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다섯번째 주일 / 9월 다섯번째 주일
창조절,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와 교회
룻기(Ruth) 1:1-7, 마태복음(Matthew) 6:25-33
김혜란 목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걱정하지 말아야할까요?
알파한인연합교회 성도여러분, 먹을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습니까?
세계 절반에 가까운 30억 인구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다고 합니다. 유네스코 통계에 따르면, 22000명 아이들이 기아로 매일 사망한다고 합니다.
정말 걱정하지 말아야할까요? 아니 먹을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을까요?
제가 지난 6월까지 근무했던 사스카툰 세인트앤드류스 신학대학원은 사스카추완주립대학 내 속해있습니다. 그 곳에서 제 남편 데이빗 목사는 대학 교목으로 근무를 합니다. 지난해 처음으로 교목실 주관 좋은 아침식사, Good Breakfast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시작된 경위는 바로 많은 학생들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으니까 식사제공하는 프로그램을 해달라는 대학원 학생회 요청이었습니다. 데이빗목사님은 교목실을 지원하고 있는, 장로회, 연합교회, 그리고 성공회 교회들에게 연락을 했고, 1교회가 1번씩 간단한 아침식사를 제공해주기로 하면서 시작했습니다. 10명 정도로 시작한 아침식사 교목실 프로그램은 1주에 한번에서 2번으로, 10명이 20명, 20명이 40명, 그리고 40명이 60명으로 1년 사이에 증가했습니다. 정말로 많은 대학생들이 굶고 살고 있었습니다. 배고파서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배고프고 외로와서 온 친구들도 많이 있었고, 육적으로 영적으로 둘 다 배고파서 온 학생들도 있었습니다.심지어 그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학생들이 일년에 몇 명이고, 그 자살한 학생의 친구들이 많이 이 프로그램을 찾았습니다.
이런 힘들고 고통스런 상황에서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나무에서 먹거리가 떨어지기만을 누워서 기다리라는 뜻일까요? 아니면, 당신을 믿으면 영적으로 충만하니 육적인 배고픔은 중요하지 않으니 무시하라는 뜻일까요?
만약, 32절에서 오늘 본문을 끊는다면, 근심걱정 내려놓고 무조건 행복하라는 뜻, don’t worry and be happy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핵심은 그 다음구절 33절에 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우리가 잘 알고 불렀던 찬송가 노래 가사가 그 단서입니다. 아쉽게도, 교회력 절기를 따른 성서구절은 34절까지 있는데, 저는 오늘 그 구절을 일부러 생략했습니다. 내일 걱정을 내일로 미루라는 뜻은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33절에 모순처럼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6장 에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하는 주의 기도가 들어가 있다는 점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주의 기도 안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오늘 이 땅에 오게 해달라는 염원도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오늘 말씀과, 주의기도에 들어가 있는 일용할 양식을 주심은 그러므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그 나라가 무엇입니까? 그 나라가 어디있습니까? 어떤 여권이 있어야 거기 갈 수 있습니까? 헬라어로 그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바실레이아입니다. 그리고 그 바실레이아의 영어해석은 Kingdom, or Reign입니다.
바실레이아는 복음서에 많이 등장합니다. 몇 번 등장할까요? (질문)
100번이 넘게 예수님은 바실레이아를 언급하셨고, 당신이 하신 비유는 거의 다 하나님 나라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즉, 바실래이아가 예수님의 제일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언급한 이 바실레이아가 우리에게 잘 와닻지 않습니다. 완벽한 해석이 어렵고, 그 의미는 더욱 어렵습니다. 예수님 당신도 그래서 비유로 예화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겨자씨, 어린아이, 효모, 소금과 빛, 잃어버린 동전, 돌아온 탕자, 등등.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Inclusive Bible 영어 가장 최근에 번역된 성서는 바실레이아를 kindom kinship으로 번역했습니다. 많은 여성신학자들과 원주민 학자들이 이 용어를 몇 십년 전부터 주장했는데, 그 나라는 비자가 있어야 가는 나라나 하나의 정치체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온전하고 평화와 존중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관계가 바로 하나님 나라운동이라는 것입니다. 고착화된 왕국, 통치체제가 아니라, 여권이 있어야 가는 나라가 아니라, 정의, 평등, 사랑과 돌봄으로 맺어진 관계, 그 관계가 지속되도록 하는 과정이자 운동이 바로 바실레이아의 의미를 살리면서 저는 오늘 바실레이아, 그 kindom를 홈으로 생각하고 말씀을 묵사해보고자 합니다.
홈은 한글로 집, 한자로 가입니다. 가족, 가정에서 쓰이는 그 가의 어원이 흥미롭습니다. 아시다시피 많은 한자들이 상형문자입니다. 집을 가리키는 가역시 상형문자인데, 그 글자는 지붕과 돼지, 지붕 밑에 돼지가 사는 광경을 묘사합니다. 왜 사람이 아니고 돼지를 넣었을까요?
농촌에서 살았던 우리 한국, 중국, 아시아 조상들과 유럽조상들은 추운 집에 온기를 더해주고, 무엇보다, 위험한 동물, 독이 든 뱀과 곤충들이 돼지가 품어대는 냄새를 싫어하기에 사람들 사는 집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한 지붕밑에 기거했다고 합니다.
인간중심, 인간우월주의가 아니라, 동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과 공존하고 의존하는 관계적 삶, 그것이 바로 집이라는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냄새는 조금 나지만, 돼지와 사람, 인간과 동물, 둘 다에게 혜택이 되는 그 관계중심적 삶, 그것이 바로 바실래이아,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 나라가 아닐까요? 그 나라가 임하게 해달라고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라고,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예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런 관계적 의미로 바실래이아는 집이고, 그런 점에서 교회도 집입니다. 교회는 빌딩이 아니라 바로 공의로 이어진 소위 냄새나는 관계, 끈끈한 정이 흐르는 관계를 만들면서 사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로서 우리가 꿈꾸고 살아야 하는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말씀을 드려도 될까요? 제게 캐나다 홈은 바로 토론토입니다. 토론토대학 임마누엘에서 박사학위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토론토대학 임마누엘 교수 부임은 확실히 홈커밍입니다. 제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긴 했는데, 토론토가 바실래이아가 되도록, 냄새나는 끈적한 집이 되려면 좀 해야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거의 11년만에 돌아온 집인데, 그동안 토론토는 너무 많이 변해서 낯설기 그지 없습니다. 아직 영구적으로 살 집도 없습니다. 아직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홈리스를 경험하면서 사스카추완 좋은 아침 프로그램을 찾아오는 학생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이들 학생들처럼 토론토에 있는 많은 대학에 다니는 이들 중 육적으로 영적으로 배고픈 학생들이 많이 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알파한인연합교회 여러분,
여러분모두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집을 떠나와 홈리스같은 경험을 해 보셨지요? 그 홈이 고향이던, 정든 가족이던, 아니면, 그리운 고국, 익숙한 언어와 문화, 또는 친척, 친구, 그 친숙한 관계, 그 집을 떠나는 일은, 그 이주의 여정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감사하게도 성서에는 그런 이주자들 투성입니다. 창세기 아담, 이브로 시작해서 아브라함, 사라, 하갈, 모세, 미리암, 그리고 예수님, 부모님, 마리아, 요셉, 많은 제자들, 그리고, 사도바울과 초대교회지도자들 대부분 집을 떠났습니다. 여러분과 저처럼 그들 모두 엄청 고생했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 관계, 바실래이아를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기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집을 떠나 새로 정착한 그 곳이 어디이건 그 곳을 다시 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성서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혹시 떠난 집으로 다시 귀국한 성서의 인물을 기억하시나요? 집을 떠나는 것도 어렵지만 그 집에 돌아오는 결정도 그 여정도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다들 해 보셨지요.
제가 10년만에 토론토에 다시 살기 위해 돌아와서 느끼는 이 낯섬, 외로움, 무언가 소속되지 않는 그 경험, 여러분들도 한국에 돌아가 보셨을 때 경험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Home에 왔는데, homeless가 된 거같은 느낌을 가질 때,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이를 위해 성서안 룻기로 돌아가서 나오미를 봅시다. 왜냐하면 바로 나오미가 바로 집을 떠났고 또 집으로 귀향한 거의 유일무이한 성서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나오미 고향이 어디입니까? 베들렘헴입니다. 베들레헴이 히브리어로 무슨 뜻입니까? 양식의 집, house of bread라는 뜻입니다. 즉,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않아도 되는 곳이 베들레헴입니다. 그런데, 그 양식이 풍족해야 할 그 곳에 기근이 듭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먹을 것을 찾아,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면서 나오미 가족은 모압으로 떠납니다. 거기서 장성한 두 아들이 결혼을 합니다. 나오미는 오르바와 룻이라는 며느리를 봅니다. 손주를 볼 꿈을 꾸면서 10년을 삽니다. 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또다른 관계, 바실래이아를 이루고자 애씁니다.
그 10년 동안 가족들이 번성하는 은혜를 경험하지만 동시에 남편과 아들들을 잃어버리는 고통도 경험합니다. 상실의 고통속에 homeless 를 경험합니다. 결국 나오미는 베들레헴 귀국을 결심합니다. 10년 전 떠난 그 곳에서 돌아오는 길이 낯설고 두렵지만, 아무 대안도 없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그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그 이유 가운데는 바로 이방여인 모압 며느리 룻이 함께 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그 며느리와 가족으로서 끈끈한 정으로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 양식의 집 낯선 고향에 돌아와서, 존중과 돌봄의 관계로 룻과 함께 새 보금자리를 꾸립니다. 자신보다 룻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그 며느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돌봅니다.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이방족 모압며느리를 두었기에, 같은 종족, 친구, 친척에게 손가락짓을 당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며느리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대 여인으로서 의존해야하는 남편과 아들들을 잃었기에, 이스라엘에서 가장 천대받는 과부가 되었지만, 그래서 스스로 저주받은 쓴 마라의 여인으로 스스로 자청하지만, 양식의 집, 베들레헴 옛 집에서 새멤버가 된 룻과 함께 바실래이아 새롭게 하나님의 집을 만들면서 살아갑니다. 룻과나오미의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지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걱정하지 말아야할까요?
알파한인연합교회 성도여러분,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 걱정하면서 살아가야합니다. 다만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걱정으로 인해 지붕밑에 돼지와 함께 삶을 꾸렸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기억하면서 우리, 이웃과 심지어 동물까지 돌보는 걱정을 하면서 상호의존적 냄새를 풍기는 베들레헴, 양식의 집을 만들어 갑시다.
그래서, 외로워 자살하는 대학생이 없도록 좋은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목회도 하고,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베들레헴, 양식의 집이 되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바실래이아의 하나님의 집, 냄새나는 집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관계로 이어지도록 합시다. 그 양식의 집에 과부가 된 나오미가 돌아오고, 이방여인 룻도 존중받는 가족멤버가 되는 끈끈한 정이 넘치는 바실래이아 하나님의 집을 만드는 데, 그 나라를 구하기에 힘쓰는 알파한인연합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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