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세 번째 주일 / 12월 두 번째 주일
마리아의 자장가
사무엘상(1Samuel) 2:1-11 누가복음(Luke) 1:39-55
김혜란 목사
마리아 찬가는 잘 알려진 노래입니다. 거의 매년 대림절기간동안 함께 나누고 묵상하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관점으로 이 부분을 살피고자 합니다. 그러나 관점을 나누기 전 잠시 본 말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 나타나, 아이를 낳게 될거라는 소식을 전한 이후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아주 급하게 엘리사벳을 만나러갑니다. 당시 휴대폰도 없고, 페이스북도 없고, what’s app 도 없는데, 어떻게 엘리사벳에게 연락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자그만치 3개월 간의 긴 체류를 작정하고 떠나는 여정이었을텐데, 그 사정을 어떻게 전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전달하지 못하고 마리아는 급하게 길을 나섰을 것입니다. 도착해서 엘리사벳은 집 문을 두드립니다. 띵동!
예고도 없이 나타난 마리아를 엘리사벳과 스가랴는 반갑게 맞이합니다. 아니, 엘리사벳과 스가랴만 마리아를 반기는 것이 아닙니다. 임신 중이었던 엘리사벳의 뱃 속의 아이가 마리아 방문을 느끼고, “기쁨으로 반응했다” 고 성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엘리사벳의 자궁안에 있던 아이가 기쁨으로 좋아했을까요? 마리아의 목소리를 어떻게 알아차렸을까요? 마리아로부터 무엇을 들었을까요? 그리고 왜 신나했을까요? 교우들 모두 다 잘 아시겠지만 이 아이는 미래의 세례요한입니다.
마리아의 예상치 못한 방문은 마리아의 아이 예수와 엘리사벳의 아이 요한의 만남을 예견합니다. 예수와 요한간의 엄청난 관계를 짐작하게 합니다. 세례를 받는 자와 세례를 주는 자 뗄레야 뗄 수 없는 귀한 관계를 태교반응을 보인 요한의 기쁨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에게 힌트로 제공합니다.
즉,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된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에 이어진 마리아찬가는 단순히 신앙고백이 아니라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들려주는 자장가로, 두 아이의 엄마와 두 아이의 운명적 만남을 예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장가를 불러주었던 그 마리아의 목소리를 세례 요한이 뱃 속에서 알아듣고 그 소망이 담긴 메시지에 신이 나서 기쁨으로 뛴 것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알파 한인연합교회 교우여러분?
어렸을 때 어떤 자장가를 듣고 크셨습니까? 아니 어떤 자장가를 아이들에게, 손주들에게 불러주셨습니까? 명작품처럼 좋은 자장가는 세대를 넘어서 기리기리 남아 전해집니다.
저도 엄마가 불러준 자장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장가를 우리 아이 노아 하나에게도 즐겨 불러주었습니다. 이 자장가는 아마도 한국에서 젤 잘 알려진 자장가입니다. 무엇일까요? (섬집아이)
엄마가 섬그늘에 굴따러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이 자장가는 바다가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굴을 따러 간 엄마의 부재를 바다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부모나 가족, 인간이 아니라 바다가 데이케어를 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 자장가는 한국 전쟁 후 쓰여진 자장가입니다.
이 자장가를 불러준 저의 엄마는 북쪽에서 피난오신 분입니다. 남쪽에서 부르는 이 자장가가 북쪽에서도 불려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찌보면 이 자장가를 통해 갈라진 남북이 하나로 만남을 꿈꾸게 합니다. 이 자장가는 군사분계선을 넘어섭니다. 남북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초월합니다. 통일의 한국, 분열이 아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상이변과 환경위기의 시대에 이 바다를 지키고, 피조세계가 잠을 보채는 인간을 돌보고 책임지는 생태적 관점을 부여합니다. 피조세계에 속한 어떤 것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드러냅니다. 맞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를 책임질 분은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이 점에서 본 한국 자장가는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같은 점에서 우리가 마리아찬가 역시 마리아가 혼자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작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조상대대로 내려 온 구전의 자장가로 이해한다면, 이 찬가 역시 마리아의 엄마로 부터 들려진 자장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자장가를 엄마가 될 마리아도 당신 뱃 속에 있는 예수님에게 들려주었다고 상상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럼 마리아찬가 그 출처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카톨릭 구전 전통에 의하면 마리아 엄마의 이름은 아나라고 합니다. 아나는 히브리말이고 이걸 헬라어로 번역하면 하나 (한글성경은 한나로 번역) 입니다. 여기서 사무엘의 엄마의 이름과 마리아 엄마의 이름이 같습니다. 그런데,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두 여성이 부른 노래도 아주 비슷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노래와 마리아 찬가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기원전 1000년 이스라엘 백성의 엄마로서 하나는 바로 1세기 마리아의 증조 고조 할머니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마리아의 엄마 하나가 당신 조상 하나의 노래를 자장가로 마리아에게 들려주었고, 그 자장가를 다시 예수님께 들려준 것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무엘 엄마와 하나의 기도가 자장가가 되어 메아리로 1000년을 울리고, 수세대를 거쳐 구전으로 여성들, 엄마들을 통해 해방의 노래로 불리어졌을 것입니다. 그런 상상을 하시면서 사무엘서 2장 하나의 노래를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4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9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만약 하나의 노래가 조상대대로 자장가로 후세대에 전해졌다면, 마리아 사촌 엘리사벳도 그 노래를 알았을 것이고, 그 노래를 당신 태아에 있던 미래 세례자 요한에게도 불러주지 않았을까요? 그런 경우,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 자장가로 엮어있는 사이였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누가 복음 4장의 예수님의 첫 설교를 들어보시면 얼마나 그 내용이 하나의 노래, 마리아 찬가와 비슷한 지 또 볼 수 있습니다.
18 ㅁ)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조상 하나의 기도가 구전 자장가로 전해서 마리아의 자장가로 이어졌고, 그 두 자장가가 마리아의 뱃속에 있을 때 부터 아이 예수님의 몸과 마음 영에게 임해서 어른이 된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해서 한 첫 말씀, 복음전파의 정수가 되어 선포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메시지를 전하러 올 예수님 오심을 예비했던 세례자 요한 역시 평생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 선포는 예수님의 태어남,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알파 한인연합교회 여러분,
대림절 세째주 기쁨의 주를 보내면서 우리는 어떻게 변화된 세상을 파격적으로 선포했던 조상 하나의 기도와 자신의 임신의 소식을 해방의 소식으로 고백했던 마리아의 노래가 자장가가 되어 시공을 초월해서 오늘 우리에게 복음으로 이어지는 이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너무나 힘들 2년을 보내고, 그 여파로 온 세상이 지쳤있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 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같은 우리에게 자장가를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한국 전쟁 후 그 분단의 아픔, 초토화된 한반도의 고통 속에서 들려진 자장가 엄마가 섬그늘에서 인간세계과 피조세계 간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그런 것처럼 마리아 찬가 자장가역시 과거의 세계와 현재의 세계 간 경계가 없습니다. 과거가 현재이고 그래서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미 과거의 나쁜 일들은 없어졌습니다.
교만한 자를 이미 하나님이 흩트셨습니다. 낮은 자를 이미 들어 올리셨습니다. 배고픈 자들의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과거의 사실이 현재로 이어져 미래를 향해 나갑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과거의 역사하심과 미래의 약속이 마리아 찬가 자장가를 통해 하나로 만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여러분,
마리아 찬가와 하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제 배가고파 잠이 들 수 없는 분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 그리고 두려움으로 인해 잠을 들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어떤 자장가를 불러주시렵니까? 이 자장가를 부르기 위해 어떤 지지와 배려 그리고 준비가 필요하겠습니까?
마리아는 찬가를 부르기 전, 엘리사벳의 전적인 지지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십대 소녀였습니다. 가진 자, 소위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마리아 집안 배경이 어떤지 모릅니다. 소위 정상적인 가족이라 불리울 만한 분들이 있기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는 미혼모였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녀는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아이를 가졌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신나게 집을 나선 것이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가정에서 자란 자신이 미혼모인 자신을 향해 쏟아질 그 선입견과 폭력의 눈길을 피하고자 자신을 이해해주고 보살펴 줄 수 있다고 믿었던 사촌 언니 엘레사벳의 집으로 나선 것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천벽락같은 천사의 임신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여나 하는지 영적 분별을 해야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적 분별의 시간을 혼자 외롭고 무섭게 보내지 않고 엘리사벳의 동행함으로 함께 했습니다. 그 엘리사벳과 스가랴의 집이 피곤하고 지친 임신한 마리아의 몸을 쉬게 했고, 영적 돌봄을 제공했습니다. 그런 쉼과 위로 배려 속에서 예언자적 다짐을 할수 있었고 미래에 닥친 위기를 용기있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사촌 엘리사벳이 보내준 무조건적 환대와 배려 끈끈한 나눔을 통해 새 아이 탄생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여러분,
우리는 여젼히 코로나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측이 불가능한 미래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없애는 약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장가입니다. 두려움에 가득한 마음을 달래고 친근한 멜로디와 가사로 지치고 상한 몸과 영혼을 위로해 줄 수 자장가… 저는 알파한인연합교회가 이 세상의 그 자장가가 되길 소망합니다. 아니 그 자장가를 불러주는 세상의 엄마가 되시길 바랍니다. 아니 두려움에 떠는 2022년 마리아가 여러분 교회의 문을 두드릴 때 기꺼이 문을 열고 환대하는 엘리사벳과 스가랴가 되는 교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제 어머니 이야기를 드렸지요. 아직도 엄마가 불러주었던 자장가가 귀에 쟁쟁합니다. 엄마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엄마는 지난 2월 25일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제 엄마는 이세상에서 안 계시지만 제게 들러준 그 자장가의 울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울림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자장가 섬그늘에 등장하는 엄마는 굴따러 가서 없었지만 바다가 불러주는 그 파도소리로 아이는 엄마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는 떠났어도, 그들의 존재는 우리를 돌보고 우리를 지켜보는 달, 별, 파도의 소리를 통해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2022년 대림절, 마리아 찬가 자장가에 팬데믹으로 생채기 난 이 세계에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생채기는 빈곤, 기아, 홈리스, 공공의료 파탄, 전쟁, 피난, 생태의 위기로 가득찹니다. 자장가의 소리를 못 듣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마리아 찬가는 두려움을 물리친다는 것을.
두려움 대신 소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새 세상을 노래한다는 것을..
치유된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이 자장가를 기억하는 이들의 합창으로 온 세계가 메아리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교만한 자를 내치시고, 힘 있는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며
낮은 자를 들어올리시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욕심에 가득 찬 자들이 비워낸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그 날 말구유에서 마리아는 또 다시 마리아찬가 자장가를 잠못드는 예수님께 불렀을 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 마리아가 오늘 2022년 대림절 12월 11일 우리에게 불러주시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들리십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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