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일곱번째 주일 / 10월 두번째 주일
그리스도인의 선택
마가복음(Mark) 10:17-25
최성혜 목사
10월에 들어서며 큰 두가지 뉴스가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노벨상 수상 발표이고, 두번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선고 소식입니다.
노벨 평화상에는 나디아 무라드(Nadia Murad)과 데니스 무퀘게(Denis Mukwege)가 수상을 하였습니다. 나디아 무라드(Nadia Murad)는 IS무장 과격 단체의 학살과 만행으로 어머니와 가족을 잃었고, 자신도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심하게 당한 20대의 젊은 여성입니다. 그는 가까스로 캠프에서 탈출해, 인신매매와 성폭력에 의해 피해당하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앞장서는 인권 운동가입니다.
데니스 무퀘게(Denis Mukwege)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산부인과 의사로 수십년 동안 계속되는 내전 속에서 성폭력으로 피해입은 여성들을 치료하는데 앞장서왔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덕택에 내전이 계속되는 콩고가 아닌 안전한 서방 국가로 이주할 수 있었지만, 전쟁과 오랫동안 이어진 성폭력의 희생자들의 아픔에 눈을 감지 않고 그들을 돕는 삶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기독교 신앙이 자신에게 전인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며, “노벨상 수상으로 성폭력 피해 여성의 괴로움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는 뜻깊은 소감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다스 비자금 횡령, 뇌물 수수 등의 혐의로 5일 징역 15년 및 벌금 130억 원이 선고되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날 선고 공판이 생중계되는 것에 반발해 법정에 출석하지도 않았지요. 뇌물 및 국고손실, 횡령 및 조세포탈,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 전 대통령에 대해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판사는 이같이 선고했다. 비자금을 조성하고, 자금을 횡령을 하고, 뇌물을 받고 했다는 액수가 몇백억대를 오르내리는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의 돈을 조직적으로 움직여왔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의 이런 민낯이 온 천하에 드러나니 참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한 청년이 예수님이 자기 마을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 앞에 무릎 꿇고 영생의 길을 묻고 있습니다. 청년은 부유한 사람이었고, 관원이었고,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고 영생의 길을 물을 만큼 겸손하고 예의 바르고 진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계명에 보면,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 계명들을 잘 지키라” 하시자 그는 당당하게 다시 얘기합니다. “선생님, 저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막 10:21)이 말을 들은 청년은 조금 전의 당당함을 잃고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재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율법을 어릴때부터 잘 배워 지켜온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고, 관원으로서 학문적 지식이 깊은 사람, 구원받고 싶은 간절하고 신실한 마음을 갖은 사람으로 보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 주님 곁을 떠나야만 했던 것은, 그 청년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보다는 돈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청년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고, 그래서 용기를 내어서 주님께 가까이 접근해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아마 처음에 예수를 찾아왔을때는 그 마음에 자신감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일러준 모든 계명들을 성실하게 다 지켰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믿었을테니까요.
이 청년은 부모부터 유산을 많이 물려받아 부자가 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자수성가를 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주 큰 부자였던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부유함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계명들은 다 지키며 살았지만, 실제로는 나누며 베푸는 삶, 가난한 이를 섬기는 삶, 자신을 정성으로 드리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많은 재물을 모으기는 했지만 그 재물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청년이 ‘계명은 어릴때부터 지켜왔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겁니다. 당시 율법을 소중히 여겼던 유대인들이 이 청년처럼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계명과 율법을 지켰을 것이고, 그들은 그렇게 행하면서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킨다고 스스로를 만족해 하였을 것이고, 또 자신이 구원에 가까이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된 구원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경계 안에서의 종교적 참여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의 선물로 얻는 것이라는 깊은 의미를 담아, 청년이 귀히 여기는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재물의 전부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난한 자들의 처지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는 자신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는 이러한 현실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슬픈 기색이 되어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영생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이 세상에서 누리는 만족감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의를 쌓기 위한 종교와 구원의 하나님을 선택해야하는 경계의 선상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선택의 기회를 열어주셨습니다. 병들고 아픈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굶주리고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이들을 품어주고, 불평등과 억압에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싸워나가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 것인지,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자기 만족의 종교적 행위 안에 머물 것인지를 선택하는 순간입니다. 소극적인 진리를 뛰어 넘어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선택하고 결정할 기회를 던져주셨습니다. 본문의 청년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와 종교적 열심을 가진 모범적인 인물이지만, 그는 선행으로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잘못된 구원관과 적극적인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의 핵심을 간과한 형식적인 율법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번 주간 성서일과의 말씀 중 욥기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의지하던 욥이 갑자기 너무 많은 환난과 고통을 당하며 하나님께 의문을 던지는 장면입니다. 자신에게 주는 고통이 너무 심하다고 하나님께 따지는 욥의 모습을 보며 욥의 어려움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적 없고 그저 열심히 따랐는데도 불구하고 깊은 시련과 고통을 받는다면, 우리 역시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하나님께 따지고 싶지 않겠습니까? 욥은 자기가 당하는 고통이 너무 커서 하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나님께 한마디라도 대답을 들어야 속이 시원해질텐데, 그러나 하나님은 동서남북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아 설득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하나님의 모습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아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계셔서 못만나는게 아니라 우리의 눈이 가리워져 있어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고, 삶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감히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그의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신 것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만 천국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선행이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드러내거나 하나님이 가리워지지 않도록,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하는 존재임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주님의 말씀이 자신의 재산을 다 나누어주라는 단순한 자선을 베풀라는 문자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감으로 규범적 역할만 감당할 뿐 적극적인 구원의 길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선택의 고민에 놓인 사람은 아마 이 청년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크리스챤들도 이 청년처럼 경계선상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지만, 우리 역시 버리지 못하는 또다른 욕망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선택의 순간에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삶의 가장 큰 가치를 구원에 두고, 이 구원의 길에 걸림이 되는 것은 모두 끊어버리고 희생하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겠다는 결단을 할 수 있을까!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구원의 진리를 찾을 것이냐, 그것을 포기할 것이냐 하는 선택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선택하며 살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으며,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961년에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독일 나치 장교의 재판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2차 대전 중 유대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전쟁 범죄자로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그러나 악의 화신이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키도 작고 머리숱도 얼마 남지 않은 그저 평범한 50대 남성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행정능력이 뛰어나 고급 관료직을 맡고 있었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고 부지런히 그리고 책임감있게 잘 수행했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재판에 회부된 자기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재판은 생중계되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유대인 대량 학살을 포함한 15개의 기소 항목을 모두 자기 스스로 무죄라고 주장했고, 어떠한 뉘우침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정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유죄였던 이유는 성실하고, 능력있고, 업무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맞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갖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거나 판단하지 못하고 그저 기계적으로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의 재판의 판결이었습니다.
이 재판 과정에 참여했던 독일의 정치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악’을 두가지로 나누어 정의합니다. 첫째는 보편적인 악, 특별하고 흉측한 악. 또다른 하나는 평범한 악: 도덕성이 상실된 현대 사회의 징표이며, 광신도나 반사회적인 인간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현상입니다.
민족 학살 같은 홀로코스트부터 따돌림이나 혐오까지,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윤리와 도덕과 종교적 양심이 상실된 이 사회. 악의 평범성은 우리 삶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회에 참 평이하게 퍼져있는 이 악의 평범성에 대항해 우린 어떤 고민을 하고 무엇을 선택하며 어디를 향해 걸어 나아가야 할까요?
어떤 이는 전쟁과 폭력 속에서 고통받는 이를 위해 자신의 의술과 열정과 헌신을 쏟아냅니다.
어떤 이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상처 입은 사람들을 감싸주고 사랑하며 다시 일어설 용기를 부어줍니다.
어떤 이는 자신의 명예와 부와 권력을 위해 온갖 부정 부패를 행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이 악의 평범성에 대항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무엇을 선택하며, 어디를 향해 걸어 나아가야 할까요?
부자 청년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는 성실하고 정직하며, 학식이 깊고 종교적 갈망이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청년에게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살아갈 기회를 열어주었지만, 구원의 길을 안내 받았지만 그는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가장 내려놓기 힘들어한 재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며,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힘들지만 마땅히 선택해야할 길을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침묵하며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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