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절대의지, 자연은 영감의 거장
함석헌의 작품 시 중에서 따온 말이다. 역사의 광장이란 절대의지의 실현광장이요, 대자연이 예술의 거장처럼 온갖 영감을 쏟아내는 예술작품 창작실 같다는 말이다. 함 옹의 시는 때때로 우리 영혼을 뒤흔들고 우리 양심과 진실의 정곡을 찌른다. <흰손>이라는 극시 중에 이런 대사도 나온다. “내게 오는 자 참으로 오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배한다고 모여 웅성거리는 자, 종교 한다고 씨부렁거리는 자, 교회한다고 북 치고 장구 치는 자,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속은 따 빼먹는 종교모리배나 다름없는 자칭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자들에게 허깨비와 껍데기는 저리 물러서고 진실, 신실, 공의 등 <참>을 가지고서만 오라는 것이다.
2018년 묵은해가 지나고 2019년 새해가 동튼다. 아니 동텄다. 어떤 새해가 되었으면 좋을까? 우리 모두 정직하고 진실해져서 온갖 거짓, 꾸밈, 위선, 괴변 논리들로 치장된 껍데기와 허깨비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오직 역사 앞에, 생명 앞에, 지구 현실 앞에 진실하자고, 참이고자 힘쓰자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면, 남북 분단현실을 고착화 시켜온 사실적 세력들은 누구인가? 새로운 남북 공존공영 평화협력시대를 열어가려는 것을 가로막는 국내외 정치세력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바라본다는 한국사회가 세계에서 갈등과 빈부격치와 청년노동자들의 불행한 일이 가장 비극적으로 벌어지는 현실을 그대로 놔두고 발전할 수 있는가? 최저임금보장법이 실현되면 기업들은 정말 경영수지 적자 때문에 망하는가 아니면 엄살인가? 개성과 서울 간 철도개통을 위한 착공식을 바라보는 국민의 맘은 기쁨 못지않게 착잡하다. 박근혜 정권 시절 누가 왜 개성공단의 문을 닫게 하여 수많은 그곳 북한 여성 노동자들과 중소기업인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는가? 마지막으로 한국기독교 이대로 되는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명성교회 같은 대형교회 십여 개소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시민들에게 이렇게 수모와 지탄을 받아도 되는가?
성경은 말한다. 그런 것들은 모두 허깨비 같은 것, 껍데기 같은 것, 죽정이 같은 것이어서 하나님의 역사의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 머지않아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있지 못하는 것들”(시 103:16)이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있지 못하거니와”(시103:15-16)라고 갈파한다. 유한한 70-80세 살고 가는 인생뿐이랴?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집단이 이룩해놓은 ‘제국 같은 위용들’과 모든 영화들도 진실로 한 여름철 피고 지는 덧없는 들꽃 같은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들은 영원까지 지속하지 못한다. 미국과 중국의 신제국주의, 일본의 신야망, 삼성재벌기업체, 북한의 핵무기 저항, 자본주의에 완전 항복하고 예속된 기독교 교회왕국, 정부연구비 당근에 춤추는 지성이 죽은 영혼 없는 오늘의 대학들, 보수 언론매체들, 그것들은 모두 허깨비이고 껍데기여서 머지않아 역사의 바람에 살아질 것들이다.
새문명의 시대, 새로운 바람, 야훼의 긍휼과 공의의 바람
동양종교철학의 백미라고 볼 수 있는 노자 『도덕경』에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나온다. 노자 『도덕경』은 종교적 상제(上帝)보다고 더 근원적 존재로서 대자연을 말하는 자연주의철학이요 세계관이다. 대자연을 ‘하늘과 땅’으로 압축했다. 그런데 대자연은 무사공평 하지만 특별한 사람에게 예외를 베풀어 편애하거나 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대자연은 무정하고, 가차 없고, 엄정해서 대자연의 법도에 어긋나는 행위자들을 스스로 난파당하게 한다. “천지는 긍휼을 베풀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천지불인’의 경구는 경외해야 하고 그 깊이와 높이를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이웃집 할아버지 정도로 함부로 대하고 접근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야훼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시 103:8).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신다”고 증언한다. 그 본질이 먼지에 불과한 사람생명에게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영혼’이 탄생되고 영원자를 찾고 앙모하며, 그의 법도를 기억하고 순명하려는 열정을 지닌 존재로 변한다. 그 무엇보다도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신다”(시 104:30). 그리고 사람의 맘속에 새로운 영을 불어 넣으시고 유인하고 설득하시면서 하나님이 이뤄 가시려는 ‘창조적 새로움’의 성업에 동참하게 하신다. 과정신학에 의하면, 만유일체 실재(reality)가 과정(process) 속에 있지만, 동일한 시간과 계절의 반복 순환이 아니다. 그 과정은 ‘창조적 새로움과 아름다움’이 점진적으로 창발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일하심이며, 피조물을 그 일에 동참하라고 초대하신다.
위대한 ‘3.1독립선언서’ 정신에로 돌아가기
눈을 들어 크게 넓게 높게 바라보자. 지금은 인류 문명사에서 어떤 시대인가? 우선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생태학자들과 기상전문학자들의 과장된 엄살이 아니고, 지구가 위태롭다. 지속가능할만한 성장을 보장할 지구상황이 아니다. 제국주의적 영토화장이나 대국들의 군비경쟁이, 경재성장, 종단부흥과 같은 지역적 문제들에 골몰하기 전에 엣 가치관과 세계관적 문명이 붕괴에 직면하고 있다. 생태학적 윤리와 생태문명(eco-civilization)이 동터야 한다.
우리들 조상은 1919년 <3.1독립선언서>에서 이미 선언하고 있다. 3.1독립선언정신과 한 맘 한 뜻이 되었던 운동은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인류 공존동생권의 정당한 발로이다”라고 선언한다. 국가들의 침략주의 강권주의는 구시대의 유물이고 작폐라고 단언한다.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라고 선언한다. 진리운동을 펴나가되 배타주의나 폭력주의는 단연코 거절한다고 선언한다. 무슨 불필요한 사족을 더 추가하랴. 우리는 <3.1독립선언서> 내용과 일치단결했던 조상들의 참되고 정당하고 진실과 성실했던 100년 전 삶을 엄숙히 받아 계승해야한다.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는 새해에는 적어도 다음 같은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첫째, 남북관계는 주변 국가들의 저항을 이겨내고 평화협정체결과 함께, 통일될 때까지 두 국가의 실체를 피차 인정하고 서로 자기 국가 여권을 가지고 평양과 서울을 방문해야 한다. 상호 협력교류 증진은 말 할 것도 없다.
둘째, 한국 기독교는 이웃종교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대승적 정신을 계승하여 협력하되, 사람과 생명을 위한 종교가 되어야 하고 결코 종교나 종단을 위한 신도들을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셋째, 나눔과 공생 공영의 새로운 사회 기풍을 진작시켜야 한다. 성적위주, 승자독식, 무한경쟁, 약육강식의 가치관을 극복시키는 기업윤리와 교육철학이 정립되어야 한다.
넷째, 생태문명을 건설해 가는 생태학적 윤리 의식을 확장시켜야 한다. 그 일을 위해 최근에 출판된 존 캅(John Cobb Jr.)의 저서 『지구를 구하는 열 가지 생각』(한윤정 옮김[서울: 지구와사람, 2018])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신대 명예교수 김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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