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열네번째 주일 / 9월 첫 번째 주일
내 십자가? 주님 십자가?(God’s Life in me)
신명기 30: 15 – 20
누가복음 14: 25– 33
신중현 목사
요즘 한국의 상황을 보여주는 신문 사설을 하나 읽었습니다. “저 사람”은 왜 대통령을 하는 걸까? 라는 제목이었습니다. 내용은 각설하고, 그럼 예수님은 왜 이세상에 오셨으며, 또 오시는 걸까 질문을 해봅니다.
요한 복음 10: 29-38 입니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도 더 크시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새번역) 이 때에 유다인들은 다시 돌을 집어 예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 하고 말씀하셨다. 유다인들은 “당신이 좋은 일을 했는데 우리가 왜 돌을 들겠소? 당신이 하느님을 모독했으니까 그러는 것이오. 당신은 한갓 사람이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 하고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너희는 그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아라.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공동번역) “The Father is in me and I am in the Father. The Father and I are one.”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예수에게는 죽을 죄였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말할 수 있게 “구원”되는 게 바로 그 분이 우리에게 오신 목적이였습니다. 여기서 성경의 주제를 다시 요약해봤습니다: 구약은 한마디로 “하나님은 계신다. 그리고 창조주이시다” 신약은 “한 분이신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며 그래서 인간을 통해 자신을 드러 내신다.” (I’ve reached now a truth about the Bible that the theme of the Old Testament is “God is, and is the Creator” and, for the New Testament, “God is Triune and is human as well!”)
리챠드 로어 (R. Rohr) 의 말을 번역해 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와 똑같다”라고 강조해 말씀하십니다… 유신론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에 촛점을 두는데 기독교는 신성이 인성과 “함께”하는 것에 촛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신성만을 강조 한다면 우리는 그 분이 우리에게 오신 진짜 이유를 놓치게 됩니다.” (Jesus is in fact emphasizing “I am like you”- a mortal, a human, everyman! …… Theism believes there is a God. Christianity believes that God and humanity can coexist in the same place. We often think of Jesus as having only a divine nature, and this misses and avoids the major point He came to bring.”) (“Naked Now” pp. 68)
제게는은퇴하고난 지금도 화두로 붙잡고 있는 이상철 목사님의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많을 수가 없고 많아서도 안된다.” 물론 말 귀절을 알아 들어야 할 말씀이죠. 이목사님께서 과연 기독교인의 숫자가 자꾸 자꾸 쫄아들기를 바라셨을까요?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께서 동행하던 군중을 향하여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모두 알아들으셨나요? 그럼 “나는 예수님 제자입니다” 할 수 있는 분, 하고 싶으신 분, 손 한번 들어보실래요. 이 말씀을 문자대로 받아들이면 한 사람도 손을 못들어야 정상일테지요. 다음과 같이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실 땐 예수님 심술쟁이처럼 보이기도 해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마태 13: 13-15, 마가 4: 10-12, 누가 8: 9-10) (**공동번역은 제대로 번역했습니다.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요? 이 부분은 “현대어 성경”이 더 알기 쉽게 번역했네요.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 자매, 심지어 자기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오늘 본문 전체 문맥의 연결이 순조롭지 않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개의 예화를 들고 계시는데: (1) “너희 가운데 누가 망대를 지으려 한다면 그는 먼저 앉아서 그것을 완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따져 과연 그만한 돈이 자기에게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기초를 놓고도 힘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한다면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은 집짓기를 시작해 놓고 끝내지를 못하는구나!’ 하고 비웃을 것이다. (2)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만일 당해 낼 수 없다면 적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청할 것이다.” 물론 하나 하나의 예화야 다 쉽게 이해되는 데 이걸 어떻게 연결지어야 하죠? 그런데다가 또 이 말씀이 따라옵니다. 33절,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오, 이 귀절이야 앞의 예화 시작 전에 붙이면 될 것 같은데 이런 말씀이 또 나오지요. “소금은 좋은 물건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땅에도 소용없고 거름으로도 쓸 수 없어 내버릴 수밖에 없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자, 정리해 볼께요. 요체 (키 포인트) 는 예수님께서 지금 군중들을 향하여 제자들을 뽑기 위해 조건들을 말씀하시는게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을 향한 믿음 – 제자 자랑을 펼치고 계신다는거죠. 이렇게요: “보십시요. 이 사람들이 나의 제자들입니다. 나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나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처자나 부모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우선 순위에 놓지 않을 사람들이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느냐구요? 따져 보면 그들이 나를 따라 온게 아니라 제가 그들을 손수 뽑았기 때문이지요” (요한 15: 16) 물론 군중 앞에서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제자의 길과 제자됨의 은총을 재확인하며 감격했을테지요. 잘 아는 얘기: “거의 모든 엄마들이 한 번씩은 자기 애가 천재가 아닐까 의심한다” 그럽니다. 또 주로 할머니들이 자랑하시는 말씀: “오 우리 손자 (손녀)는 못하는 노래, 못하는 말이 없어요 영어도 다해요!” 지금 예수님도 바로 그 걸 하고 계시는 거죠.
자, 그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한마디로, 우리가 소위 “내 십자가”라고 여기는 것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당신의” 것으로 여기신다는 거죠. 주님의 십자가가 오로지 우리의 영적인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면 그건 무슨 뜻인가요? 과연 우리 가운데 누가 “예수님, 제가 부모 처자 형제 자매 물론 나 자신도 아주 미워해요. 그러니 말씀하신대로 저를 제자로 받아주셔야합니다”라고 말할까요? 한 번 이런 예화를 만들어봤었죠: 성악가 아버지가 자기 아들 노래 잘 하는 게 자랑스러워 “노래 못하면 내 아들이 될 수 없지요” 하는 말을 듣고는 누가 그 성악가의 아들 되기 위해 노래공부를 시작할까요? 그렇듯이 제자되기는 오히려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를 제대로 사랑하는 데에 있겠지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코핀 목사님(Rev. William Sloane Coffin)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간의 ’영적인 삶’이란 사람의 기본을 철저히 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Spirituality means to me living the ordinary life extraordinarily well. As the old church fathers said, “The glory of God is a human being fully alive.”
하바드 대학 신학부에서는 오늘날의 인류를 위한 자기네의 사명을 “종교적인 문맹퇴치” (Religious Illiteracy Matters)라고 강조해 오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문맹 이란 잘 아는 말대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바라보기” 이며 한 마디로 “성경 (경전)을 문자적으로 받아 들이기” 라고 저는 이해하죠. 예를 하나 들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나는 떠난다. 이제 나 없이 너희들끼리 열심히 서로 사랑하라” 이렇게 들어야 할게 아니라 “내가 너희와 하나님을 함께 사랑했던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을 함께사랑하라”로 들어야 하겠지요. 우리가 “사랑”을 얘기할 때 그 내용물에 상관없이– 설사 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서로 사랑”이 하나님은 없이 자신만의 유익이나 의로움이 동기가 될 때 그 것은 결국 “에로스”이고 “하나님을 함께 사랑할” 때 거기 “아가페사랑”-하나님이 계시게되는거죠. 마치 자신들이 부모가 되어 보기 전에는 부모의 사랑을 헤아리기 어렵듯이 “하나님 되어 보기” 전에 누구도 하나님의 그 아가페를 계량해 볼 수 없겠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서로에게 “신들” , 다른 말로 하나님의 심장을 나누어 가지는 “자녀들”, 또 다른 말로 ”제자들”로 살게 해 주시려 하늘 아버지의 이름으로오셨습니다. 그리고 이게 “복음”이고 “구원”이죠. 하나님이 스스로만을 위해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나팔 불며 계시거나 메시야가 “나 홀로 메시아다” 하기 위해 오신다는 게 상상이 되시나요? 그래서 유영모 선생님께선 하나님은 “없이–계신다”고 하시는 거죠. 이 걸 “계시면서(계시지만) 없다”로 들으면 무신론자나 단일신론자일테구요.
오늘 예배를 통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몸소 뽑았지. (John 15: 16) 그렇다면 어째서 내가 오늘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임금이나 망대 건축자처럼 장차 쭉정이로 끝날 것을 뽑았을 수도 있다고 의심하는 거니?” 하시는 주님 말씀 앞에 서는 경험을 함께 새롭게 나눕니다. 그리고 이제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는 물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로 우리를 구원하신 “성령-주님”과 함께 “신들” 다른 말로 “자녀들”, 또 다른 말로 ”제자들”하러 (살러) 나아갑니다. 가당치도, 온당치도 않은 “왕 놀이”가 아니라 놀라워라! “하나님”하려 나가는 거죠. 제주 4·3 희생자의 아내가 아버지의 모습을 묻는 아들에게 “거울보라. 너영 똑같이 생겼져’”라고 했었다는 글을 읽으며 눈물이 났습니다. (한겨레, 8월 30일 허호준기자) 우리도 오늘 거울 속 하나님 모습을 성령과 함께 믿음으로 마주하며 “주의 십자가- 내 십자가. 하나님의 삶-나의 삶!” 외우며 주님께 감사를 올립니다. 한마디 더. “설령 물에 녹아 눈에 안 보일 때에라도 소금이 맛을 잃는 일은 없다는 걸 우리 모두 잘 알지?” 주님이 찡긋 웃으시며 거울 속에서 말씀하실 때 우리는 맑은 미소로 응답합니다.
이 세상을 향해 이렇게우리를 자랑스러워 하시는 주님께 드리고 싶은 찬송으로 설교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I Come to the Garden Alone) 입니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And, He walks with me and He talks with me, And He tells me I am his own. And the joy we share as we tarry there, None other has ever 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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