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선한 목자

부활절  네번째 주일 / 4월 네번째 주일
시편 23:1-6, 요한복음서 10:11-18
부활절, 선한 목자
정해빈 목사

 

40년 이상 이집트, 레바논, 예루살렘 등에서 실제로 거주하며 중동지방의 삶과 문화를 연구한 케네스 베일리는 [선한 목자, The Good Shepherd] 라는 책에서 중동지방에서의 목자와 양의 관계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중동지방에서 양은 귀한 재산이었습니다. 털은 옷으로 사용되었고 고기는 식량과 제사로 사용되었고 배설물은 연료로 사용되었기에 버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은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동물이었습니다. 겁은 많고 앞은 잘 안보이고 대신 청력은 발달했기 때문에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서 도망가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며 움직이지 않습니다. 양은 길을 잃어버리면 덤불 속이나 바위 밑에 숨어서 살려달라는 소리를 냅니다. 또 양은 아무리 얕은 물가라 하더라도 흐르는 물을 두려워해서 빠르게 흐르는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개들은 훈련을 시키면 앉거나 눕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은 불안하면 누워 있지 않습니다. 배가 부르거나 갈증이 해결되거나 우리 안에 안전하게 있을 때만 자리에 누워 있습니다. 이렇게 양은 겁이 많고 아무런 방어수단이 없습니다. 걸음이 빠르지도 않고 염소처럼 뿔도 크지 않기 때문에 다른 맹수의 먹이감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목자가 항상 양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양은 청력이 발달했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하루 일과를 마친 목자들은 돌담으로 둘러쌓인 큰 공동 담장에 양들을 집어넣고 문 앞에서 양을 지킵니다. 다음날 목자들이 나타나 양을 부르면 양들은 자신들의 목자의 음성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목자는 한 손에는 막대기를 들고 또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양을 보호하고 인도합니다. 막대기는 짧고 단단하고 지팡이는 길고 끝이 갈고리처럼 굽어 있습니다. 막대기는 맹수를 막는 무기로 사용하고 긴 지팡이는 양들을 안내하거나 구조하는데 사용합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시편 23편은 선한 목자되시는 하나님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처럼 강하게 막대기와 지팡이로 맹수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시고 때로는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나를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시고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나를 위해 풍성한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주님은 나를 해치는 원수에게는 강하게 대하시고 나에게는 부드럽게 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존중하시고 나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것은 주님이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시인은 주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신다”고 번역했습니다. 주님은 지치고 탈진한 우리의 영혼을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지쳐있는 양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작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해 “돌봄 탈진”(caregiver burnout)을 경험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집 안에만 있어야 하는 어린 자녀들을 돌봐야 하는 학부모들과 연약한 가족/부모님을 돌봐야 하는 식구들과 요양원/병원에서 장기간 환자들을 돌봐야 하는 의료 종사자들은 돌봄이 계속됨에 따라 탈진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고 다시 새 힘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편 시인은 주님께서 모든 고난과 시련을 막아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기적을 일으켜 주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시인은 우리가 지치지 않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언제나 선하시고 인자하신 주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품삯을 받는 목자는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양들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양들을 위험하게 만들기도 하고 양들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도 못합니다. 삯꾼 목자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양을 보호하지 않으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제사장 같은 사람들이 삯군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뿐만 아니라 선한 목자는 아직 울타리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양들을 기억합니다. 요한복음이 쓰여질 당시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는 양들”은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방인들을 가리켰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말한다면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양들”은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는 분들,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은 주님을 목자로 고백하는 우리들 뿐만 아니라 아직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 공동체와 떨어져서 홀로 외롭게 사는 이들을 기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이 내가 양들을 알고 양들이 나를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 사이에 삼위일체(三位一體), 일심동체(一心同體) 친밀한 관계가 맺어진 것처럼, 주님과 양들 사이에도 완전하고 친밀한 관계가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목자이고 우리가 양이라고 말하면 사람이 만물의 영장인데 왜 사람이 양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킬만큼 똑똑하고 지혜롭습니다. 인류가 맹수들과 싸워서 살아남은 것도 인류가 힘은 약하지만 지혜롭고 협동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고 지혜롭지 못합니다. 양이 시력이 좋지 않은 것처럼, 사람도 영적인 시력이 좋지 않아서 미래를 알지 못하고 잘못된 길을 걸어가기도 합니다. 사람이 한편으로는 만물의 영장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2세기와 3세기 로마제국의 박해를 피해서 지하 무덤 속으로 숨었습니다. 그들이 생활했던 지하 묘지를 카타콤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만들어졌고 지금도 남아있는 [산칼리스토 카타콤](Catacombe di San Callisto)에 가보면 젊은 선한 목자가 길 잃은 양을 찾아서 어깨에 메고 나오는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목자는 왼손으로 양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우유통을 들고 있습니다. 이 우유통은 어린 양에게 먹일 양식입니다. 또다른 카타콤에 있는 그림을 보면 선한 목자 주변에 동물들이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고백했습니다. 선한 목자가 기독교 신앙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상징은 바뀌었습니다. 하늘의 심판자, 최후의 심판자, 질투하는 하나님, 진멸하는 하나님, 천군천사를 거느린 군주, 십자군 대장,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어린양 등의 상징이 선한 목자를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는 하나님을 가부장적이고 무섭고 심판하는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23편과 요한복음 10장은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잃어버린 양을 되찾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이심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는 지금도 부활하셔서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요즘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많은 수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금 힘들어하고 지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의 고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단 한순간도 양들을 잊지 않으시고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주님, 짧은 막대기와 긴 지팡이로 양들을 보호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지금의 고난을 견디고 마음의 평안을 얻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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