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열번째 주일/ 8월 첫번째 주일
부요한 삶 1
마태복음 18:1-9, 요한계시록 21:1-5
신태성 목사
여러분은 왜 이민을 오기로 결정하셨나요? 뭐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학업을 위해, 사업 때문에, 자녀 교육을 위해, 정치적 환경 때문에, 은퇴 후 새로운 도전을 위해… 그러나 이유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았을 거예요. 뭡니까?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보다 더 부요한 삶을 살기 위해. 이민을 선택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이 원하시는 만큼 부요한 삶을 살고 계신가요? 아니라면, 여러분 오늘 정말 예배 잘 오셨습니다. 앞으로 몇주 동안 우리는 부요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방식을 함께 나눌려고 합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를 포함해서, 세상 사람들이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인 방식이던) 추구하는 것 중에 하나가 부요한 삶이라면, 우리는 부요한 삶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God’s Answer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부요해 질 수 있을까요? 부요한 삶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한다면, 그래서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요해 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길 바라실까요? 그 첫번째 대답은 이것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아지기
네, 어린 아이와 같아지는 것이야 말로, 가장 부요하게 사는 것이라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냐고요? 저는 그것에 대한 답변을 질문을 통해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장소가 있다면 어디일까요? 부요한 나라하면, 캐나다도 있고, 미국도 있고, 사우디 아라비아도 있지만,… 나라 말고 어떤 장소…. 그곳에 있으면, 누구라도 부요해질 수 있는 곳이 있는데,… 어디 일까요? 아직 잘 모르시겠다면, 제가 tip (힌트)를 드려볼께요.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21장 3-4절에 나오는 말씀은 장례식에서도 종종 인용되기도 하는데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장소가 있다면 어디일까요? 네 바로 천국….
천국하면 이땅에는 존재하지 않고, 죽어야만 가는 곳 같으니까 저는 예수님의 방식 때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칭하겠습니다. 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가장 완전하고, 온전하고, 풍요로운 곳, 바로 하나님의 나라야 말로 가장 부요한 장소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족함 없이 허락받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부요한 장소요, 공간이라고 할 때, 어린 아이와 같아지는 것이야 말로, 진실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마태복음 18장 2-3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아니 온 우주보다 더 부요한 곳이라고 할 때, 만약 우리가 부요한 삶을 원한다면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Myths
먼저, 확실하게 해둘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하셨지, “어린 아이”가 되라고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젊었을때는 하루 빨리 어른이 되길 원하고, 나이가 들면 젊어지기 (어려지길)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에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신체적, 물리적인, 시간적인 나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영적인 Metaphor (비유)에 가깝습니다.
얼마전에 저희 교회에서 목회자 컨퍼런스를 했습니다. 대부분 참가자들이 미국에서 왔는데, 어떤 분들은 10년만에, 어떤 분들은 30년만에 뵙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얼굴이 하나도 안바뀌었네요”라고 하셨습니다. ‘과거에도 늙어있었고, 지금도 늙어있다’는 뜻으로 들어야 하는지 몰라서 고민을 좀 했습니다.
철없는 젊은 사람한테 “너는 언제 어른될래”라고 하는데, 그럼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은 나쁜 것인가요? 아니요. 예수님은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는 길이고, 그렇게 될때, 비로소 우리가 부요하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Biblical statement
그렇다면 “어린 아이와 같아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구체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아진다는 것”은 일종의 영적 비유로 세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향한) 순수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 (who is wholly trust in)”이 된다는 것이고 , 두번째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고, 세번째는 자신이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첫번째 “어린 아이와 같아진다”는 것은 “(주님을 향한) 순수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 (who is wholly trust in)”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우리가 배울점이 있다면, 순수하다는 점일 것입니다. 뭘 잘 몰라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필요해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아이들은 부모의 말이나 약속을 신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가치관, 생활관, 심지어 신앙관에 지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어른이 되면,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 존재가 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세상에 믿을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 세계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부모도, 자녀도, 정치인도, 이웃도, 심지어 배우자도 믿어서는 안된다고 은연중 배우고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신뢰야 말로 모든 관계에 있어 가장 기초라는 것을요.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부요한 장소요, 공간이요, 원천이라면, 즉 우리가 부요하게 되는 통로라면 그러한 나라의 시작이요 마지막인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없이,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 신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관계의 기초가 신뢰인데…. 즉 신뢰 없이 진정한 관계가 맺어질 수 없는데… 신뢰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를 위해 뭐 굳이 철학적, 사회과학적인 정의들을 논할 필요가 있을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어떤이가 있다고 할 때, 그가 선한 사람이고, 나에게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고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 아닙니까? 그게 신뢰 아닙니까? 만약 나를 100% 만족시켜줄 수 있어야 신뢰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분들은 아직 내적으로 미숙한 상태에 있거나, 마음에 병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그런 존재가 아니기에 그런 존재가 없을수 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저 어떤 이가 선한 의도만을 가지고 있고, 속이지 않고, 해치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어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신뢰가 그런 것이라면, 왜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먼저 세상에 오시고,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던 주님을 왜 마음과 행동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분이 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그분이 여러분에게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을 해친적이 있으셨습니까? 그분이 우리가 필요한 것을 때를 따라 허락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에게 주님을 신뢰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줄 믿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되는 것이 부요한 삶의 통로가 된다고 할 때, 전적으로 예수를 신뢰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잠언 3장 5-6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여호와를 신뢰하고,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오늘도 가슴이 답답하고, 불안하십니까? 부족한 것도 없는데, 마음이, 삶이 빈곤하십니까? 같이 따라해 볼까요? “괜찮아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되겠지유”
이 말이 바보 같이 들릴지 몰라도, 이거야 말로 참된 신뢰 아닐까요?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의 기대나 계획과 일치하지 않을지언정, 그분이 언제 여러분을 버리신적 있었습니까? 속인적 있었습니까? 해친적이 있었습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실때 언제나 선한 것을 더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사랑하는 알파 교회 성도 여러분! 어린 아이와 같이 삽시다.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심지어 우리의 바램과 상관없이, 주님을 향한 순전한 신뢰를 가진 사람으로 삽시다. 주님은 신뢰받기에 충분한 분이실 뿐만 아니라 신뢰 가운데 역사하는 분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어린 아이와 같아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 (who is humble)”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마태복음 18장 3절과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주님은 분명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만이 가장 부요한 장소요 원천인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고, 이는 곧 겸손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이라고 할 때, 주목해야 할 것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겸손의 대상이고, 또 하나는 겸손의 의미입니다. 겸손이라고 할 때, 그것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tapeinōseōs 겸손이라고 할 때, 그것의 참된 의미는 단순히 자기를 낮추는 거나 비하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 나보다 더 크고, 높고, 맞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18세기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오늘날 기독교 영성가들의 입문서와 같은 “거룩한 삶에 대한 진실한 부르심” 저자이며, 캠브리지 대학의 지도자이기도 했던 윌리엄 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이 충분히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바로 자신이 가장 교만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가장 확실한 신호다 (You can have no greater sign of confirmed pride than when you think you are humble enough). – William Law
우리가 사극을 보면 얼마나 예의 바르고, 겸손합니까? 특히 궁중 사람들의 어투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렇던가요?
겸손은 단순히 남 앞에서 자기를 비하하거나 낮추는 어떤 행동이나 어투 이상을 뜻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상태와 관련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뜻합니다. 어떤 자세 말입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언제나 나보다 크시고, 높으시고, 옳습니다” 하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믿음과 겸손과 순종이 언제나 마치 하나의 단어처럼 쓰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광야로 떠날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그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더 좋아보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 그의 종교적 확신이나 성취 때문이 아니라, 그가 겸손의 사람, 즉 “언제나 하나님이 나보다 크시고, 높으시고, 옳다고 믿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80세가 되어서 부르심을 받고,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수 있었던 이유도, 특히 언제나 흔들리고 불순종을 반복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이끌수 있었던 이유도, 그가 겸손의 사람, 즉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보다 크시고, 높으시고, 옳다고 믿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 사역을 시작했을때, 많은 사람들의 의심과 죽음의 위협, 훗날에는 감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그가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단순히 종교적 열정에 이끌려서나, 과거의 과오와 오류를 반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겸손의 사람, 즉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보다 크시고, 높으시고, 옳다고 믿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아진다는 말은 이런 겸손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보다, 더 크고, 높고, 옳으시기에 그분에게 배우고, 그분을 따르고, 어떤 때는 상황이나 결과에 상관없이 하라고 하신 것을 계속해서 수행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예배의 사람,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 섬김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면, 나의 기분과 바램, 그리고 상황과 상관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바보여서도 아니고, 생각이 없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나보다 언제나 더 크시고, 높으시고, 옳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눈과 귀, 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찌 생각이 없고, 느낌이 없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 (적어도 100번 넘게) 약속하셨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시편 22:2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잠언 3:34은 말씀합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먹이시고 배부르게 하신 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약속이 주어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됩시다.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잘못된 선택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어린 아이와 같아진다”는 것은 “자신이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 (who is aware of one’s vulnerability)”이 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 흥미로운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두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영접 즉 웰컴하라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를 원하시는 타인 혹은 자신이 stumble 즉 실족하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5-8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cause to stumble)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cause to stumble)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질문!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면서, 실족하게 되거나, 실족시키는 것에 대해 언급하셨을까요? 네 우리 모두 깨어지기 쉽기 때문에, 무너지기 쉽기 때문에, 과거에 했던 실패와 잘못을 반복하기 쉽기 때문에.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사람은 이 사실을 잘 안다는 거예요.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경영과 리더십 디렉터로 일하고 있는 리아 탐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경영이든, 사업이든, 인간 관계든, 부모가 되는 것, 심지어 개인의 변화 모두 같은 곳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바로 Self-awareness 즉 자기 인식 말이다.”
그렇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되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포함합니다. 어떤 인식 말입니까? 우리 모두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인식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인식이 반드시 나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지혜를 향한 여정”이라는 책의 저자인 니콜라스 하만의 말을 들어봅시다.
“깨어지기 쉽다는 것 (brokeness) 이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실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대부분은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외면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좀먹게 하고, 급기야 자기를 증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반면, ‘자신이 깨어지기 쉽다’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받아들일때야 비로소 우리는 참된 인간의 특징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치유와 회복의 과정에 초대받게 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내가 구태여 더 자랑을 해야 한다면 내 약한 점을 자랑하겠습니다. . . . 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그 가시도 모욕도 고통도 박해도 어려움도 온전히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무력해질수록 나는 그만큼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Conclusion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알파 교회 성도 여러분! 부요한 삶이 되길 원하십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 되라!”
단순히 머리로만이 아니라, 진실로 중심의 상태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 어떤 사람 말입니까? “(주님을 향한) 순수한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 마지막으로 자신이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기를 우리 모두 사모하도록 합시다.
특별히 우리 교회가 어린 아이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환대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행여나 어린 아이와 같아지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는 않는지, 나 자신의 어떤 것들이 어린 아이와 같아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지를 깨달아, 과감히 그것들을 버림으로 참으로 부요한 삶을 살게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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