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유대인과 헬라인이 친교를 나누며

부활절 댜섯번째 주일 / 5월 세번째 주일
부활절, 유대인과 헬라인이 친교를 나누며
사도행전 11:1-9, 16-18
정해빈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1장은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 초대교회가 어떻게 발전했고,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또 어떻게 그 어려움을 극복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그대가 나를 세번 부인하였지만 아직도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먹이고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부탁을 성실하게 이행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들과 더 나아가서 이방인/헬라인들을 만나고 그들을 돌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마리아 지역을 순회하던 베드로는 여성 지도자 다비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욥바로 달려가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다비다를 다시 살렸습니다. 다비다가 죽은 욥바 지역은 사마리아 지역에 속했습니다. 베드로가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사마리아 지역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더 나아가서 이방인/헬라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서 그와 그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 2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전통적인 율법의 가르침에 의하면 유대인이 이방인과 사귀거나 이방인을 가까이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람을 함부로 속되거나 부정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이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성령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고 돌보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히 유대인만 돌보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대로 유대인 뿐 아니라, 사마리아인, 이방인/헬라인들을 가리지 않고 그들 모두를 만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헬라인들을 만난 후에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오자 보수적인 유대인 신자들이 베드로에게 항의를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당신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이오’ 하고 그를 나무랐다.” (행11:2-3).

구약의 율법의 가르침에 따르면 유대인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만나서도 안 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데 어째서 당신은 그들을 만났냐고 보수적인 예루살렘 유대인 신자들이 베드로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들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습니다. 욥바성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큰 보자기와 같은 큰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그 그릇에는 땅 위에 네 발 짐승들과 들짐승들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베드로야, 잡어 먹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베드로가 보기에 큰 그릇 안에는 깨끗한 동물들과 부정한 동물들이 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속된 것이나 정결하지 않은 것을 먹은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자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레위기 11장의 가르침에 의하면 토끼나 돼지처럼 굽이 갈라지지 않았거나 새김질을 하지 않는 동물은 먹어서는 안 되고 또 조개, 굴, 새우, 가재, 장어, 문어, 낙지, 오징어처럼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먹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생기거나 경계가 확실하지 않은 것은 먹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런 동물들을 먹을 수 없다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환상을 통해서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헬라인들이 더러운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환상을 체험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줄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자신이 환상을 체험한 것과 고넬료 같은 이방 사람들이 말씀을 받고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하자 베드로에게 항의하였던 사람들이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생명에 이르는 길을 열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이야기만 읽으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 중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른 인종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것은 오늘날에도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식생활도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나라 음식을 잘 먹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상한 맛과 냄새 때문에 다른 나라 음식을 잘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부분 같은 민족끼리 모여서 삽니다. 다른 인종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을 가까이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나와 다른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2000년 전 선민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보기에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이방인들을 만나는 것을 당연히 싫어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져야 한다는 것과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할례와 식사와 문화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오직 예수를 따르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넓어지고 장벽과 차별이 무너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성질이 급하고 욕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예수님이 글자 그대로 세상 권력을 잡는 구세주가 되면 자신도 권력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고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권력욕과 명예욕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환상체험을 통해서 인종의 차별을 깨트리고 앞장서서 헬라인과 이방인을 만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베드로가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아름다운 복음의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오래할수록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성품은 깊어지고 믿음은 넓어져야 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활동들을 헬라어로 표현하면 교육은 “디다케,” 봉사는 “디아코니아,” 사귐과 친교는 “코이노니아”가 됩니다. 그런데 “코이노니아”는 “코이노스(koinos)”에서 왔는데 “코이노스”는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을 때 말한 것처럼 거룩하지 못하고 더럽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코이노스”가 사귐과 친교를 뜻하는 “코이노니아”가 되었습니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유대인과 헬라인,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이 교회에서 모여서 성찬식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는 것을 거룩하지 못하고 더럽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보수적인 양반들은 양반들과 평민들이 한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고 식사하는 것을 보며 마찬가지로 불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자리였습니다. 거룩하지 못하고 더럽다는 뜻을 가진 코이노스가 교회의 사귐과 친교를 가리키는 코이노니아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차별의 장벽을 허물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사귐을 나눌 때,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장 거룩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한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는 따뜻하고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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