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지체, 그러나 한 몸 / 서동천 목사

성령강림절 열두 번째 주일 / 8월 세 번째 주일
많은 지체, 그러나 한 몸 (We are many, but we are one)
예레미야 1: 4 – 10
누가복음 13: 10 – 17
서동천 목사

 

105세인 교인 한 분이 그 동안 열심히 교회에 다니다가 갑자기 안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꾸준히 다니던 분이 보이지 않게 되자, 교회 목사님이 그를 방문했습니다.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한 그의 모습을 보고, 목사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오랫동안 열심히 다니셨는데, 최근에는 나오시지 않아 궁금해서 찾아 왔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 노인분이 자기 입장을 설명합니다. “ 목사님, 제가 90이 되었을 때는, 하느님께서 언제라도 저를 부르실 거라고 생각했죠.  그런대 95이 되어도, 또 100살을 넘어 지금은 105이나 되었는데도 저를 데려가지 않으시는군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를,  하느님께서 아마도 너무 바쁘셔서 저를 부르시는 것을 잊으셨가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나 때문에 더 이상 신경쓰시지 않게 해드려야겠다 생각하고,  교회가는 것을 중단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21세기에 아마도 여러가지로 더 분주하시지 않을까요? 그러나 염려마세요. 하느님은 그 어떤 사람도 잊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우리 모두를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젊던지 나이가 많던지, 여자든 남자든, 교회에 오래 다녔던 최근에 나오기 시작했든지 상관없이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레미야라는 젊은 사제가 어느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 내가 너를 뽑아 만방에 나의 말을 전할 예언자로 삼았다.”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가 어떻게  이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했는지 기억하세요?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젊잖게 사양하는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그럴듯한 핑계 인가요?   성서에 보면 여러 곳에서 이와 비슷하게  핑계대는 이야기들을 찾아 볼수있죠. 모세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세가지 핑계를 댑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말을 잘 못합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기술이 없습니다. 이사야의 경우에는, 자격이 없고, 더러운 입술을 가지고 있다고 겸손히 핑계댔죠. 요나는 하느님의 부탁을 받고도 그의 눈을 벗어나려고 도망친 이야기를 우리가 압니다.

마음속에 가진 두려움, 자신 없어 하며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 그리고 하느님의 신뢰를 벗어나 보려는 유혹과 핑계들이 우리 생각과 삶 속에 자리잡고 있지 않나요?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노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안심 시키죠.

1970년대에 이르러 연합교회 안에 있는 소수민족 교회들이 이민목회를 위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상호 협력을 위한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국내선교국의 도움을 받아 전국소수민족교회 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에 있는 여러 소수민족 교회들이 함께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기 시작하고, 자체 조직도 구성해 나갔습니다.

1996년 총회에서 연합교회 조직안에 소수민족교회 목회 협의회( Ethnic Ministry Council 약자로는  EMC) 라는 기구를 새로 두기로 결정했어요. 총회 조직의 하나로 시작하는 이 전국 협의회의 첫 시작 축하예배를 알버타주에서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알버타주의 소수민족교회 목회 협의회 회장직을 맡고 있어서, 이 의미 있는 예배를 계획하고, 진행했던 감격스러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군요.

그리고 10년 후인 2006년 제36회 총회에서는 다양한 문화 상호간의 목회(Intercultural Ministry)를 연합교회 목회의 방향으로 결정하고 지금까지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4년에는 전의 조직체제 중의 하나였던 토론토 연회안의 남서부노회에서 다양한 문화 상호간의 교회 발전을 위한 제도(Minister for Intercultural Congregational Development)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그 역활을 담당하는 첫 책임목사로서 일을 했고, 그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곳으로부터 이곳에 와서 함께 모여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개개인으로 태어났고, 또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에서 함께 살고 있죠.  우리 모두는 똑같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확실한 믿음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지체, 그러나 한몸”이 되어 함께 모이고, 감사하며, 축하하는 것입니다.

캐나다 역사에서 보면, 유럽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이 땅에 정착하기 오래전부터 원주민들이 이미 살고 있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럽에서 온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의 생활, 언어, 습관 , 전통들의 가치를 존중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시하면서, 자신들이 익숙한 유럽식으로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죠.  기숙사에 원주민 어린이들을 억지로 데려다가 유럽식으로 교육시키고, 언어와 생활을 가르쳤습니다. 원주민들의 언어, 문화, 교육, 생활습관과 전통을 계속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는  유럽의 내용들을 강요했죠.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강요하며 이들을 다룬 과거의 역사와 행동들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지적 당했죠. 연방정부와 함께 캐나다 연합교회를 포함한 여러 교단들이 잘못된 과거를 깨달으며, 동시에 화해와 용서를 구하고, 사과하는 일들이 여러번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번  연합교회 총회에서는 원주민들의 자율성과 자체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 계속 준비하는 일을 허락하도록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은 예레미야의 입에 직접 손을 대시면서 함께하심을 확인해 주시고, 용기를 갖도록 하셨죠.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담아준다. 그러니 너는 내가 보내는 곳에 가서 두려워 말고, 나의 말을 전하여라.”  이사야 예언자에게는 그의 입을 깨끗게 하시고, 그를 예언자로 세우셨습니다. 에제키엘의 경우엔 하느님께서 직접 그의 손을 이끄시며, 기운을 불어 넣어 사명을 주셨습니다.

부름을 받고 우리가 해야하는 말들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죠.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가 받은대로 전하는 사명을 갖는 것입니다.  보냄을 받는데에 대해 우리 자신을 열어 놓고,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우리 개인의 자격이나 기술의 영역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하심을 깨닫고, 그를 신뢰하는 일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만이 아니라,  크리스챤의 삶이나 목회 그리고 교회 지도자에게 우선되어야 하는 가장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알려지지도 않은 어느 여인이 몹쓸 병 때문에  허리가 굽어져서 몸을 펴지못한 채, 18년 동안이나 고생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보시고는 손을 그 여인에게 얹으시며, 18년 된 병을 고치 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시고 행동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물론 회당책임자는 안식일에 따르는 그들의 습관과 전통에서 벗어나는 일이 갑자기 벌어지니 용납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예수님에게  분개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규정과 전통이 갖는 근본정신을 새로운 이해와 방법으로 사람들에 이해시키려고 하셨죠. 인간의 치유와 기본적인 자유가 우리가 세워 놓은 법규나 유지해온 전통, 그리고 우리 몸에 배인 습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나 당면한 문제를 기준삼아 우리가 누구라고 정의 내리시지 않죠.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데, 감히 우리 스스로가 그런 기준을 갖고, 자신을 규정하거나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아끼고 치유해 주시면서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연합교회는 다양한 민족 배경과 문화를 갖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신앙공동체를 이룹니다.  다양한 경험과 생각,  목회를 위해 서로 다른 소중한 선물들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각기 다른 문화, 경험, 생각들일지라도 모두 귀하고 전체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것들이지요.

다양한 문화를 가진 교회공동체 상호간의 목회를 아름답게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현실과  긴장 관계를 심각하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건물주인 교회와 세를 든 교회사이에서 보여지는 태도차이와 구분;
  • 여러 직책을 갖고 힘과 경험이 많다고 생각하는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사이의 차별취급;
  • 교인수가 많은 교회와 적은 교회와의 관계에서 관점의 차이에 다른 무게를 두려는 경향;
  • 이곳에 정착한지 오래된 교회와 이민역사가 길지 않은 교회사이의 텃세행사;
  • 배타적인 경향을 보이는 교회와 모두를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진 교회와의 갈등.

우리 모두는 여러가지 다른점들과 배경을 갖고 있지만, 서로 존중하고, 겸손하며, 신뢰와 공평성을 실천해야합니다.  모든 것을 서로 나누는 관계가  되도록 함께 의지를 갖고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항상 열린 자세를 갖고 살아야합니다. 서로의 다양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된 선물로 함께 축하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지체를 갖고 있지만 한 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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