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가도, 봄을 타다

창조절 다섯번째 주일 / 9월 다섯번째 주일
봄이 가도, 봄을 타다
누가복음(Luke) 22:54-62
유상진 목사

 

여러분, 그런 적 없으세요?
아주 오래두어서 다 잊었던 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생각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말의 영혼과 힘겹게 씨름하는 거지요. 여러분, 그런 적 없으세요?
저는 있습니다.
아주 오래도록 잊고 있어서 누가 한 말씀인지도, 어디서 들은 말씀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말씀, 그러나 그 어느 때 보다 잘 들리고, 너무나 또렷해서 피할 수 없는 말씀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계산을 해보면, 스물 일곱이나 스물 여덟 때 즈음에 들었던 말씀입니다. 제가 늦갂이 신학생이 되고, 2년 정도 지난 뒤의 일이니깐요. 보통 대부분의 장로교회에서는 신학생들을 노회라고 하는 교단의 지방단위에서 관리합니다. 신학교 3학년이 되면, 자신이 속한 지방의 노회에서 목후생 시취를 받습니다.
그래서 2학년 가을노회가 열리면, 고만고만한 신학생들이 노회의 고시부에서 주관하는 간단한 시험을 치루고, 선배 목사님들에게 면접을 봅니다.
신학생들이 낸 이력서를 보면서 몇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하는 아주 통상적인 순서입니다. 시간적인 문제로 서너명씩 들어가서 면접을 봅니다. 저도 그 시절에 그 무리중에 끼었지요. 그리고 면접이 시작되면,
어떤 신학생에게는 먼저 “아버님 평안하시고…”로 시작합니다. 그 신학생의 아버지의 직업은 뭘까요? 그 신학생의 아버지는 당연히 목사님이십니다. 아마도 면접관 목사님의 선배목사님 정도 되겠지요.
또 어떤 신학생에게는 이렇게 시작하기도 합니다. “아버님 사업은 잘 되시고…”
그러면 저는 짐작을 합니다. 아마도 그 신학생의 아버지는 노회에서 이름만 대도 알만한 저명한 장로님이시겠다. 그것도 사업을 아주 크게 하시는 분이시겠다하고 짐작을 합니다. 뭐 면접관 목사님의 손에 들린 이력서에 출신교회라든지, 보호자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으니깐요.
사실 그 자리가 그 정도로 가벼운 자리입니다. 무슨 입사 채용 면접이 아닙니다.
너는 이미 우리의 사람이고, 우리의 바램대로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격려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제일 마지막에 좀 나이가 드신 고시부장 목사님이 훈화를 하십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 요즘 신학생들이 성경을 안 읽는다. 뭐 이런 말씀들을 하시는 자리입니다. 그 때 저를 면접한 선배 목사님께서 저에게 던진 첫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목회 할거야?”
저는 그 목사님께서 왜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제 이력서는 좀 달랐거든요. 뭐 부모님은 안계시고, 출신교회라는 것도 없고, 일반적인 신학생의 이력서라고 하기에는 울퉁불퉁 했거든요. 고등학교는 제대로 못 나왔고, 이력서를 채운 것은 16살 때 부터의 공장이며, 노가다판 경력이 전부였거든요. 목사님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목회 하다가 안 되면 딴 거 하는 거 아니야?”
저는 머뭇거릴 틈이 없었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했지요.
“아닙니다. 저는 목회할 겁니다.”
그 때는 그랬습니다. 일단 목후생 시취는 받아야 하니깐요.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제가 일해 왔던 두부공장의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그 말씀이 자꾸 떠오르는 거지요.
어떤 교회에서 모였는지, 어떤 목사님에게 그런 질문을 받았는지 기억도 없지만, 그 말씀이 더 선명하게 들리는 겁니다. 일단 캐나다에 와서 개척을 했는데, 만 2년 만에 문을 닫았습니다. 여러 가지 캐나다 한인교회의 현실에 대한 제 나름의 생각이 있었지만, 한마디로 정리하면, 실패한 거지요.
최근까지는 조그만 연합교단 교회에서 교회학교를 맡아서 목회했고, 지금은 알파교회의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한 주간 쏟고 있는 에너지의 비율을 따져보면 목회를 한다고 보기에는 어렵지요.
사실 먹고 사는 데 목회적인 일보다 공장 노동에 더 힘을 쏟고 있는 실정입니다. 저는 한인교회 목사라는 직함보다, 외국인노동자라는 직함에 더 가까워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래 두었던 잊고 있었던 그 말씀이 자꾸 생각이 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렇다고 지금의 삶을 후회하거나 어떤 조바심을 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고수할 수밖에 없는 목사라는 직업에 대한 저의 생각 때문입니다.
저는 목사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매우 단적인 것 한 가지를 말한다면, 이겁니다. 사람들이 다 노동을 하잖아요? 육체노동을 하든지, 감정노동을 하든지, 정신노동을 하든지 다 노동을 합니다. 그런 노동을 제공하고, 셀러리를 받습니다. 뭐 몸값을 받는 거지요. 그리고 어떤 형태의 노동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몸값을 벌기 위해 일주일에 5일 이상을 뼈 빠지게 일합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의 노동은 그 해석이 좀 다르기도 합니다. 목사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심방이고, 목사가 여행을 하면 선교이고, 목사가 휴식을 취하면 묵상입니다.
보통의 다른 노동자들의 노동 외의 시간도 목회활동으로 보는 거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적어도 기나긴 6일 동안 주일날 하루의 말씀을 위해 사색하고, 고뇌하고, 청중들의 심금을 울리는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동했는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인터넷에 나오는 몇 마디의 예화나 찾아서, 청중의 상태와 괴리되는 허공을 치는 설교를 하고는 할 일을 다 했다 말하는 것은 아닌지, 정말로 나의 봉급 정도를 받는 평상의 노동자가 하는 정도의 노동을 최소한 주일하루의 설교를 위해 사용하는지 스스로 하감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제가 거기에서 어떤 형태로든 조금 멀어져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그러니 오래 두어서 잊고 있었던 말씀이 천둥처럼 들리는 겁니다.
“목회 하다가 안 되면 딴 거 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요즘 저희 집사람과 종종 이런 대화들을 나눕니다.
처음 캐나다 와서 개척을 했는데, 예배에 오셔서 졸더라고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해 주신 어떤 집사님이 참 감사하다. 한참 막노동하면서 개척을 하느라 빠듯한데 한 달에 한 번, 우리 아파트 문 밑으로 편지 한 장을 놓고 가셨던 어떤 분이 참 감사하다.
사실 그 때는 그렇게 감사한지 몰랐습니다. 오히려 예배시간 제일 앞에서 졸고 계신 그 집사님이 좀 불편했습니다. 항상 예수님이 목사님의 가정을 사랑하고 계십니다라고 끝나는 편지가 그렇게 대수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목회 하다가 안 되면 딴 거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는 오래 묵은 말이 마치 유리병에 가라앉은 앙금을 흔들어 놓은 것처럼 둥둥 떠다니는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 때가 봄날이었구나 뒤늦게 깨닫는 겁니다.
여러분, 봄날은 가고 난 뒤에 더 진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각자의 형편과 경우가 다르지만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만큼의 봄날을 보내고 사셨습니까? 저 같은 사람도 그런데 여러분은 몇 개의 봄을 보내셨습니까?
이 질문은 단순히 4계절의 봄을 얼마큼 보내었고, 그 연수 때문에 연세가 얼마나 드셨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내 생애 아련한 봄날은 있기 마련이고, 그 봄의 자취가 그리워진 적이 없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 숱한 봄날을 덧없이 보내고, 이제 생의 잔뼈가 얼마나 굵어져 있는지, 혹 후회 같지도 않은 후회를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 마다 봄날이 없었던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저마다의 봄이 있었겠지요.

요즘 제 심상이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흥얼거리고 있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봄날은 간다”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언젠가 한 밤에 이 노래를 밤새 듣고, 또 듣고 한 적이 있습니다. 들으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밤새 한 백번은 들었을 법한데 아직도 이 노래를 못 부르겠어요. 다음 날 아침에 내가 이 노래를 들으면서 밤을 지새웠다고 하니, 우리 안수희선수는 흥얼 흥얼 한 번에 잘도 따라 부르는 겁니다. 여기서 안수희선수는 저의 집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얼마나 능수능란한지 저는 저의 집사람을 종종 선수라고 부릅니다. 아주 훌륭한 여잡니다.
제가 이 노래를 두고 이 노래는 한 사람의 생 전체, 그 이상을 노래한 것이다라고 하니, 아까 그 훌륭한 여자가 웃으면서, “아니다! 이 노래는 19살 소녀의 순정노래”라는 거지요.
1954년도에 발표 되었으니깐, 60년이 넘은 노래이지요. 필명입니다만 손로원이라는 분이 작시한 겁니다. 여러분은 이 노래가 어떤 노래 같습니까? 단순히 열아홉살 소녀의 순정노래 같습니까? 아니면, 인간의 한 생 그 이상의 것을 노래하는 것 같습니까?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노랫말이 이렇습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여러분, 이 노래는 언제 부르고 있는 노랩니까? 또 어디서 부르는 노래입니까? 오늘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 오늘이 어떤 오늘이냐?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던 오늘,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던 오늘,
열아홉 시절이 황혼 속에 슬퍼지던 오늘,
그 오늘, 옷고름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 위에서
그 오늘, 꽃편지까지 내던지며 청노새가 짤랑대는 역마차길 위에서
그 오늘, 앙가슴이라도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낯선 신작로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

사실, 사람은 누구든지 항상 길 위에 있습니다. 길 위에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각자의 인생길 위에 서 있는 거지요. 어떤 갈래 길을 따라 왔는지, 어떤 힘겨운 고개를 넘었는지, 또 팍팍한 자갈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는 속절없이 길 위에 있습니다. 험난한 길이든, 평탄한 길이든 자신이 선택해서 걸어온 길 위에서 다 제각각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저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지금 역마차길 위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꽃이 피고, 지는 것만 보아도 울고 웃던,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시가 되던 감성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앙가슴이라도 두드려야 겨우 흘러가는 뜬구름이라도 감지하고, 억샌 새처럼 커 있을 아이들의 비상과 좌절에 함께 울고, 웃을 낯선 시대의 신작로 길 위라고 하기에는 아직 초로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 같고, 청춘의 꽃편지까지 내 던지고, 청노새가 쉼 없이 짤랑대며 일하는 역마차길 위에서 실없는 기약을 믿고 내 생의 봄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 그게 저더라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봄날은 간다”가 저의 노래가 되더라고요. 어디 저 뿐이겠습니까? 산제비가 넘나드는 성황당길 위에 서 있는 아직 창창한 우리의 아이들과 청년들도, 청노새가 짤랑대는 역마차길 위에 서 그 창창함이 꺽여 가는 우리의 30대 40대 50대도, 뜬구름 흘러가는 낯선 신작로길 위에서 내게 주어진 연수만큼 변화한 시대의 폭을 체감하는 우리의 60대, 70대, 80대도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모두가 봄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봄날은 이렇게 갑니다. 솔직히 “봄날은 간다”이러면 별로 살 맛이 안납니다. 그렇게 신나지는 않지요. 요사이 제가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봄은 여지없이 가고, 가고 난 뒤에야 더 진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의 말씀에 나오는 주인공은 베드로입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살아 있어서 베드로에게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끔찍했던 사건이 뭐냐고 묻는다면 제 생각에 베드로는 오늘의 이 이야기를 술회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공장의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았던 저처럼 어떤 말이 주머니에 넣은 송곳처럼 불쑥 나와서 가슴을 찔렀을 거 아닙니까? 저에게 들려오는 억양 그대로 하자면, “베드로, 너 나 배신하는 거 아냐?”하는 말에 쩔쩔 매었을 겁니다. 아니 베드로는 저 같은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찬란했던 봄을 보낸 사람 아닙니까?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는 최초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놀라운 기적들의 목격자였고, 그 자신이 물 위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가장 발군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도 버리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체포 직전에 남긴 베드로의 다짐은 마치 칼을 입에 문 사람같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3절에,“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자신에 찬 고백입니까? 베드로는 이처럼 고백만으로 그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나타난 군대가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순간, 칼을 뽑아 휘두르며 그들 앞을 가로막고 선 사람은 베드로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봄은 말 그대로 찬란했습니다. 그런 그가 그의 생 전체를 관통한 가장 찬란한 봄의 끝자락을 놓치는 순간이 오늘 본문입니다. 여러분, 봄은 가고 난 뒤에야 더 진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 54절 이하에, “그들은 예수를 붙잡아서,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뒤따라갔다. 사람들이 뜰 한가운데 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있는데, 베드로도 그들 가운데 끼여 앉아 있었다.”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함께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예수가 잡혀 있는 안뜰도 아니고, 바깥뜰에서 예수를 연행한 사람들 곁에 끼어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저 안뜰까지는 종종 두려울 때가 있잖아요? 이것이 그의 찬란한 봄날이었던 예수와의 거리입니다.

같은 옷을 입어도 봄은 가는 것이고, 가을은 오는 것이므로 손에 잡힐 만큼 가까운 거리이나 결코 만나지지 않는 거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기묘한 거리, 마치 봄과 가을의 거리처럼 멀어져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일단 이 예수와의 거리는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뭐 예수님이 체포되던 당시 서슬 퍼런 권력이 예수 일당이면 무조건 잡아들이려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의 억양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북부 갈릴리 사람들의 사투리를 금방 눈치 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오늘 베드로는 이 예수와의 어찌할 수 없는 거리조차 유지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56절에 보니깐, 한 하녀가 베드로를 빤히 쳐다 보다가 고발을 하는 겁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어요.”
무슨 정보과 형사에게 들킨 것도 아니고, 하녀에게 발각이 된 것입니다. 그 순간, 아마 베드로의 머릿 속에서는 숱한 생각의 파편들이 튀었을 겁니다. 베드로는 반사적으로 말합니다.
“여보시오, 나는 그를 모르오.” 아마 헛기침이라도 몇 번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후 곁에 섰던 다른 사람이 또 베드로를 향해 다가와 말했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요. 당신의 말씨를 보니 확실하오.” 말하자면, 심증을 내놓는 거지요. 두 번째 대답은 생각할 겨를 없이 더 재빠르게 나왔습니다. “아아, 난 아니라니깐!” 베드로의 언성이 더 높아졌습니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요? 그렇게 위험을 잘 넘기는가 싶더니, 또 한 사람이 재차 물어 옵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는 물증도 제시하는 겁니다.
“내가 당신이 그 예수라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보았소!” 마치 적에게 포위되어 포박당하기 일보직전입니다. 베드로는 주저 없이 맹세하듯 외칩니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비명이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베드로는 그렇게 완전히 쓰러졌습니다. 여러분, 모진 게 목숨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신상카드에 가장 선명하게 기록된 “예수”라는 이름을 지워 버린 겁니다.

사람이 부딪히는 좌절과 절망 중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좌절하고 실망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이런 유의 좌절과 실망은 금세 자기 자신을 힘없고 초라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좋게 봐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조차도 자기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딱 그런 케이스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힙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예수님의 수제자 중에 수제자였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총애와 사랑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좌절하고, 실망하는 초라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의 찬란한 봄날은 이렇게 떠나갔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오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감을 느끼고 좌절하고, 울고불고 하는 이 뱃사람의 절규를 우리는 본문 마지막에 가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62절에, “그는 밖으로 나가서 심히 비통하게 울었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찬란했던 봄날은 이렇게 스스럼없이 가버렸습니다. 여러분, 봄은 가고 난 다음에 더 진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저는 그렇더라고요. 사실 저도 저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좌절감 때문에 무너질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은밀한 죄, 도무지 조절이 안 되는 감정, 제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노, 천성적인 게으름, 제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실패할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봄날은 간다”는 노래를 들으면서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지금 베드로는 저보다 더 하겠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봄날은 간다”는 노래에는 이상한 위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봄은 지나갔습니다. 봄은 이미 지나갔고, 우리 모두가 시린 세월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가장 차갑고 어두운 벌판에서 그 모든 경직된 것을 뚫고 지나간 봄을 추억하게 하는, 모든 세대를 통합하는 공동의 정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봄날은 갔지만, 여전히 우리는 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느껴지더라고요.

“봄”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사용해 오던 순 우리말입니다. 그런데 말의 어원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봄의 어원을 두 가지로 추측하고 있더라고요. 그 하나가 불의 옛말, “블”과 오다라는 의미의 우리말 “옴”의 합성어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봄이 불의 기운이 오는 계절이라는 의미겠지요. 그렇게 사용되었던 블옴의 “ㄹ”이 탈락하여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말의 “보다”라는 동사의 명사형, “봄”에서 지금의 “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나 결국 얼음을 녹여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냇물, 죽은 것 같은 뽕나무의 두꺼운 껍질을 까고 나오는 새순, 긴 겨울잠에서 깨어 땅 속에서 나오는 개구리… 뭐 이런 것들을 다시 “새로 본다”해서 새봄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겁니다. 저는 어느 것이 맞는지 틀린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것 하나는 압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입니다.
“봄이 가도, 봄을 탄다.”는 말요. 오늘 첫 번째 나오는 봄이 가도의 봄의 의미는 블옴에서 온 봄이고, 두 번째 봄을 탄다에 나오는 봄은 본다의 명사형에서 온 봄입니다. 시선을 말하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일종의 말장난을 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서의 말씀을 다시 자세히 읽으면 찬란한 봄은 이미 갔지만, 봄을 타는, 어떤 한 시선, 바라봄을 타는 베드로가 보입니다.

베드로의 배신 사건은 사복음서에서 동시에 전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베드로의 배신을 가장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 누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복음서에 없는 누가만의 섬세한 기록이 이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했습니다. 닭울음 소리가 베드로의 귀에 들려 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비통의 눈물을 흘립니다.
이제 완전히 끝장났습니다.
그런데 이 비통의 눈물을 흘리기 직전의 찰나 같은 풍경을 오늘 본문 61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똑바로 보셨다.”

저 안뜰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시던 예수님께서 닭이 움과 동시에 돌아서서 베드로를 보셨다는 기록입니다. 예수님도 그 닭울음 소리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 자기 자신 조차도 자신을 외면할 수 밖에 없는 가장 처절한 실패의 자리에 놓인 베드로와 예수님의 시선이 불꽃처럼 마주칩니다.

아니, 차라리 예수님의 바라봄이 그의 온영혼을 관통합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은혜가 되던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그로 인해 베드로는 완전한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베드로가 이런 참혹한 실패에서 언제 회복됩니까? 우리는 흔히 베드로의 회복의 때를 해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으로 상정합니다.
그런데 아니예요!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미 베드로의 회복의 전조, 재기의 발판은 지금 이 순간, 이 철저한 실패의 자리에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오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순간 베드로를 돌아보신 예수님은 눈으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원망과 책망과 분노의 눈이었을까요? 아니요! 베드로의 그 실패의 자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은 그런 빛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어저께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마친 예수님께서 뒤늦게 자신의 속생각을 베드로에게 조심스럽게 건넵니다.
누가복음 22장 31절 이하에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니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니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너의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예수님께서 이미 베드로가 예수님 자신을 세 번 부인할 것을 다 아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게 되기를 하나님께 손수 기도하셨다는 거예요.
“내가 너 때문에 기도 많이 했으니깐, 넌 절대 쓰러지면 안돼!”
“오히려 너의 형제들을 굳세게 해야돼!”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런 분의 시선이, 이런 분의 봄이 어떠할까요? 베드로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은 여전히 호수처럼 잔잔한 사랑과 용서와 포용의 봄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심문 당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곁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욕하고 저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소리를 다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말들 속에서 3년 동안 가장 총애하고, 사랑했던 제자의 목소리를 선별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더군다나 큰 소리로 역정을 내었으니 못 들으셨을 리는 없고, 당연히 베드로도 먼발치에서 온갖 모욕과 고통을 받고 있는 예수님이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베드로의 시선이 딱 마주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봄을 확인한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통곡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은 따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난 주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막 닭살이 돋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초라한 실패자를 외면합니다. 당연하지요,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성공자에게 향합니다. 실패자를 찾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세상의 모든 영광은 성공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지막까지 실패자의 곁을 지키는 이가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하염없이 선선한 눈매로 베드로 같은 실패자, 저 같은 초라한 사람을 바라보는 이가 있습니다. 각자의 인생길 위에서 크든 작든 이미 봄날을 보낸 사람들의 닭똥처럼 못난 눈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윽한 봄이 있습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 대신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요? 아직도 나는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생각해보면, 나는 아직 단 한 번도 예수님 때문에 무엇을 포기한 적이 없는데 아직도 내가 펄펄 살아서, 집착과 자기 연민에 휩싸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닌데 그런 나인데 그 분의 바라봄 때문에 나는 다시 일어 설 수 있습니다.
매일 같이 봄을 보내고 주저앉아 있지만, 그 분의 시선, 그 분의 봄을 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봄이 가도 봄을 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여러분 생의 봄날이 갔습니까? 아니요, 진정한 그분의 시선, 봄을 탈 때가 지금입니다.

여러분, 지금 제가 조용기목사 같은 사람이 말하는 “바라봄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조엘 오스틴목사의 “긍정의 힘”같은 잡서에서 말하는 바라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하나님의 봄 앞에서 온몸으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참 감사하게도 그 분이 봄날을 다 보낸 우리 같은 초라하고 못난 사람들을 먼저 바라 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실패한 아담을 다시 돌아 보셨습니다.
“아담아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느냐?” 그렇게 부르시잖아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외면했던 초라한 삼손을 하나님은 돌아 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팔과 어깨와 다리의 모든 근육들을 다시 힘이 돌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아들로 화려하게 이집트에서 살았지만 살인자가 되어 도망자 신세로 광야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실패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광야의 모세를 하나님이 직접 떨기나무 불꽃으로 찾아 가셨습니다.
“모세야, 그 더러운 신발 좀 벗어라!”그러시잖아요?
비정상적인 생활로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던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에게도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나에게 물 한잔 다오”그러시잖아요?
그리고 오늘 실패한 베드로에게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사랑과 용서의 시선으로 돌아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할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면 베드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봄은 이미 다 용서하시고 영광된 삶으로 초대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세요? 생의 봄날이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하신 적 없으세요? 혹여 여러분, 지금도 이 이민의 땅에서 실패일로를 걷고 계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오늘 주님의 시선이 베드로를 바라보던 그 봄으로 여러분을 돌아서서 똑바로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 조차도 실망해서 나를 외면한다 할지라고 나를 향한 단 하나의 시선이 있습니다.
봄이 있습니다. 그 시선이 순간 번득이는 한줄기 햇살이 되어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아라. 너는 내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난 한 주간 매일 매일 낙심해도 우리가 또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은 나를 향한 이 주님의 바라봄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 은혜 앞에서 눈물겹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아, 그래서 차라리 이 이국땅에서 나를 반기는 것은 은혜의 눈물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봄 앞에서 다시 두 주먹을 불끈 쥡니다. 내가 실패의 자리에서 전전해도, 한없이 초라해도 변함없이 나를 향하는 그 단 하나의 봄 때문에, 나는 일어섭니다. 지금 그 은밀하고, 거역할 수 없는 봄을 타는 사람은
여러분,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우리들의 이민 이야기에 성공담보다는 실패담이 더 많잖아요? 저는 이민 선배들의 실패담을 더 많이 들었습니다. 요전에 이민 오신지 십 몇 년이 된 선배 목사님과 대화를 하던 중에 근황을 물으시길래 제가 그랬습니다.
“형님, 저는 타국에서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 인줄 몰랐습니다.” 뭐 이런 심상이 저만의 심상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저런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자존심을 종이장처럼 구길 때도 있었습니다. 나그네의 삶을 사는 동안 기존 백인들의 닫힌 문 앞에서 초라해 질 때도 있었습니다. 타국에서의 빠듯한 삶 때문에, 우리의 가정에 깊은 생채기를 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내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나마저 나를 외면하고 싶어질 때, 변함없이 나를 향한 시선이 하나 있습니다.
자식이 이 좌절을 모르지만, 때로는 야속하게 아내나 남편도 몰라주지만, 내 마음속 깊이 나를 꽤뚫어 보는 시선, 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봄,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봄이 하나 있습니다.
(시편 142편에,) “아아, 주여 오른쪽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그러나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여러분, 이 사실이 위로가 되지 않으세요?
여러분 오늘의 말씀은 노스욕과 이토비코, 스카보로, 리치몬드 힐… 크리스티와 핀치, 베리와 저 북쪽의 옥빌까지 이 팍팍한 이민의 땅에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민 1세대 1.5세대 여러분, 지금 우리는 성공 못한 선배의 자책감으로 성공의 의미를 물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나를 향한 단 하나의 시선, 주님의 피할 수 없는 봄을 의식해야 합니다. 알파한인연합교회에 한평생을 바치신 어른들께 감히 여쭙겠습니다. 여러분, 알파한인연합교회의 봄날은 언제 였습니까? 이상철목사님께서 목회하실 때인가요? 저 다운타운에서 적어도 수백명이 움집해서 예배드릴 땐가요? 아니요 지금 우리는 지나간 봄의 찬란함을 그리워 할 때가 아니라, 다시 하나님의 봄 앞에 설 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저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시기 전에 오늘 여기, 이 자리에서 우리의 순정을 포개어 놓읍시다. 나를 향한 주님의 단 하나의 봄, 이것으로 나는 족합니다. 이 하나님의 시선으로 제 인생의 남은 연수를 채우겠습니다. 이 하나님의 바라봄으로 남은 제 한해의 날들을 기워 내겠습니다.
봄날은 이미 갔지만 오늘 하루의 시간도 주님의 봄을 타며 살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하며 저 문을 열 때, 여러분, 우리는 이미 아전과 투구가 판치는 거친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하나님의 품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시지요? 우리가 아무리 외면하려해도 외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선 앞에 있다는 사실, 그것을 이제야 겨우 깨달아 부끄러운 우리의 마음 아시지요?
그래서 오늘도 사랑을 처음으로 느끼는 처녀처럼 다시 하나님의 사랑 앞에 고개 숙였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아이들부터 우리의 청년들 마음속 깊이 만나주십시오.
예수님 십자가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의 등을 따뜻이 쓸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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