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부활절 두번째 주일 / 4월 네번째 주일
부활절,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요한복음서 20:19-23, 사도행전 5:27-32
정해빈목사

 

지난 주일부터 부활절 절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체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의 잘못된 권세자들에 의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부활하셔서 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러한 강렬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생겨났고 기독교 신앙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부활체험이 없었더라면 예수님 사건은 그동안 역사에 많이 나타났던 의인의 죽음 중의 하나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경은 기독교인들이 쓴 책이니까 부활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외에 부활에 대해서 쓴 기록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외에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부활에 대해서 쓴 기록들이 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 그를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그에 대한 애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인이라는 종족은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직접적으로 부활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또한 2세기 초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예수가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이 미신은 잠깐 동안 억눌려 있었지만 나중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미신은 유대 지역 뿐만 아니라 세상의 온갖 끔찍하고 부끄러운 것들이 모이고 유행하는 로마에까지 번져 나갔다.”

유세푸스와 마찬가지로 타키투스도 예수의 죽음 이후 이 신앙/미신이 로마에까지 번져 갔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보통 아무리 위대한 스승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스승이 죽으면 제자들이 흩어지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스승의 영향력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 강하게 세상으로 퍼져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무언가 강렬한 신앙체험이 있지 않고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실 때 도망갔던 제자들이 부활을 체험하고 나서는 순교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강렬한 부활체험이 그들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주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뜨거운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합니다. 뜨거운 사랑이 죽음을 넘어서 계속 역사합니다. 뜨거운 사랑이 부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뜨겁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죽었지만 그 사람이 꿈에도 나타날 수 있고 환상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 중에는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죽었지만 그들이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계속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 나타나셨습니다. 한 명에게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부활신앙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는 것을 제자들이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부활의 첫열매로서 테이프를 끊었기 때문에 우리들도 주님을 따라서 부활할 것을 제자들은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세상이 무서워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인사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무서워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였으니 세상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두번째로 “성령을 받아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헬라어 말은 성찬식 할 때 “이 빵은 나의 몸이니 받아먹어라“ 할 때의 “먹어라” 와 같은 단어입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은 나의 몸을 받아먹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받아먹으라는 말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내 몸 안으로 모시라는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 죽게 된 사람이 건강한 사람의 심장을 이식받으면 그 사람은 다시 살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몸 안에 건강한 사람의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라, 나를 받아먹어라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심장이 내 몸 안에서 뛰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죽어가는 나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내 힘만으로는 이 거친 세상을 살기가 힘들지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으므로 나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 안에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세번째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라는 말씀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을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품어주고 치료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부활 백성이 이 세상을 위로하고 용서하면 이 세상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만이 이 세상을 용서하고 치료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의 죄를 씻겨주고 용서해 주면 이 세상은 변화될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부활 백성에게 달려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3가지의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로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둘째로 삶에 대한 공허함과 무의미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셋째로 죄책감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겉으로는 잘 사는 것 같으면서도 왜 많은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며 사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것이 죽음입니다. 생명을 위협당하면 사람은 제일 큰 불안을 느낍니다. 또 내가 시간이 갈수록 늙어간다는 것을 깨달을 때 사람은 불안을 느낍니다. 죽음과 연약함에서 오는 불안이 첫번째 불안입니다. 그 다음으로 삶에 대한 의욕이 없고 삶이 지루하다고 느낄 때, 내 삶이 가치가 없다고 느낄 때, 사람은 불안을 느낍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불안을 느낍니다. 폴 틸리히는 바로 이 3가지의 불안에서 해방되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요 복음이요 부활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점점 늙어가고 죽음을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무의미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은 세상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죄책감과 후회와 양심의 가책 때문에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씻어주시고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오. 나의 심장을 가슴에 품고 세상에 나아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탄의 권세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십시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000년 전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물리쳤던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의 심장을 가슴에 품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했던 것처럼, 제자들이 과거의 죄책감에서 벗어나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죽음과 무의미와 죄책감으로 인해 불안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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