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2021.10.14. 목요 cafe

목요 CAFE
작성자
akuc
작성일
2021-10-11 20:52
조회
698
노트 26

구원론에 관하여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보편적인 의미는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그분에 의해서‘구원’이 이루어졌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Savior), 중보자(Mediator), 혹은 속량자(Redeemer) 로 불린다.

‘구원’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심원한 의미를 내포하지만, 결국 극복해야 할 결정적 부정성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 인간 실존에 있어 궁극적 부정성 (ultimate negativity)은 죄의 심판, 죽음, 인간 존재로서 내적 목적의 상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으로부터의 배제를 의미 한다. ‘구원’이라는 영단어의 뿌리는 라틴어 ‘살부스(salvus)’에서 유래 한다. 이 단어는 본래 건강, 안녕, 무사 안전, 구조, 복지 , 구원을 뜻한다. 결국 ‘치유받음(healed)’이라는 기본 뜻을 바탕에 깔고 있다.

구원은 신체적·정신적·영적으로 병든 상태에서 ‘치유(healing)’됨을 의미한다. 치유는 결국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자기 자신과의 분열(分製) 갈등이 치유되어 재연합됨 (reuniting)을 의미한다.

계시란 신적 일들에 관한 천계 정보가 아니다. 계시란 사건들 안에서, 인격적 사람들 안에서, 사물들 안에서 ‘존재 지반 (the ground of being)’ 이 나타나는 사건이다. 그러한 나타남(manifestation)은 사람들을 뒤흔들고,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능력을 지닌다. 그러한 계시적 사건들을 눈여겨보면, 그 안에는 새로운 존재의 능력(the power of the new being)이 현존한다. 비록 현세에서는 그 현존이 예비적 전조이거나 부분적이거나 쉽사리 마성적으로 뒤틀릴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나타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구원과 치유가 일어난다.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담론은 그분의 인격과 행위를 구별하여 다루곤 했는데 전자는 주로 기독론에서, 후자는 주로 구원론이라는 주제 아래서 다루었다. 그런데 그 분리는 옳지 않다.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의미는 곧 그분의 존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세 가지 측면, 곧 그 사람 안에서 예언자적(prophetic), 제사장적 (priestly), 왕적(royal) 요소가 순수하고 투명하게 드러남이었다. 특히 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능력을 속죄론(atonement)이라는 교리 안에서 취급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한다는 속죄론은 기독교 사 상사에서 객관적 속죄론, 주관적 속죄론, 통합적 속죄론의 세 유형으로 대별할 수 있게 전개되었는데, 그 시대의 세계관과 문화적 상황이 밑받침되고 있었던 것이다. 교부 오리겐(Origen)과 중세 초기 안셀름 (Anselm)의 속죄론은 객관적 속죄론에 가깝다. 인간이 속죄 사건에 직접 관여할 여지가 없다. 속죄 사건은 하나님. 사탄, 그리스도와의 대결과 관계성 안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중세 후기 아벨라르드(Aboard)로 대표되는 주관적 속죄론은 그리스도의 무제약적 자기희생을 통한 아가페적 속죄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인간의 주체적 참여를 강조한다. 루터와 칼빈이 대표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속죄론에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객관적 속죄론과 주관적 속죄론이 담보하려는 신학적-영성적 속죄론의 중요한 의미를 동시에 통전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깊이 있고 신학적으로 올바른 속죄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신학적 기본 명제를 담보하는 속죄론적 구원론이라야 한다. 첫째 명제는 가장 중요한 명제인데, 속죄 사건의 모든 과정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속죄적 과정이라는 원리이다. 둘째 명제는, 속죄 사건에는 하나님의 화해하시는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정의 심판 사이에 갈등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에게는 정의가 사랑의 구조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셋째 명제는, 인간의 죄책과 징벌을 하나님이 간과하고 옮겨버리셨다는 속죄론의 근본정신은 결코 실존적 인간의 소외라는 실재성과 그 깊이를 가볍게 간주한다는 싸구려 은총신앙이 아니라는 점이다. 넷째명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속죄 사건은 하나님의 속죄 행위가 구체적인 인간 실존적 소외 상태와 자기 파괴상태 속으로 깊이 참여하시는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그것의 가장 뚜렷하고 심오한 표징이다. 다섯째 명제는, 속죄론의 핵심이 새로운 존재의 능력과 실재에 인간이 참여함으로써 현실화된다는 실존적 참여의 원리이다. 단순한‘대신과 대속’이 강조될 것이 아니라‘참여와 변화’가 강조 되어야한다.

속죄 사건이 인간의 응답적 참여와 변화를 요청하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구원 사건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론 및 속죄론의 핵심인데, 압축하면 세 가지 양태의 참여적 변화를 동반한다. 그 세 가지 특징을 전통적 신학 용어로는 중생(regeneration), 칭의(justification), 성화(sanctification)라고 했다.

첫째. 중생은 옛 사람, 소외 상태의 실존이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참여(participation)함으로써 얻게 되는 구원을 말한다. 중생 곧 거듭남은 인간의 심리적-도덕적 자기반성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 안에, 그의 영적 현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사로잡혀서 새롭게 재탄생하는 일이다. 새로운 존재로의 참여를 강조는 경건주의 전통과 감리교 계통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강조하는 바다.

둘째, 구원은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새로운 존재를 수용(acceptance)하는 사건으로서의 구원을 말한다. 특히 루터 교회 전통에서 강조되었다. 칭의 신앙(justification by faith)은 비록 현실적 인간이 아직 완전하게 성결 상태에 이르지는 못했다 해도 하나님이 죄인을 용납하신다는 은총의 선언을 수용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의 역설적 표현 곧 “인간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or)라는 말이 그 진실을 잘 나타낸다. “믿음을 통한 은총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eith)”임을 명심해야 한다. 믿음이 또 하나의 공로 신앙의 조건으로 전락되어서는 안 된다.

셋째, 구원은 새로운 존재에 의한 변화(transformation)를 의미한다. 칼빈의 개혁파 장로교 신학 전통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중생과 칭의는 마침내 끊임없는 성화의 열매로 결실되어가야 한다. 거룩한 종교 영역과 개인의 내면생활뿐만 아니라 삶 전체가 성화되어야 진정한 구원이 현실화되는데, 그렇게 현실 세계의 전 영역을 변화시켜가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그 거룩한 소명에 인간은 참여해야 한다. 「조직신학」제2권, 165〜180쪽

되새김

종교인들에게 구경(究竟)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구원을 얻기 위해서, 구원받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구원’이라는 말은 특히 셈족계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많이 쓰이지만, 우리 민족 역시 오래전부터 이 단어를 써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불교에서는 ‘구원을 받는다,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 대신 “전미개오(轉述開倍)하여 성불(成佛)하세요”라고 한다. 모두 부처님처럼 되라는 말이 아니라 부처〔佛〕는 붓다(깨달음)를 의미하는 것이니, 아집과 집착에서 홀연히 깨우쳐 사물의 진면목을 깨달으면 그것이 곧 구원을 받은 상태라는 것이다. 사물의 진면목이란 다름 아니라 삼라만상이 인연생기의 현상이니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영구불변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완전한 자유인이 되라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극기복례(克己復禮), 내성외왕(內聖外王)’하려는 것이 유교의 종지라고 압축해서 말한다. 불교나 유교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흔히 말하듯이 철저한 자력 종교라고 강조되기도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와 공자는 그 ‘구원의 길’에 이르는 동안의 위대한 선각자, 스승, 지혜자, 모범자, 인류의 성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힘입어 목적에 도달한다는 의미에서의 ‘구원자(Savior)’ 개념은 약하다.

그 점을 고려할 때 기독교는 예수가 선각자, 스승, 지혜자, 성인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분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그분의 삶과 하나 되는 연대를 어떻게 이루고, 그분의 분부를 얼마나 실천적으로 순명하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가능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종교이다. 거칠게 말하면 타력 종교인 셈이다. 기독교는 예수라는 인격적 생명체, 곧 틸리히의 용어로 말하면‘새로운 존재이신 예수’생명과의 관계 여부가 구원을 현실화시킨다.

특히 동아시아 종교인 불교나 유교가 우주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면, 기독교는 인간 실존의 죄성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죄라는 것이 단순히 도덕적-윤리적 실수나 약함에서 오는 불륜 정도가 아니라고 본다. 소위 틸리히가 말하는 죄란 실존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실존적 소외’ 상태인데, 기독교가 말하는 소외는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고 적극적인 개념으로서 인간의 의지적 가치 전도를 의미한다. 무지 때문에 죄짓는 것도 아니고, 삼라만상의 본래적 존재 양식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죄짓는 것도 아니다. 잘 알면서도, 그것을 거절하고 싫어하고 반동을 일으키고 생명 동산에서 타자 위에 군림하려 든다.

이러한 영혼의 질병은 인간의 의식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잠재의식과 무의식 차원에까지 암세포가 전이(轉移)되듯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자기 성찰과 도덕적 자기 수양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능력에 의해 ‘새롭게 변화 받는 사건’ 없이는 구원이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했던 불교나 유교와 비교할 때, 기독교의 구원론은 삼각관계로 특징지어진다.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삼각의 정점을 이루는 것이다. 구원론 담론에서 가장 중요한 제1명 제 혹은 제 1원리는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주권 강조, 선행적 구원 행위, 무조건적인 자비와 긍휼이다.

그런데 구원은 돌멩이나 송아지에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인격적 책임과 결단의 자유를 지닌 인간 존재에게 발생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응답적 참여가 절대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신학계에서 극단적으로 말하는 신본주의나 정반대의 인본주의 신학이란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 언어적 희론(戱論)이다. 그런데 하나님 중심과 인간 중심 구원론의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전환시키는 제3의 꼭짓점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이신 예수인 것이다.

틸리히가 조직신학자답게 잘 정리한 대로, 기독교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존재의 힘과 의미에 참여하고 그것을 수용하며, 그 의미와 능력에 의해 변화 받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에 참여하는 구원의 모습을 ‘중생, 거듭남’이라 부른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의 힘과 의미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구원의 모습을 칭의라고 부른다. 그 새로운 존재의 능력 의미에 의해 인간실존의 옛 존재가 거룩하게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성화라고 부른다.

중생, 칭의, 성화는 분리될 수는 없으나 구별할 수 있는 구원의 세 가지 양태요 체험적 내용이다. 바울이 말한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선언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의미를 틸리히는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참여하고 수용하고 변화되는 것으로 해석한 셈이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를 중생, 칭의, 성화라고 보았다.

구원론에 대한 틸리히의 참신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증언하는 ‘구원’의 의미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빠져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중생, 칭의, 성화를 넘어 궁극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간다는 영화(glorification)이다. 이 네 번째 구원 개념은 바울이 말한바 ‘영원한 생명의 기업’에 초청받아 참여하는 영생에 대한 소망의 구원을 뜻한다. 그러나 단순히 기대하거나 희망하는 사항이 아니고, 부분적으로 청동거울 속에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나마 현재적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경험하는 사후생인 셈이다.

틸리히의 조직신학 구원론에서 제4요소가 소홀히 취급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기독교의 변증신학자로서, 그리고 철학적 신학자로서 기독교 신앙을 현대인들에게 재해석해주려고 노력했으나 그 재해석 작업의 해석학적 도구가 키르케고르가 강조한 실존주의 인간학, 칼 구스타브 융이 발전시킨 무의식적 심층심리학. 그리고 루돌프 오토가 강조한 거룩한 것에 대한 종교학적 통찰에 머물기 때문이라고 본다.

성서에서 들려오는 진정한 ‘새로운 소리, 낯설고 기이한 음성, 놀랍고 감사한 소리’는 흙으로 지음받은 인간 피조물을 궁극적으로는 변화 시켜 하나님의 영광의 파트너로서, 증언자로서, 찬양자로서 영생을 부여하겠다는 초청이 아닐까? 기독교의 구원은 중생, 칭의, 성화와 함께 반드시 영화라는 제4단계가 있어야 온전해지고,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10월 14일 목요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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