cafe

목요 CAFE
작성자
akuc
작성일
2021-08-04 12:57
조회
990
노트 23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궁극성과 새로움의 표식들

새로운 존재란 실존적 조건과 실존 상황에서도 본질과 실존 사이의 갈라진 틈(gap)을 극복하고 본질적(본래적)존재가 되는 것을 뜻한다. 같은 생각을 사도 바울은 저 유명한 말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 :17)라는 문장으로 갈파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로운 존재’를 말한다. 메시아 구세주가 오시 면 옛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새 시대가 오며 만물은 새롭게 변화된다는 믿음은 역설적 체험을 통해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진실이 되었다. 특히 부활절 체험과 성령 강림 체험을 통해, 외면적으로 혹은 양적으로 옛 세계의 모습은 변화된 것이 없을지라도 내면적으로 혹은 질적으로 세상과 만물과 인간은 새로운 실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 역설적 담론의 틀을 제시한 사도는 바울인데 ‘그리스도 안에 있음’과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능력과 현존 안에서’라는 프레임을 제시한 것이다.
그 담론의 틀은 결국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 현존하는 ‘존재의 능력과 은총의 힘’에 옛 사람이 동참하여 새로워짐을 의미하고 전제한다. ‘새로운 존재’, 곧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 개념은 두 가지 면에서 새롭다. 첫째, 새로운 존재는 본질적 존재가 지닌 단순한 가능적(잠재적)상태와 비교할 때 실현된 현실태라는 점에서 새롭다. 둘째, 새로운 존재는 실존적 존재가 지닌 소외적 성격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 갈릴리 랍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 때,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옛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동시에 인지하고 고백했다.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용어로 말하면 ‘새로운 시대(new eon)’가 동튼 것이다. 그것은 옛 역사의 종말을 의미하고, 실존적 소외 상태에서 허덕이던 옛 사람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성자, 현인, 초능력자, 위대한 교사가 아니라 그 이상을 능가할 수 없는 계시적 궁극성(ultimacy)을 담지 한다고 고백하고 선포했다.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움과 궁극성의 드러남에 대한 표현들은 신약 성서 증언자들에 따르면 다양한 설명으로 같은 의미를 강조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율법의 완성 혹은 끝’이며, 기다리고 소망하는 성격을 지닌 ‘역사의 성취이자 목표 달성’이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새로운 존재’요,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새로운 피조물’의 원형, 첫 열매, 새 아담이므로 그의 존재가 새롭기 때문에 그의 언행과 존재의 모든 드러남이 새롭다. 첫째, 그의 존재가 새롭기 때문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새로울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인격적 존재 자체가 ‘말씀의 화신체’(요 1:14)였다. 그의 실존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 인지되었다. 그의 새로운 존재로서 "존재가 말하기보다 앞서 있다는 원리 (the principle that being precedes speaking)”를 기독교 신학은 굳게 붙잡아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새로움은 그의 행위에서 드러난다. 그의 행위는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의 능력에 닿아 있고 그 무진장한 능력이 성령의 역사하심과 함께 드러났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행위가 능력, 권위, 치유, 갱신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행위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드러남이기 때문에 그분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은 투명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셋째, 그리스도 예수의 새로움은 그의 고난의 신비 속에서 드러났다. 인간 실존의 고난과 곤경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는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고난을 분리할 수 없다. 고난 없이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조직신학』 제2권, 118-125쪽

되새김

틸리히는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새로운 존재’라 부른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는 그리스도인의 경험 고백의 의미를 새로운 존재인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과 의미와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소외된 인간 실존도 새롭게 되는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아울러 자기가 말하는 ‘새로운 존재’란 사도 바울이 갈파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가봉국의 오고웨 강 하류에 있는 랑바레네 마을에서 원주민 치료에 헌신했던 의사 알버트 슈바이처도『사도 바울의 신비주의』라는 자신의 책에서 바울을 유대교 전통의 신비가로 보았다. 또한 사도 바울의 신비주의의 핵심 본질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비주의 (mysticism en chri-sto)’라고 강조했다. 흔히 오해하듯이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헬레니즘화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종말론적 복음의 본질을 헬라 문화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이해의 틀, 혹은 해석학적 프레임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라는 종말론적 신비주의를 목회 서신에서 계속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란 어떤 상태이며, 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옛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 구원을 경험하는가가 변증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란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새로운 존재의 ‘능력과 의미 충만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 합일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예수의 십자가에서 옛 사람은 부정되어 죽고 예수의 부활에서 실존 생명은 긍정되어 새롭게 재탄생하는 경험이다.
왜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생명은 새롭고, 그는 창조적 변혁의 능력을 지녔으며, 그의 존재에 접촉하면 치유되고 새로운 사람으로 재탄생 하는가? 예수는 자신도 한 인간으로서 인간 실존의 모든 조건과 상황에 철저히 참여하면서 인간들의 실존적 소외 상태를 능히 극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그가 하나님이라고 부른 분의 뜻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온전히 순명함으로써 하나님과 일치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소외된 인간들의 삶에 들어가 완전히 일치된 삶을 살면서 그들을 치유하고 살려냈으며, 자연마저 그에게 순복한다고 제자들이 느낄 정도로 존재하는 것들과 그 중심에서 하나 됨의 삶을 살았다.
예수 안에 나타난 존재의 새로움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본 후에도 죽음의 권세가 그 새로움의 존재 능력과 의미를 어찌하지 못할 만큼 강력하고 영속적이었다. 마침내 그 새로움의 능력과 은혜의 힘은 그리스도의 영적 현존을 통해 신도들의 심령과 신자 공동체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였다. 처음 공동체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임재를 통해 새로운 존재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현존을 체험했다.
‘그리스도 안의 신비주의’는 단순한 도덕주의 운동이거나 심리적 감정이 아니다. 그야말로 신비적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인간 편에서 역사적 예수의 삶을 닮아보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방’과 다르다. 신자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삶과 생명에 동참하고 어떠한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적 열정과 의지를 동반하지만, ‘그리스도 안의 신비주의’가 말하듯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신도들의 심령을 찾아오신 사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믿음은 능동적 결단과 선택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수동적 수용과 은총의 선물로 체험되는 것이다.
새로운 존재이신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서, 실존적 소외를 극복한 건강한 사람으로서,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그의 언행은 곧 그의 ‘새로운 존재’의 표현이요 드러남이요 열매였던 셈이다. 예수의 입에서 설파된 이런저런 교훈과 가르침만이 아니라 그분의 존재가 곧 ‘말씀’이었다. 예수의 언행을 비난하는 적대자들이 많았다. 현실적으로는 유대교 전통과 율법 조문에 위배되는 일을 하고 신성모독적 자기주장을 일삼는다고 그를 비난하고 적대시했지만, 예수의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는 걸림돌이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의 존재 방식 자체가 적대자들의 인간 소외 상태를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폭로했기 때문이다. 적대자들뿐만 아니라 그분 앞에 서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의 새로운 존재로서의‘말씀’에 순명하든지, 아니면 반항하여 그를 적대시하든지 양단간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스칸달론(걸림돌)’이다. 중립이나 판단 보류는 허락되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종교 문화 풍토에서 기독교가 지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계시적 진리의 궁극성 주장’은 항상 종교적 갈등과 충돌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 안에 나타난 진리의 궁극성이란 물론 객관적으로 증명될 사안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고백하고 주장하고 견지하는 이유는 실존적 고백의 결과이면서 다음과 같은 진실을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계시적 진리의 궁극성 주장은 초대교회 신자 공동체 안에서 다음과 같은 확신으로 나타났다.

첫째, 세계 역사는 참된 구원의 메시아 출현을 준비하는 기다림의 역사였는데, 이제 참된 메시아가 나타남으로써 역사는 그 모호성과 반복성을 끝내고 종말에 도달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계시의 진정성은 종교사에 출현한 모든 종교의 진위를 판가름할 만한 척도와 규범이 된다. 구체적으로 자기희생을 동반한 사랑의 윤리 종교이다. 종교적 영성의 궁극적 핵심은 자기희생을 동반한 사랑의 영성이다. 그래서 마하트마 간디도 자기희생을 동반하지 않는 종교는 단지 ‘사회악’이 될 뿐이라고 했다. 그 종교가 아무리 위대한 형이상학적 진리 체계와 축적된 종교 전통을 지닌다 해도 그렇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도 말했다. “예수가 전해주고 사색으로 이해된 기독교의 본질은 다만 사랑에 의해서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 체험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인식이란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의 의지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요한복음」의 핵심 구절이 생각난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특히 십자가상의 비참한 수난의 의미를 신앙 적으로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범주적 틀로 이른바 속죄론이 강조되어왔다.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은 만인의 죗값을 대신 치르는 속량과 속죄의 제사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직접 개입으로 이루어졌다는 이해이며 해석이다.
틸리히는 대속적 속죄론이 말하려는 항구적 의미와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틸리히는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임 당함은 그가 담지한 ‘새로운 존재’의 필연적 표현이요 결과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사랑과 진리와 성실의 화신체’인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의 필연적 운명이요, 이 세상에 깊이 감춰진 어둠과 악한 세력과의 양보할 수 없는 진리의 투쟁 결과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이 세상의 권세와 힘이 예수를 패배시키고 승리한 것 같지만, 깊이 보면 예수야말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을 이기셨고 메시아가 되셨다.「요한복음」기자는 예수의 최후 모습을 역설적으로 이렇게 증언한다.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에서 패배한 것처럼 죽음을 맞이한 예수의 마지막 말뜻을 진실로 그러하다고 알고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동양의 위대한 지혜 종교와 기독교라는 역설적인 아가페 종교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웅변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 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一「고린도전서」1 장 22~23절

‘목요CAFE’는 한사람의 강의를 일방적으로 듣기보다는 교재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름으로 자신이 소화해서 자기의 신앙에 소리를 내보자는 의도입니다.
편한 마음으로 사랑방을 드나들 듯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미 동부표준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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