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후 일곱번째 주일
아가서 (Song of Songs) 1:5-6 / 마태복음 (Matthew) 20:1-16
김혜란 목사
본문: 아가 1:5-6, 마태복음 20:1-16
제목: 햇볕에 탄 것처럼 따가운
기도의 말씀
성령님, 우리 마음과 영혼과 생각을 열어 이 생명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나는 예루살렘의 딸들아, 흑인이고 아름답다. 게달의 장막 같고 솔로몬의
휘장 같다. 내가 검은 것은 햇볕에 그을렸기 때문이다. 내 형제들이 나에게
화를 내며 나를 포도원 지기로 삼았으니, 내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다.
(아가서 1: 5-6)
1
평범하지 않은 시기에는 평범하지 않은 성경 본문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아가서는 여러 가지로 평범하지 않습니다. 우선, 이 본문은 주로
설교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과 함께 묵상할 수 있어서
참 기쁩니다.
“나는 흑인이며 아름답다”에서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여성이고, 그녀는 흑인이며 아름답습니다.
이 여성은 강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편견과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녀는
피부가 어둡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시선을 받습니다. 사회는 그녀를 피부색
때문에 깎아내립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인종차별은
그 차별을 받는 이들에겐 애매모호하지 않고 노골적이며, 햇볕에 탄 피부처럼
따갑습니다.
6절 “내가 검은 것은 햇볕에 그을렸기 때문이다”는 말은 인종차별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녀의 피부가 햇볕에 노출되었다는
것은 야외에서 일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시원한 빌딩에서 사무직 (white
color)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까운 햇볕을 받으면서 야외에서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다음 문장은 이 흑인 여성의 삶을 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아들들의 포도원에서 일합니다. 소작농 같은
노동자로 타인의 농장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권력의 불균형이 있습니다. 불공평함이 존재합니다. 이 형제들은
그녀를 업신여기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차별과
착취는 히브리 성경의 세계에서 흔한 일이었고, 일부다처제를 행했던
가부장적 가족 안에서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아가서에는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많은 성경책과 달리, 학자들은 아가서의 60% 이상이 여성의 목소리임을
주목했습니다. 네덜란트 성서학자 아탈랴 브렌너 (Athalya Brenner) 에 따르면
아가서의 여성 목소리는 “더 대담하고, 더 장난기 넘치고, 더 솔직하며,
진지하고 예술적”이라고 합니다. 아가서는 다른 세상을 노래합니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없는, 정의와, 노동의 평등과, 인간의 신성한 존엄성과
낭만적 사랑의 관계를 꿈꾸는 시입니다. 아가서는 단순히 아름다운 시가
아니라, 인종차별, 성차별이라는 햇빛에 탄 피부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게
하는 강력한 본문입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아가서 1장은 세계 교회들이
함께 읽는 개정 공동 성경일 (Revised Common Lectionary)리스트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왜 이 본문이 성서일과에서 포함되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지나치게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을 다뤄서일까요? 아니면 흑인 여성의 대담한
목소리를 다뤄서일까요? 혹은 부유하고 특권층에 유리한 경제적 착취를
드러내서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전혀 등장하지 않아 성서적이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일까요?
2
여름은 평소 읽지 않던 책, 휴가철을 맞이하여 모처럼 시간을 내어 책을
펼치기 좋은 계절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여름 어떤 책을 읽으셨나요? 어떤
책을 읽을 계획이 있습니까?
전 Noor Naga가 쓴 책 ‘Washes, Prays’를 읽었습니다. 저자 누어 나가는
이집트계 이슬람 여성으로서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두바이에서 자랐고,
토론토에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제가 속한 빅토리아 대학교 영문학 교수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쿠쿠는 토론토에 사는 젊고 가난한
무슬림 이주여성입니다. ‘Washes, Prays’, “정갈하게 씻고 기도한다”라는
제목의 본 소설은 이슬람 여성의 종교적 신앙생활과 낭만적 사랑을
예술적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쿠쿠는 자신이 다니던 대학 교수인 기혼 남성과
사랑에 빠지고, 동시에 가난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그녀의 하나님
알라께 간구합니다. “남의 남자에게 몸을 주면서 기도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집 없는 자가 거리를 전전하며 하는 그 사랑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나가 책 주인공 쿠쿠를 생각하면서 전 아가서의 여인을 떠올랐습니다. 두
여성 모두 세상이 정한 고정관념 속에서 그 틀을 넘어서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여성 모두 이주 여성으로서 삶을 향한 갈망, 평등한 동반자적
사랑, 하나님의 위로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배고픈 몸은 배부른 몸보다 무겁다.”
3
예수님은 배고픈 몸과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20장에 기록된 포도원 일꾼의 비유을 살펴보면,
일꾼들이 일한 시간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자본주의 논리와는 다릅니다. 오래 일하고 더 많이 일하면 더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한편으로 공평합니다. 그 논리가 지배적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논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거꾸로 시각이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세상의 고정관념을 깨는 시각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가서와 누어 나가에 등장하는 두 여성이 역시 세상의 고정관념, 인종차별,
성차별, 노동차별을 깨는 업사이드 세상, 거꾸로 세상을 꿈꿉니다.
알파 한인연합교회 교우어려분,
우리 또한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지막 된 자가 먼저 되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러나 지난 5 년동안 코로나19 시대를 겪으면서 얼마나 예수님이 선포한
세상, 거꾸로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일이 어려운지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토론토에서는 처음 코로나가 터졌을 때 흑인과
유색인종이 코로나19 확진자의 83%를 차지했습니다.
온타리오주에서 윈저 지역은 코로나19 발병률이 가장 높았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조사해보니 리밍턴의 이주 노동자들 때문이었습니다. 해마다 5만
명의 이주 노동자들이 멕시코, 자메이카, 카리브해, 아시아 각지에서
캐나다로 와서 과일과 채소를 수확합니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리밍턴, 즉 캐나다의 토마토와 온실의 수도로
모입니다. 코로나 첫 해, 2020년, 약 1500명이 코로나19에 걸렸고, 세 명이
사망했습니다. 문제는 이주 노동자들이 잘못해서 법을 안 지켜서
비위생적이어서 병에 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삶을 통제하는 규제와
비인간적 삶의 조건때문에 코로나에 걸린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잘 보이지 않았던 인종차별, 빈곤, 사회적
불평등을 폭로하고 드러냈습니다. 이번 전염병은 우리 세대에서 겪어본 적이
없는 전례 없는 일이었지만, 질병과 인종차별이라는 사회적 질환의 연관성은
새롭지 않습니다. 이 인종차별적 시스템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코로나
백신이 나온다 해도, 시스템을 고치지 않는 한 사회 최하층에 밀려난 사람들,
아가서에 나오는 여성, 나가 소설에 등장하는 가난한 이주 노동자들은 계속
아프고 희생될 것입니다.
이런 사회적 문제들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았다면, 그 문제로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주 노동자들이 뙤약볕 아래서 일하고, 코로나에 걸려 아픈 것을 모르는
채로 가게에 파는 신선한 토마토와 복숭아, 옥수수를 사고 먹고 그 맛을
누리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도 지난해 여름 나이아가라 지역에서 이런 노동자들이 복숭아를
수확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이 수확한 신선한 복숭아와 자두
바구니를 여러 개 샀습니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신선했습니다. 그들의
고통의 현실에 무지한 채 저와 가족은 여름 내내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즐겼습니다. 아니 올해도 즐깁니다. 죄를 고백하는 마음으로 저의 경험을
나누고 여러분도 그 고백에 초대합니다.
그러나 회개에서 멈추지 않고 좋은 소식을 선포합니다. 이는 모든 기득권을
지닌 자들이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에 무지하지 않고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리밍턴의 한 여성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며, 하나님께서 이 여성을
통해 어떻게 일하시는지 보여줍니다. 이 여인의 이름은 조안 그레이 (Joan
Grey) 입니다. 이 분의 스토리가 CBC Radio에 실렸습니다. 인터뷰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조안 그레이는 매년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파티를 엽니다. 지역 홀을
예약하고,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이주노동자들이 즐겨 먹을 식단으로 고기,
밥, 콩을 준비합니다. 파티가 시작되면 가스펠 음악이 흐르고, 노동자들은
게임을 하며 웃고, 울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 이주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치 집에 돌아온 기분이에요. 여기서 같은 조건에 있는
동료들을 만납니다. ‘아, 이제 집에 온 것 같아. 자메이카에 온 것 같아’라고
느낍니다.”
그레이는 분명하게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캐나다산
신선한 채소와 과일, 어디서 온 것일까요? 동시에 이렇게 답합니다. 바로 이주
노동자들이 수확한 겁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었으니 우리도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어떤 이주 노동자들은 25년 넘게, 해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곳에 옵니다. 이들이 오면 집단 숙소에서 자거나, 곰팡이와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는 집에 16명이 함께 살기도 합니다.
이 잔치는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이주노동자들에게 잠시나마 인간다움을
회복하게 해 줍니다. 이렇게 작지만, 강력한 친절의 행동이 참담한 삶에
위로를 줍니다. 아름다운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이주 노동자 문제는
구조적입니다. 파티를 매일 열어준다고 이들의 삶의 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주노동자의 인종차별과 노동차별 성차별은 한여름 햇볕에 데인 것처럼
아프고 쓰라립니다. 이들의 고통은 우리의 구조적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공동체적으로 기업과 정부의 역할의 차원에서, 이민법에서 기업의 이윤
중심 정책에 이르기까지 구조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1 https://www.cbc.ca/radio/sunday/the-sunday-edition-for-september-8-2019-1.5270500/a-thank-you-dinner-for-
the-forgotten-migrant-workers-who-pick-canada-s-food-1.5270515
이를 위해 여러분께 다음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길 제안합니다:
https://www.tvo.org/video/documentaries/migrant-dreams-feature-version 이
다큐멘터리는 OCAD 대학 부교수인 한국인 민숙 리가 2016년에 만들었으며,
이주 노동자, 특히 인도네시아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을 생생히 드러냅니다.
햇볕에 그을려 따끔한 이 고통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신성한 본문인
성경말씀과 씨름하고 평범하지 않은 이 시기에, 생태위기, 관세 위기, 경제
위기의 이 힘든 때를 살아가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개정 성서교독일과의 고정한 틀에서
벗어나 다른 성경말씀도 읽고 보시고 꾸준히 배우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으로 연합교회 교인으로 살면서 보다 담대하고 구체적으로
인종차별, 성차별, 이주노동 차별을 없애는 일에 동참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변화의 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출발점이며, 이는 우리 알파 신앙공동체의
아름다운 삶에까지 파급력을 줄 것입니다.
이런 신앙적 행동과 연대의 일을 하면서 여러분 한 사람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연습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노동이 신성합니다. 여러분의
봉사가 신성합니다. 또한 여기에 있는 모든 이들이 서로를 아끼는 그 관계도
신성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하는 노동 역시 신성합니다. 성차별, 인종차별을
없애는 노동도 신성합니다.
우리가 이런 신성한 노동, 인종차별, 성차별을 없애는 고된 노동을 함께 해
나갈 때, 아가서의 유색인종 여인을 기억하기를 기도합니다. 아가서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 곧 ‘호크마’가 우리에게 거룩한 존엄과 정의로운 신앙 여정에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민숙 리교수님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인도네시아 이주 여성노동자들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포도원
소작농의 비유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신앙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책임 있게 바라보게 하고, 거꾸로 시선으로 상처 입은 세상을 치유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격려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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