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앞에서, 빛과 더불어, 빛처럼! / 유상진 목사

주현절여섯번째주일/ 2월 두번째주일
빛 앞에서, 빛과 더불어, 빛처럼!
마가복음 9:2-9, 열왕기하 2:1-12, 고린도후서 4:3-6
유상진 목사

구약성서 “열왕기하 2장 1~12절”
시가서 “시편 50편 1~6절”
서신서 “고린도후서 4장 3~6절”
복음서 “마가복음 9장 2~9절”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들이 문득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시어,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떤 아이가 하늘을 향해 공을 던집니다. 그 아이가 제아무리 힘껏 공을 던져도 그 공은 다시 땅에
떨어지게 마련이지요. 공이 이렇게 슈-웅 하늘을 향해 오르다가 어떤 지점에 가면, 지구의 중력에 못
이겨서 떨어집니다. 요 때 그려지는 라인을 포물선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왜, 이 포물선 얘기를 하느냐?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성서 복음서의 구조가 요 포물선의 생김새하고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시고 하면서, 그 대중적인 인기가 점점 더

2

높아집니다. 그러다가 이 포물선의 꼭지점에서 점점 하향곡선을 그립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예수님의 세 차례 수난 예고, 적대자들의 도발, 예루살렘에서의 갈등, 그리고 체포와 고문, 십자가까지
그야말로 하향곡선을 긋습니다. 여러분, 포물선의 맨 꼭지점에 해당하는 복음서의 이야기가 뭘까요? 예,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다 외울 수 있는 말씀이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복음서의 최정점, 포물선의 맨 꼭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태는
전체 28장인데 이 베드로의 고백이 16장에 기록되어 있고요, 누가는 전체 24장에서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전체 16장에서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
베드로의 고백이 각 복음서에서 어디 위치하는지 대충 가늠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예수님 공생애의 가장 호시절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신약성서 본문의 말씀도 이
포물선의 가장 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직후에 나옵니다. 이름하여 변화산
사건입니다. 제가 보기에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에게 가장 절정의 사건이라면, 오늘 본문의 변화산
이야기는 제자들에게 가장 절정인 사건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읽었듯이 지금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신도 모를 지경에 있습니다. 정신이 까마득해지고 헛소리를 하는 거지요. 뭐,
베드로뿐이겠습니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도 자신의 생을 통틀어서 가장 황홀한
체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은 주현절 여섯째 주일입니다. 오늘이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현현을 기념하는 절기이지요. 보통 주현 절기를 “빛의 축제 절기”라고도 부르는데, 어두운 세상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나타나셨다는 의미입니다.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주현절의 마지막
주일에 세계 교회는 오늘의 말씀을 복음서 성서일과로 고정해 놓은 겁니다. 3년 단위로 바뀌는
성서일과의 복음서를 마태-마가-누가의 순서로 오늘의 변화산 이야기를 지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주현절 마지막 주일인 오늘을 오래전부터 “예수변모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모하신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거지요. 그러나 어쨌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누굴까요? 누가 뭐래도 제자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제자들의 입장에서 한번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서 따르던 스승 예수님께서 불과 엿새 전에는 고난이니, 십자가니, 죽음이니 하는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이른바 1차 수난 예고입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떡하나 한참 걱정되고,
그 때문에 잔뜩 정신이 혼란스러워져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들 중에 수제자 격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얘들아, 저쪽 산등성이에 기도하러 가자!” 그러시는 겁니다. 뭐 늘 혼자 동산에
올라 기도하기 좋아하시던 예수님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거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한 겁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갑자기 해 같이
빛나고,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본문 마가복음 9장 2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런데 그 이상한 일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빛나는 예수님의 곁에
모세와 엘리야까지 나타나서 예수님과 환담을 나누는 겁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그 옷이
빛나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는데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존경해 마지않던 율법의 완성자 모세
할아버지와 선지자 중에 가장 으뜸인 엘리야 할아버지와 더불어 환담을 나누고 계신 겁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지,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게 “선생님, 제가 여기 이 산에다가 초막 셋을

3

짓겠습니다.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 할아버지를, 하나에는 엘리야 할아버지를
모시겠습니다.”(막9:5) 그렇게 큰소리를 쳤습니다. 이어지는 6절의 말씀에는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라고 그의 제안을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런 것 말고는
없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쩌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거기 그 자리에 계셨다면요?

“뭐 나는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리 말씀하시면 저도 따로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알파한인연합교회라는 예배 공동체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이 질문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예배의 맨 앞에 고백했듯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더없이 아름다운 시온으로부터 눈부시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햇살처럼 타오르는 불길을 앞세우시고, 사방에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시면서 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종국에는 당신의 백성을 판단하시려고,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을 증인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시50:1-3) 오늘 우리가 이 한낮에 이 부름 앞에 여기 나와 있는 이상,
우리는 이 질문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어쩌시겠어요? 최소한 하나님께서 빛처럼 눈부시게
나타나신다는데, 마치 햇살처럼 나타나신다는데 여러분 어쩌시겠어요? 뭐 오늘 베드로처럼 호기롭게
“제가 집 세 채를 헌납하겠습니다!” 정도는 아니어도 정직하게, 겸허하게 이 빛 앞에 온전히 서 있어야
하지는 않겠습니까? 빛 앞에서요. 그러므로 오늘 변화산의 이야기는 우리 삶의 실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오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먹고, 자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예수님을 빛으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그 시대로부터 천삼백 년 전 출이집트의 지도자 모세와 팔백 년 전의
대선지자 엘리야와도 대면하고 있습니다. 뭐 지금 우리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좀 황당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의 얼굴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래서 액자로 많이
걸어 놓는 은갈색의 긴 머리칼을 가지고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백인 남성의 얼굴 예수님 말고요.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미술이 발달하고, 어떤
역사적 사건을 조명하는 능력이 뛰어난 요즘도 그런데 그 옛날, 이천 년 전의 이 제자들이 그 시대로부터
천삼백 년 전의 모세와 팔백 년 전의 엘리야의 얼굴을 알고 있었을까요? 아마 몰랐을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과 환담을 나누는 일련의 사람들을 정확히 모세와 엘리야로 적시할 수 있습니까?
공관복음서 세 개에 다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거 뭐 좀 신화 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베드로가 이 변화산의 사건을 체험한 지 언 30년이 지나서, 임종을 가까이 두고 그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마지막 힘을 다해서 쓰는 편지를 읽어 보면, 꾸며낸 신화 같지는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제가 천천히 읽겠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언제든지 여러분이 이런 일들을
기억할 수 있게 하려고 힘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드린 것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위엄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더없이 영광스러운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 하실 때에, 우리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
우리는 이 말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벧후1:15~19 축약) 아마도 수없이 많은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그의 믿음을 지켰던 이 신앙의

4

노장이 남기는 마지막 유언이 이러할진대 여러분 더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야고보도 그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곧 빛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빛을 지으신
아버지께서는 이러저러한 변함이나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십니다.”(약1:16-17)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변화산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던 요한도 예수님을 빛으로 증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요1:9-10a)

상황이 이러하니, 참 난감하기도 합니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로서는 오늘
변화산의 이야기를 믿어야 하고, 믿자니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되니 이걸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여러분
오늘 임영란집사님께서 한 절 한 절 또박또박 낭독하신 변화산의 이야기는 믿음의 차원으로
받아드려져야 할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때, 거기서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체험한 생생한 경험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만약에 그 변화산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그 사람들도 예수님이 빛처럼 빛나고, 그 옛날의 모세 할아버지와 엘리야
할아버지를 목격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요, 저는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오늘 예수님을 빛으로 경험한
요한은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요1:9,10b) 뭐 오늘 변화산의 당사자 말고 다른 사람의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인식했던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장면이 사도행전에 두 번에 걸쳐서 기술되지요. 뭐
대동소이합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강한 빛과 음성으로 바울을 만나 주십니다. 그런데 그때 거기에
바울의 주변에 함께 있었던 여러명의 군인들이 있었잖아요? 그들은 바울이 경험한 그 빛과 음성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 어떤 것 보다 빛나는 빛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천둥 같은 음성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천둥 같은 소리를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오늘 이 변화산의 사건을 생생한 나의 이야기로
체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나와 상관없는 한낱 신화 같은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떤 절대적인 경험, 궁극의 사건은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사진을
찍어서 배포하거나 어떤 공공의 연단에서 사실로 선포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궁극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보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듣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입버릇처럼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시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주 “야 이 겨자씨 좀 보아라! 야, 저 들의 백합화를 보아라! 저
공중의 새 좀 봐라!” 하신 이유가 이 들을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주문하고 계신 겁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빛으로 경험했다는 것은 비로소 오늘 예수님을 통해서 세계와 이
세계에서 진정한 생명으로 산다는 것이 무언지를 발견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을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경험한 겁니다. 그것을 교리적으로 설명한다면 죄와 죽음에 놓여 있던 자신의 존재가 의와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발견한 거지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된 겁니다. 뭐 죄와 죽음이 따로 있나요? 죄와
죽음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찬란한 삶을 실질적으로 파괴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입니다. 그것은 어떤 질병이나 기아와 가난, 폭력과 전쟁 같은 우리의 고단한 현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의 본질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최소한의 필요를 외면하는 부와 권력의 편중, 자신의
소유로서만 자신의 삶을 확인하려 하는 답보된 의식, 그러다 보니 다른 이와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5

덕목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위협하는 맹목의 발전과 끝없는 개발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히고,
인간의 몸과 열정이라는 축복을 성적인 착취로 전락시키는 욕망에 사로잡히고 그 와중에 내가 좀 괜찮은
인간이라는 것을 끝없이 증명해야 하는 모든 삶의 방식들, 그리고 그것들을 질서 없이 부추기는 그
근원적인 인간의 헛헛함! 거기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강렬한 빛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생명을 얻었고, 비록 이 세상에 내 두 발을 딛고 살지만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절대 자유에 기대어 살고, 하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천국의 안식을 이미 누리면서 사는 삶, 마치 내 자신의 실존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삶! 여러분 이보다 강렬한 빛이 어디에 있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이 빛으로 보이는 제자들은
그 옛날의 믿음의 선조들의 삶도 현실로 경험되어 질 수밖 없지요. 오늘 베드로가 “제가 여기에 초막 세
채를 짓겠습니다.”라고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은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그것은 가장 절대적인 것
앞에서 저 지상의 그 어떤 것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빛 경험을 한 사도바울의 고백도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2:20a)
이렇게 그리스도의 빛 앞에 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빛과 더불어 삽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서 빛과
더불어서 모세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출애굽기 34장 35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다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오늘 성서일과의 구약성서에 나오는 엘리야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한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야고보는 아그립바 총독에 의해 참수형을 받고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형 집행 장소까지 걸어가는 야고보의 얼굴이 큰 전쟁에서 이긴 승리자의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요한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전 세대의 수없이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이 빛 앞에서 빛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구수한 미담과 성서의 이야기는 그때 거기서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서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변화산의 이야기는 그때 거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 솔직한 고백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빛처럼 보입니다. 아이고,
무슨 소리 이제 다 늙어갔고, 쭈글쭈글한데 뭐가 빛나는가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요, 저는
여러분들 뵙기에 눈부십니다. 지금 우리가 마주 앉은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아십니까? 지구의 나이가
45억 6,500만 살이라고 합니다. 현대 과학이 그렇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의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우주의 티끌만큼도 안 되는 이 지구 위에 지금 함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저 동방의 한반도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어째 어째 하다보니 이 낯선 캐나다까지 왔고, 또 어째 어째 하다보니 캐나다의
한인 이민자 교회에 와 앉아 있는 거지요. 그 많은 교회들 중에 알파한인연합교회에 지금 함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면, 이 순간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을 나눕니다. 한 번 둘러 보십시오. 여기서 단 한 분이라도
빠졌으면 어떡할 뻔 했습니까? 그리스도의 빛 앞에 나온 지금 여기 우리는 존재만으로도 이미 빛나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빛납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저는 어떠세요? 제가 좀 빛이 나나요? 제가 잘
생겼습니까? 사실 저는 어렸을 때, 제가 잘생긴 줄 알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 곁에 누우면 저의
어머니가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제 눈썹을 만지시면서, “우리 막내이는 눈썹이 예쁘네.”, 또 코를

6

만지시면서 “우리 막내이는 코도 예쁘네.”, 또 입술을 만지시면서, “우리 막내이는 입도 예쁘네.” 그러셨단
말이에요. 뭐 안 이쁜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아주 잘생긴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나니깐, 저 보고 잘생겼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하다못해 저희 집사람이 내가 잘나서 시집왔냐고 물어보면, 불쌍해서 시집왔다 그러고요.
그런데 이제 조금 알겠는 거예요.

지난 주말에 11년 동안 잘 타던 차가 퍼졌습니다. 저희 둘째 딸애가 차를 타고 나갔다가 그만 시동이
꺼져버린 겁니다. 그래서 지난 화요일날 제가 다니는 카센터에 갔습니다. 사장님과 통화하고 카센터
앞에 차를 놓고 열쇠는 문틈으로 던져 놓겠노라고 약속을 했지요. 직장에서 퇴근하자마자 뭐 어렵사리
시동을 걸었습니다. 액셀을 세게 밟으면서 공회전을 한참 했습니다. 그러고 이제 조심조심 차를
몰아갔습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저희 집사람이 다른 차를 몰고 제 차 뒤로 따라왔습니다. 저희
집사람도 운전을 어지간히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운전이 굉장히 서툽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카센터
앞에 문제의 차를 주차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집사람이 타고 온 차를 탔더니, 집사람이 저에게 자랑하는
겁니다. “나 잘 따라 왔지?” 그래서 제가 “응 그래 안 놓치고 잘 따라왔네!”하고 칭찬했지요. 뭐 보통
그렇잖아요? 다른 차들이 끼어들기도 하고, 혹은 신호에 걸리기도 하면서 앞서가는 차를 놓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집사람 하는 말이, “내가 당신 차를 놓칠 수가 없더라. 그냥 유상진 뒷통수에서 막
후광이 반짝반짝 빛나서 눈이 부셔서 놓칠 수가 없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한참을 차 안에서
이야기하면서 그러는 거예요. “나, 지금까지 당신 잘 따라왔지?” 저는 좀 아려서 아무말 못했습니다. 그
말속에 집사람과 함께 산 세월 27년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그 조그만 발로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했다.’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내 눈썹과 눈과 코와 입술을
만지시면서, “예쁘다, 예쁘다.” 하신 우리 어머니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구나! 그때 어머니에게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나였구나! 나 같은 사람도 어느 때, 어디서, 누군가의 빛으로 살 수 있겠다. 지금 내 곁의
한 여자가 나 때문에 자신의 갈 길이 더욱 뚜렷해지는 것처럼, 나도 빛 앞에서, 빛과 더불어, 빛처럼 살 수
있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뭐 저 같은 사람도 그런데요, 여러분은요? 여러분은 이미 어느 때나, 어디서나,
누구나에게 빛으로 살고 계신 분들입니다. 여러분, 이건 빈말이 아닙니다. 지난 1월 28일에 우리 교회의
김순원성도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김순원성도님을 잘 모릅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 급하게
설교를 준비하라는 말씀을 전해 들으면서 이런저런 안부를 묻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그 말씀을
전해 주시던 분이 너무 허전하고, 슬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어떤
분이셨어요?” 예배당에 앉아 있으면 늘 김순원성도님이 하시는 말씀이 귀에 맴돈다는 겁니다. 그 말씀은
늘 “괜찮다! 괜찮다!”였답니다. 항상 성경책을 보시고 계신 분이셨고, 예배전 성경공부에 거의 빠진 적이
없으셨답니다. 언제나 남모르게 친교에 사용하라고 쌈짓돈을 주머니에서 꺼내 주시곤 했답니다.
이런저런 말씀들을 들으면서 저도 가슴이 따뜻해 졌습니다. 김순원성도님에 대해 말씀하시던 그 분의
마지막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나에게서 또 한 분의 신앙 선배님을 그렇게 보내
드렸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김순원성도님은 어느 때, 어디서,
누군가의 빛으로 사시다 가셨구나!’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김순원성도님도 이렇게 빛
앞에서, 빛과 더불어, 빛처럼 살다 가셨습니다. 저는 여기 오늘 그리스도의 빛 앞에 나오신 여러분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로서는 스스로 발광할 능력도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7

여러분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빛 앞에 온전히 서면 다릅니다. 마치 망망대해를 비추는
등대와 같습니다. 등명기의 광원이 켜지면 그 앞에 있는 수천수만의 거울들이 일제히 그 빛을 반사해서
바다를 비추는 것처럼요, 우리는 우리 영혼의 거울을 매일 매일 닦아 두고, 그리스도의 빛 앞에 온전히 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 앞에서, 빛과 더불어, 마침내 빛처럼 우리의 남은 생
동안 이 세상을 비추며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름다운 대열에서 이제 단정히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우리 다시 어깨동무 하십시다. 그 동안 이 지상에서 영원의 한점을 살아온 나의 짧고 알량한
세월이 오직 하나님께로 향해 있었음을 우리 온몸으로 증언하십시다. 저는 오늘 이 예배의 설교자로서
오늘 이 견고한 연대를 다짐하는 여러분에게 성서일과 서신서에 나오는 바울의 편지 한 대목을 읽어
드립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후4:6)

기도하겠습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