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길, 아마샤의 길

창조절 세번째 주일 / 9월 세번째 주일
나의길, 아마샤의 길
아모스(Amos) 4장 4-5절, 7장 10-17절
김신철 목사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습니다. 격조 높은 경제윤리관을 정착시키려 한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돈을 버는 분야로 들어가서 정승의 윤리를 요구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수용하기에 이릅니다. 정승조차도 돈 버는 일로 들어가면 개의 차원으로 추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게 우리네 역사입니다. 이 속담에서 파생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개 처럼 벌어서 개처럼 쓴다”는 말입니다. 일종의 욕설이지요. 한국에서 요즘 흔히 보는 현상입니다. 최근에 ‘궁중족발사건’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내용은 뉴스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법원이 족발집 사장에게 징역 2년 6월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건물주는 아무런 법적근거가 없어서 벌금도 처벌도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족발집 젊은 내외는 족발집이 그들의 가진 전부입니다. 건물주는 수백억 재산가입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개처럼 돈 버는 자입니까.
아모스2:6-8절을 보면돈 못 갚는다고 사람을 노예로 팔아넘깁니다. 제단 앞에서 전당으로 잡은 옷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누워 벌금대신 받은 포도주를 마십니다. 아모스 5:10-12 를 보면 잘못을 책망하는 판사를 미워하고 정직한 증인을 싫어하는 무리, 가난한 자를 착취해서 대리석 대저택을 짓고, 좋은 땅 사서 포도원을 만들어 누리며, 뇌물을 주고 판결을 사서 재판을 왜곡시키는 일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모스 8:4-6에는저울조작으로 이익의 극대화를 꾀하는 자들 과연 신앙이 있을까 의심이 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그렇다면 그 신앙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아모스 4:4-5이 그걸 말합니다.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의 대표적 성소입니다. 이 사람들은 안식일은 물론이고 월삭이며 이스라엘의 절기마다 꼬박꼬박 성소를 찾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헌금을 철저하게 넘치도록 드립니다. 사흘만에 한번꼴로 십일조를 기쁘게 드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런 예배 행위를 일컬어 죄를 더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히브리어를 배우면서 깜짝 놀랐던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헌물과 뇌물이 같은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헌물로 읽어야 할 지 뇌물로 읽어야할지를 전체 문맥을 통해서 파악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배고파서 제물을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은 돈 필요해서 헌금 요구하는 분 아닙니다. 제사장들이 먹고 살며 이스라엘의 가난한 자들이 먹고 살라고 만들어 놓은 제도입니다. 모두 이스라엘의 신앙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에 헌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사흘만에 십일조를 드리고, 모일때마다 감사헌금을 드렸던 이 사람들의 헌물을 도저히 우리는 헌물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건 뇌물입니다. 뇌물은 목적이 있습니다. 뇌물을 주는 자의 의도를 뇌물을 받는 자에게 관철시키자는 것이지요. 돈으로 신을 회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예배가 이렇게 이교의 예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풍조였는데 이 풍조를 선도하며 조장했던 종교가 있습니다. 바알종교입니다.
아모스는 호세아와 더불어 이스라엘을 무대로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멧세지는 사뭇 다릅니다. 호세아가 바알종교에 매몰된 이스라엘을 어떻게 든 하나님께 이끌려고 간절히 호소했던 선지자였다면, 아모스는 바알종교에 대해서 거의 침묵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아내가 바알예배에 참석하겠다며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바알제사장의 아이를 임신해서 돌아옵니다. 또 나가면 이번엔 또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여 돌아왔습니다. 아모스2:7은 이런 현상을 딱 한마디로 축약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자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렵혔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문제를 바알종교의 문제로 보지 않고, 인간 본능의 과도한 표출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통제받지 않는 본능은 물어뜯는 이리처럼 잔인하고 이기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약자들은 먹잇감에 불과했습니다. 아모스는 마구잡이로 이스라엘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메세지에는 엄격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이 기준에 따라서 메세지의 강약이 결정되었습니다. 아모스 5:24입니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니라”. 공법은 율법을 말하고 정의란 율법에 구현된 이스라엘 정신입니다. 아모스는 이 기준으로 이스라엘을 비판했고 이 정의가 이스라엘이 사는 길이라 제시했습니다.
정의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가장 간략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안식일제도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두가 똑같이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를 기업이라 불렀습니다. 절대평등, 절대자유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주셨고 하나님이 이 땅에서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절대평등, 절대자유는 당시 이방에는 없는 이스라엘의 근간이었습니다. 절대자유는 절대책임을 수반합니다. 쌍방계약관계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약속이라는게 그래요. 세상만사가 뜻대로만 되어지지 않습니다. 내 돈이 모자라서 친구한테 돈 빌려 보태서 커피샵을 열었더니 두달 지나서 팀호튼이 내 가게 바로 옆에 들어왔습니다. 내 본전은 고사하고 친구 돈 갚을 일이 태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처리했느냐, 집과 땅은 물론, 그것도 부족하면 자기 자신과 아내 심지어 자식까지 노예 시장에 내놓고 팔아서 그걸 갚았습니다. 요즘은 파산신청 해버리지만요.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갚는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저 사람의 땅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그의 기업이다. 나를 믿고 빌려준 건데 내가 갚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기업을 내가 줄어들게 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나를 신뢰한 저 사람의 기업을 지켜주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이다. 그렇게 믿음을 지키느라 종으로 팔려갑니다.
거기서 안식일을 만납니다. 일에서 쉬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 날은 종과 주인의 구별이 없어지는 날입니다. 똑같은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종으로 사는 내가 자유를 누리고 내 주인과 부자들과 평등하게 됩니다. 그리고 안식년이 됩니다. 매 해 7월 1일 나팔절입니다. 제사장이 아침에 나팔을 길게 붑니다. 종이었던 사람은 자유의 몸이 됩니다. 모든 부채에서 해방됩니다. 찬송시인은 이 날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이 사람은 풀려나서 자유노동자로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은 안식년이 되면 땅을 가진 자들은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휴경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때 땅이 없는 가난한 노동자는 그 땅을 갈아서 거기서 얻어지는 소출로 생활에 보탰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내는 십일조, 첫째, 둘째해는 제사장 레위인에게 돌아가지만 세째해의 십일조는 가난한 자에게 정기적으로 배분했습니다. 땅은 일곱 안식년 이 지난 다음해 희년에 돌아옵니다. 그것이 누구에게 팔렸던, 그 사이 몇 사람의 손을 거쳤던 상관 없이 본인에게 돌아옵니다. 본인이 죽었으면 자식에게 돌아갑니다. 실수없이 사는 인생은 없는 것. 내 당대는 망해서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서 태어난 나의 자녀들은 또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 그들이 이렇게 돌아온 땅을 기업으로 삼아 남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시인의 노래는 계속됩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이것이 아모스가 말한 정의입니다. 아모스는 이 세계관을 머리속에 그리며 정의를 상실한 이스라엘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아모스가 말 한 가난한 자, 의로운 자 이들은 상대방의 기업을 존중해서 자기를 종으로 내던져 기꺼이 팔려가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입니다. 믿음으로 그랬습니다. 그러나 바알식으로 개처럼 돈을 벌었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의를 밟아버렸습니다. 안식일도, 안식년도, 희년도 이들에겐 의미없는 공허한 수사일뿐입니다. 부채는 탕감되지 않았고, 안식년에 종들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십일조는 가난한 자에게 배분되지 않았습니다.
벧엘 성소의 제사장 아마샤는 이스라엘 국가종교를 책임진 최고위 수장입니다. 아모스가 정의를 외치며 멸망을 선포하자 아마샤는 단번에 혁명을 선동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아모스에게 일갈합니다. 곱게 유다로 돌아가서 선지자 노릇이나 하면서 밥이나 먹고 살아라. 여긴 예루살렘이 아니고 이스라엘 국가 성소, 왕의 성소이다.
그러나 아모스는 자기의 외침에 신적정당성이 실려있음을 천명합니다. 실제로 아모스나 호세아는 저 옛날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혁명을 선동하거나 혁명을 설교의 주제로 삼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혁명으로도 고칠 수 없는 상태였기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아모스 호세아의 외침이 있고 40년이 못되어 앗수르에게 망합니다.
아마샤도 압니다. 이스라엘에 율법도 정의도 시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스라엘 성소에 하나님을 찾는 무리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그들의 헌금이 넘쳐난다는 것은 나름대로 이스라엘 국가종교제도가 의미있는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종교는 진화하고 있다는 거지요. 아모스는 묻습니다. “너희에게 안식일이 있는가. 너희에게 안식년이 있는가. 종들이 돌아오는가. 믿음으로 끌려갔던 그 의인들의 부채가 탕감되고 있는가. 그게 없으면 너희의 예배는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듣고 헌금하고 그렇게 헤어지는것일 뿐이고 알맹이가 없는 껍질뿐이다. “
오늘의 교회상황에서 우리는 아모스를 읽습니다. 한국교회의 양적팽창을 주도했던 자들의 민낯을 우린 지금 보고 있습니다. 교회세습, 담임목사의 교주화 현상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이들이 전부 바알사고를 가진 자들입니다.
포이에르 바하는 종교를 말하여 인간사고의 산물이라 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바알종교, 아세라 종교 모두 인간 사고가 만들었습니다. 풍요와 섹스를 추구하는 원색적인 본능,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욕망. 그런 본능과 욕망이 중심을 잡으면 예배의식이나 종교행위는 본능과 욕망의 들러리로 전락하거나 껍질로 변해버립니다. 급기야 김동호 목사는 “교회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고 설교하기에 이르렀고, 금년 봄에 한국교회 원로중의 한분인 손봉호 교수는 “교회가 폭삭 망해야 기독교가 산다”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랬습니다. “기독교는 교회의 무덤에서 살아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가 폭삭 망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이분의 이야기에 주목이 가는 대목은 기독교와 교회를 구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기독교가 빠져버린 껍질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교회의 위기는 교회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위기는 교회가 사라진 그 빈자리를 이슬람이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그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설교 후 40년 못되어 이스라엘이 망했는데 이 교회는 40년 이후에도 유지 될까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봅니다. 교회에서 빠져나가버린 알맹이는 무엇일까요. 정의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정의를 세상에 빼앗겨버렸습니다. 세상에는 두가지 정의가 있습니다. 가진 자의 정의와 가지지 못한 자의 정의입니다. 두 정의가 싸워요. 총을 들고 싸우다가 서로가 못이길 것 같으면 타협합니다. 그 타협의 토대 위에 오늘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가진자의 정의는 아모스의 정의가 아니며 가지지 못한 자의 정의도 아모스의 정의가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그런 정의를 세우려고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상실한 게 이 아모스의 정의, 예수의 정의입니다. 정의를 포기하면 교회는 정의를 포기한 아마샤의 제단이 되는 것입니다. 정의 없는 교회는 껍질입니다. 기독교 없는 교회는 껍질입니다. 오늘 이 교회는 정의의 기관인가 아모스는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땅들아 바다야 많은 섬들아 찬양을 주님께 드리어라 싸움과 죄악의 참혹한 땅에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네”
세상의 모든 전쟁, 싸움은 그들 나름대로의 정의를 위해서고 그들 나름대로의 정의의 충돌입니다. 그 와중에 참혹한 죄악이 서식합니다.
그 분쟁, 전쟁, 이기든 지든, 거기서 나오는 노래도 분노도 하늘에 사무치지 않아요. 그러나 그들 정의가 충돌하는 그곳에 유일하게 하늘에 찬송이 사무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요 그리스도의 정의며 아모스의 정의입니다. 그래서 전 이 찬송을 좋아합니다. 이 찬송이 여러분의 찬송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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