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의 갈망 / 유상진 목사

창조절 여섯 번째 주일 / 10월 세 번째 주일
산 자의 갈망
예레미야(Jeremiah) 31:27-34, 디모데후서(2 Timothy) 3:14-4:5, 누가복음(Luke)18:1-8
유상진 목사

 

지난달에 저의 아내가 한국을 다녀왔습니다. 친정 부모님도 뵙고 하느라고, 약 3주 정도 한국을 다녀왔습니다. 아내는 좀 긴장했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저와 식구들을 떠나 본 적이 없어서였습니다. 한국에서 목회할 때, 보통 사모님들이 목사님들보다 더 바쁩니다. 한국의 경우 기본적으로 심방은 남편인 목사를 따라서 무조건 가야하고, 이런저런 여성 성도님들과의 상담이나 관계는 사모님들이 거의 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1년 삼백예순날을 떨어져 있지 않고, 늘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아마도 제가 한국에서 교우들과 어디 단기선교를 다녀온다 해서 5일 정도 집을 비우는 것이 가장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는 것이니 말해서 뭐 합니까? 생각해보면, 그렇게 꼭 붙어서 만 22년을 살았습니다. 어~허. 그러는 와중에 3주 동안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떠나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얼마나 애가 닳고, 얼마나 보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기분이라는 게 이런 정황으로 다 설명할 수 없더라고요. 좀 보고 싶고, ‘밥은 잘 먹고, 잠은 잘 자나?’ 좀 걱정되고, 뭔가 좀 애 닳고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거예요. 서로 간에. 저희 아내가 3주 일정으로 한국을 가고 난 다음에 우리 부부간의 최초의 카톡 대화가 이루어진 것이 2주가 지나서였습니다. 그것이 최초의 연락이었습니다. 저 는 좀 좋더라고요. ‘어떤 해방감 같은 거라고 그래야 되나?’ 아내가 없는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빨래를 하면서도 콧노래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애들 속옷은 살짝 락스에 담궜다가 손으로 비벼서 빨고, 큰 빨래들은 흰 것과 색깔을 따로 해서 뜨거운 물에 담궈 두었다가 발로 밟아서 빨고, 마지막 헹굴 때, 미지근한 물에 다우니 살짝 풀고, 헹구어서 짤순이에서 물을 빼서 널어놓으면, 그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마다 하는 밥은 찰지고, 배추도 한 박스 사서 김치를 담았는데 왜, 그 렇게 또 맛은 좋습니까? 심지어는 화장실 청소가 잘 안되어서 이런저런 털들이 굴러다니는 것도 저는 좋더라고요. 애들한테 “얘들아, 엄마 오시기 전까지 절대 화장실 청소하지 마라. 아빠는 화장실에 앉아서 볼일 볼 때마다 막 털이 굴러다니니깐, 캠 핑장을 온 것 같아서 너무나 기분이 좋다.” 그러면서 애들하고 밥상에서 박수를 치면서,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 면…” 노래도 부르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2주 정도 지나고 있는데 이 알 수 없는 해방감에 금이 가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9월의 마지막 주일이네요.

이른 새벽, 비냄새에 잠이 깨었습니다. 베란다에 나가서 잠깐 비 구경을 하고, 제가 설교자로 참여하는 조그만 인터넷 모임 이 있는데, 그 예배의 설교를 준비하느라고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어저께 끓여 놓은 콩나물국 생각이 나는 겁니다. 쉴까 봐 불을 댕겨놓은 거지요. 그러고 계속 설교 앞부분 몇 줄을 써 내려가는데 창문 틈으로 무슨 담배 냄새가 나는 거예 요. 누가 새벽부터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나 속으로 타박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고독하면 저렇게 새벽 담배를 태울까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계속 설교를 써 내려갔지요. 그리고 그 역한 냄새가 담배 냄새가 아니라, 콩나물국이 완전히 쫄아서 냄비 바닥을 태우고 있는 냄새라는 것을 한참 뒤에 깨달았습니다. 이미 거실은 연기로 꽉 차고, 선풍기를 틀어서 바람을 빼 내고 있으나 너무 더디고, 어저께 빨아서 널어놓은 빨래에도 역한 냄새가 다 베었습니다. 바깥 베란다에 물을 부어 놓은 냄 비도 못쓸지 싶고요. 그냥 뭐 정신이 없더라고요. 그 순간, 저의 아내가 한국에 가고 난 이후에 처음으로 미치도록 보고 싶어 졌습니다. 2주 만에 처음으로 연락을 한 거지요. 카톡 문자를 보냈습니다. “수희야, 보고 싶어 미치겠다.” 정말 저 밑에서부 터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삔또가 안 맞아도 이렇게 안 맞을 수가 있습니까? 제가 초 점, “삔또”라는 비속어를 써서 죄송합니다만 그건 그냥 삔또가 안 맞는 거 였습니다. 아무런 연락이 없던 외국에 있는 아내 에게 2주 만에 이런 문자를 받았다면, 저 같으면, “어어, 고생스럽구나. 문제가 뭐야 말만 해.” 그렇게 당장 전화하거나 할 텐데, 그냥 문자 한 통이 땍 왔어요. 워딩 그대로요, “ㅋㅋㅋ 아-주 흐뭇하군.” 그렇게 딱 왔습니다. 여러분, 22년을 한시도 안 떨어지고 한집에 살면 뭐 합니까? 이렇게 삔또가 안 맞는데요. 내가 진짜 공항에 안 나갈려고 하다가… 뭐 어쩝니까? 그래도 데리고는 와야지요.

제가 지금 왜, 이 삔또 안 맞는 저와 저의 아내 이야기를 하냐면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 복음서의 말씀이 꼭 요렇기 때문입니다. 오늘 인도자께서 낭독하신 복음서 본문의 말씀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살아생전 베풀어 주셨던 비유 의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새번역 성서의 표제어는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은 이 예수님의 비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비유를 하 나 말씀하셨다.” 무슨 혼란을 느낄 여지가 없이 명확한 주제를 먼저 꺼내어 놓은 겁니다. ‘여기에서 “삔또”, “촛점”이 안 맞는 이야기가 뭐가 있나?’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내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의 말씀 들을 묵상하면서, 자꾸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서의 성서 구절에서는 더 그랬습니다. 본문의 마지 막 단락이라고 할 수 있는 6~8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베푸시고 직접 육성으로 설교하시는 부분입니다. 제가 6절 에서 8절 상반절까지 읽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시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 두시겠느냐? 내 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여기에서 딱 끝나면 차라리 좋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제의 촛점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혼잣말인 것 같기 도 하고, 어떤 한탄처럼 들리기도 하는 마지막 구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오늘 복음서 본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물음표로 끝납니다. 이 물음표로 끝나는 마지막 문장이 자꾸 제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장 진심 어린 한탄, 혹은 혼잣말 같은 이 마지막이 오늘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주제와 같은 초점을 가졌는가? 물어보는 거지요. 제가 서두에 냄비를 다 태워 먹고, 위로받고 싶어서 저의 아내에게 보고 싶다고 문자를 보냈는데, 내 속도 모르고, “ㅋㅋㅋ 흐뭇하군.”하고 답문을 보낸 것과 비슷한 양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틀어진 삔또를 다 시 맞추기 위해서라도, 오늘 저와 함께 이 예수님의 비유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누가가 직접 밝히고 있듯이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이 주제를 이렇게 반대적인 구도로 읽어 보았습니다. “늘 기도하지 않고, 낙심하는 이유”, 우리가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 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늘 기도하지 않고 낙심하는 이유도 같은 거 아닙니까?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똑같은 말입니다. “늘 기도하지 않고, 낙심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비유.”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초점을 틀어 놓아야, 오늘 예수님의 진심 어린 혼잣말 같은 말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라는 마지막 질문에 관한 답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누가의 주제에서 읽을 수 있는 “기도”가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행위로서의 기도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하기로 유명합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더 그렇지요. 매일의 새벽마다 새벽기도를 교회의 예배 형식으로 드리는 교회는 한국교회밖에 없습니다. 뭐 기도의 종류도 많습니다. 서원기도, 어떤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을 때, 조건을 거는 겁니다.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면 내가 이런 것을 하겠 다고 하나님께 맹세하는 기도지요. 제 친구 목사님들 중에 어머니의 서원기도 때문에 목사님이 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옛 날에 얼마나 아들이 귀했습니까? 아들이 없고 신앙심이 깊으신 어머님이 서원기도를 하는 거지요. 저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꼭 목사로 만들겠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태어나면, 어려서부터 너는 꼭 목사가 되어야 한다. 너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렇게 하니, 적성에는 안 맞지만 목사도 하고 그러는 거지요. 작정기도, 이 작정기도의 대표 격은 그 유명한 수능 100일기 도 정도 될 겁니다. 말 그대로 40일이면 40일, 100일이면 100일, 기한을 정해 놓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게 좀 변해서 목사님 들께서 작정헌금이라는 것도 만들어 냅니다. 뭐 옛날에 한창 교회에서 유행했던 일천번제헌금 같은 것이 대표적인 거지요. 금액을 정해 놓고 매주일마다 천 번의 헌금을 하는 겁니다. 천 번을 접어야 학이 되는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때는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고 축복을 받았다는 성서의 교훈이 목사님들의 단골 설교메뉴가 됩니다. 사실 그 일천번제도 일천 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일천 마리의 양을 의미하는 거지요. 뭐 어쨌든 천 일 동안 기도하고, 천 번의 헌금을 하는 건 좋은 거지요. 그밖에 금식기도, 이거는 밥도 안 먹고 하는 기도입니다. 간혹 어떤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관공서나 공공기관 앞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분들을 우리가 종종 뉴스로 접합니다. 뭐 얼마나 절박하면 그러시겠어요. 그런 심정으로 기 도하는 거지요. 그리고 강청기도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응답 될 때까지 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거예요. 우스갯소리입니 다만 코끼리를 바늘 하나로 죽이는 방법이 여러 개 있습니다. 뭐 코끼리가 죽을 때까지 바늘로 찌르는 방법도 있고요, 바늘 로 한 번 찔러놓고 코끼리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강청기도는 이 두 방법이 아주 조화롭게 잘 녹아있는 기도지요. 그리고, 전투기도라는 것도 있더라고요. 선교사님들이나 선교에 열심인 성도님들께서 특정 지역의 선교를 위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그 밖에도 수없이 많은 기도의 종류가 있습니다. 뭐 다 좋습니다. 진심 어린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좋은 일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 그런 기도를 더 열심히, 더 많이 한다는 것은 저도 목사로 서 적극 권장합니다.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저는 적어도 오늘의 본문의 말씀이 그런 일련의 기도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 되어지는 것은 반대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일련의 기도 행위를 하라고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베푸셨다면, 이것 자체로 예수님의 비유를 너무나 좀스러운 하류로 만들어 놓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예수님의 비유는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데도, 항상 기도하지 않고, 늘 낙심하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단도직입적으로 오늘 이 예수님의 비유의 주인공인 과부는 그녀의 권리를 되찾았을까요? 아니면, 그렇지 못했을까 요? 사실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이 과부가 권리를 되찾고 행복하게 살았다. 라고 끝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의 심리 변화만을 묘사하면서 끝납니다. 그 내용을 제가 읽겠습니다. 4절, 5절입니다.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이렇게 혼자 말하였다. ‘내가 정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 도 존중하지 않지만, 이 과부가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니, 그의 권리를 찾아 주어야 하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자꾸 만 찾아와서 나를 못 견디게 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여기에서 그냥 끝납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말로 이 재판관이 자 신의 혼잣말처럼 실행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귀찮아서라도 이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혼잣 말대로 그가 행동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아니, 그의 혼잣말을 엎고 오히려 과부에게 더 악하게 행동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비유에 나오는 대로 이 사람은 자타가 공인하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입니다. 그의 행 동을 결코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겁니다. 오늘 본문의 과부가 이 불의한 재판관을 못 견딜 만큼 끊임없이 찾아가서 졸랐다면, 재판관으로서는 어떤 게 더 빠를 것 같습니까? 그녀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것이 더 빠를까요? 아니면 공권력을 동원해서 이 과부를 처리하는 것이 더 빠를까요? 요즈음 같으면, 뭐 무단침입이나, 공무집행 방해 혐의를 적용해서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을 겁니다. 그게 더욱 그답습니다.

지난 8월 26일에 대한민국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장이 하나 접수되었습니다. 5명의 피고에게 청구한 손배액은 470억원 이었습니다. 이 피고들이 누구냐면요, 대우조선소가 있는 경남 거제에서 6월 2일부터 7월 22일까지 51일 간 120여명의 파업을 이끌었던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를 대표하는 하청지회 노조 간부들입니다. 어쨌든 그 51일간의 파업은 극적으로 타결되었습니다. 임금 4.5% 인상, 상여금 150% 지급, 그리고 위장폐업한 하청업체 직원 46명의 고용승계가 타결 내용입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위장폐업으로 졸지에 실업자가 46명 중에 직장으로 다시 돌아간 노동자는 4명에 불과하고, 대 신에 그 파업을 이끌었던 지도자 격인 노조 간부들이 피소를 당한 겁니다. 지금 법원의 재판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회사 에서는 그 파업으로 인해 470억 원의 손해를 봤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손해액이 8천억 이상이고, 며칠만 더 파업이 지속되면 피해액이 1조를 넘는다고 정부에서 공식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회사 측에서 규정한 대로, 불법파업이었다면, 주동자들 만이 아니라, 그 파업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처벌받는 것은 뭐 틀린 건 없습니다. 사실 저는 뭐 무식해서 뭐가 불법이고, 뭐가 합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월 200만원을 받는 5명의 노동자들에게 일해서 다달이 받는 생계비를 한 푼도 안 쓰고, 다 모아서 391년 동안 갚아야 하는 금액을 내 놓으라고 소장을 접수하는 게 상식적입니까? 법 말고 상식적으로요. 하도 계산이 안되어서 제가 직접 계산기를 뚜드려 봤습니다. 그리고 함께 악수하고 웃으면서 협상안에 싸인했는데, 이제 와서 불법이라 하면 도대체 뭐가 합법입니까? 더구나 그 타결한 내용을 지키지도 않으면서 상대방을 고소를 하는 게 공정한 건가요? 이게 공정과 상식이 꽃 피는 사회인가요? 여러분, 가진 사람들의 법은 보통의 사람들이 아는 공정과 상식을 비웃습니다. 정치와 사회가 극도로 발달한 요즘 시대의 이야기가 이러한 대, 2000년 전 그때 거기에 있었던 식민지 백성들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과부와 식민지 백성을 억압하는 정복자, 그것도 모든 사람을 야만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로마의 고위 관료,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법관입니다. 이건 이미 뭘 기대하기 힘든 각 아닙니까? 예수님의 오늘의 비유의 말씀은 로맨틱한 기도의 응답을 말씀하시는 게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를 불의하지만 그래도 재판관의 발 빠른 대처로 과부가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끝내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불의한 재판관의 행동이 아니라, 과부의 행 동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과부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이 재판관에게까지 끊임없이 찾아간 행동 에 주목하라는 말씀이지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이 과부는 유대인 과부입니다. 당시의 유대 사회는 제정일치 사회였습니 다. 좀 쉬운 말로 하자면,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종교였고, 법이었습니다. 당연히 송사에 관련한 것도 율법 전문가인 유대인 랍비나, 제사장을 찾아가는 것이 당연한 거였습니다. 자신의 적대자에게 권리를 빼앗긴 과부가 자신의 고을에 있는 랍비나, 제사장, 그리고 마을의 원로들을 당연히 찾아갔겠지요. 그리고 갈 때마다 거절당 했겠지요. 오히려 마을을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훈계를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 이방인 재판관을 끊임없 이 찾아가 그의 심리적인 동요를 부르는 것 보다, 마을의 원로들을 그렇게 찾아가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깐 이런 거지요. 오죽했으면, 이 과부가 이방인, 그것도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을 이렇게 찾아 갔겠냐는 겁니다. 오죽했으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어 하는 것은 이 과부의 갈망 그 자체입니다. 늘 기도하지 않고, 낙심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영혼의 갈망이 너에게 있느냐?”라고 묻고 싶으신 거지요. 말 그대로입니다. 본 문의 마지막 하반절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예수님의 마지막 물음에 나오는 “인자”는 그 당시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세상의 마지막 때 재판관으로 오실 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직접적으로 “인자”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참된 정의를 세우고 새로 운 세상을 일으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살아생전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현실이 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이 세상 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 그 나라에 대한 갈망이 있느냐는 겁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 누가는 이 새 세상에서 믿음을 찾을 수 있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통해서 자신의 공동체에 영적인 긴장감을 불어 넣고 있는 거지요. 초기 기독교인들의 화두는 당연히 예수님의 재림이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이제 곧 재림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재림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뭐 가 잘못된 거 아닌가 하는 질문이 여기 저기서 쏟아져 나왔을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로 마 제국은 여전히 승승장구합니다. 유대교와의 관계도 좋지 않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과부의 심정이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해집니다. 자신의 권리를 찾고 있는 과부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때, 거기의 작은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권리를 되찾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 재판장에게까지 겁 없이, 또 무모하게 계속해서 찾아갔습니다. 그런 믿음, 그런 갈망 이 여전히 네 속에 존재하고 있느냐? 이 살아 있는 자의 갈망이 있느냐? 이겁니다.

이 예수님의 비유는 사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더 시급하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거기에서 영적 긴장감을 느끼던 그 작은 기독교 공동체보다 더 깊은 영적 긴장감을 우리 가 느끼면서 사는 것이 정황적으로 마땅합니다. 2000년의 기독교 역사 안에서 다시 오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아직 지켜 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 2000년 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예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고 있으니까요. 정황 적으로 더 깊은 영적인 긴장감을 가지는 게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런 영적인 긴장감이 없다면, 이런 산 자의 갈망이 없다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어떤 관성 때문에 그럴 겁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님의 약속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관성의 지배를 우리가 받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일상에 필요한 것을 채워 나가는 것이 최상이라는 세상의 요구에 타협하기도 합니다. 아니요, 타협 정도가 아니라 너무도 철저하게 복종하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 당장 내일 예수님이 오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좋은 집을 장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장 내일 예수님이 오신다면, 뭐 3000억 짜리의 예배당을 지을 일도 없지요. 당장 내일 예수님 이 오신다면 거의 죽기 직전까지 경쟁하듯 이루어지는 돈벌이를 위한 몰빵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방식으 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갭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서신서 본문의 말씀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사도바울의 편지입니다. 더 이상, 이 갈망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예고입니다. 오늘 서신서 디모데후서 4장 3절과 4절입니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모아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꾸 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기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바울은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꾸민 이야기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꾸민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지요. 거짓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의미의 공갈이나 사기라는 말과는 좀 다른 어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꾸민 이야기는 그럴듯한 이야기지요. 사기꾼 같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사기꾼인 것처럼, 정말로 확연하고 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이 꾸민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는 그럴듯한 이야기는 우리가 늘 듣고 있는 현실의 말들입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꾸민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뭐 천국을 갔다 왔다거나, 누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간증 형식으로 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고요. 쫄딱 망했는데 헌금을 많이 드린다거나,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해서, 모든 게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말들도 많이 합니다. 제가 딱 말씀드리는데 그런 간증은 다 꾸민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 어떤 사람의 헌금 몇 푼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여져서 그 사람을 축복하셨다는 것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방굽니까? 말도 안되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 하고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자꾸 마음이 갑니다. 왠지 아세요? 사람들이 가장 확실한 사실에 대한 갈망을 잃어버렸기 때문 입니다. 그 갈망의 빈자리를 꾸며낸 이야기의 욕망이 차지하고 앉은 겁니다. 그렇게 교회가 맘몬의 신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겁니다.

이런 건 단지 교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귀를 즐겁게 하는 꾸민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상의 광고가 우리의 귀를 끌어당깁니다. 고급 주거지의 값비싼 집에서 살고, 웬만한 사람들이 생각도 못하는 가격의 슈퍼카를 타면 사람이 행복할 것처럼 선전해 대는 꾸민 이야기에 우리들은 더 빨리 반응합니다. 세상은 오직 주님 이 오신다는 한 가지 사실에 의지해서 사는 과부보다 다른 의지할 것이 많은 사람이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끝없이 교훈합니다. 때로는 인생을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냐, 조금만 준비되면 우리의 인생은 황홀할 정도로 행복하고, 그런 인 생을 즐기는 일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니 지금 마음껏 즐기자고 그럴듯하게 속삭입니다. 여러분, 꾸민 이야기는 그 속성상 진실을 외면합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진실이 뭔가요? 우리 인생 자체가 어쩔 수 없이 어디 하나 의지할 것 없는 단 한 명의 과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아닙니까? 제가 오늘 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회의 삶과 소식을 나누는 시간 에 성도님들께 광고를 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우리 다 저기 전망 좋은 알공퀸 공원에 단풍놀이 가십시다. 거기서 만나는 시간은 단풍이 한창일 2052년 10월 16일 아침 9시입니다. 그렇게 광고했다고 합시다. 거기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잘 하면 저기 지하에서 예배드리는 아이들 말고는 그 단풍놀이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 것이 현실입니다. 이제 곧 우리는 홀홀 단신 하나님 앞에 맨몸, 맨손으로 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 원의 영역 안에서 점도 안되는 인생이 영원할 것이라고 꾸민 이야기에 속지 마세요. 오늘 서신서 본문 디모데후서 4장 1절 이하에 서슬 퍼런 바울의 격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계속해서 5절에, “그대는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그대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여러분,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고난을 참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고, 너의 직무를 완성하라는 사도 바울의 명령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목사님들처럼 우리 모두가 설교자가 되라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선교사가 되어서 저 오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복음을 수호하는 우리의 직무를 완수한다는 것은 복음과 반대되는 일을 거절한다는 뜻입니다. 복음과 반대되는 일은 이 세상이 꾸며낸 이야기, 나의 귀를 만족시키는 이야기를 쫓아 사는 겁니다. 그러나 이 꾸며 낸 이야기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오직 다시 오실 주님의 말씀만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직무를 완수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서를 쭉 읽다 보면 신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여러 중심 개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 생명, 구원… 뭐 이런 것들이지요. 그중에 약속이라는 개념도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이름 자체가 원래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Old testament, New testament 그렇게 우리는 부릅니다. 그리고 사실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을 하나만 뽑으라 면 단연, 약속이라는 개념을 뽑을 수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하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은 무지개를 만들어서 더 이상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노아와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과는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와는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약 속하십니다. 또 신약의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시겠다고도 약속하십니다. 성서가 하는 마지막 최후의 약속이지요. 그런데 오늘 구약성서의 예레미야 선지자도 바로 이 약속 의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구약성서의 본문은 좀 짧게 다루겠습니다. 오늘 구약성서 본문 예레미 야 31장 31절 말씀을 제가 읽겠습니다. “그 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 나 주의 말 이다.” 여러분, 예레미야가 말하는 그때가 언제입니까? 가만히 보면, 그 때의 하나님의 선언은 어느덧 오늘날의 우리에게 다 시 오실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직무를 완수하라고 하신 명령과 비슷합니다. 제가 계속해서 33절 이하를 읽겠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언약을 세울 것이니,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여러분, 2000년 전의 바울의 서신과 2600년 전의 예레미야의 신탁이 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저는 이 각각의 서신과 신탁에서 다른 점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우리가 오늘 함께 예배의 부름으로 교독한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나쁜 길에서 내 발길을 돌렸습니다. 주님의 법도로 내가 슬기로워지니, 거짓 된 길은 어떤 길이든지 미워합니다.”라는 3000년 전의 한 시인의 고백이 또 오늘의 서신과 신탁과 다른 게 뭐 가 있습니까? 저는 다 하나로 읽혀집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곧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재림은 지체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사실을 비웃으며 꾸민 이야기로 우리 귀에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세상과 예수 님의 약속 사이의 간극이 더 넓어져만 가고 있습니다. 이게 엄혹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 여러분, 이 간극을 좁히고, 그것을 뛰어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의 가슴속에 펄펄 살아있는 유일한 진실에 대한 갈망입니 다. 그러므로 세상이 캄캄하게 침묵해도 우리는 갈망합니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우리는 갈망합니다. 이 세상에 살 면서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갈망합니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주님의 얼굴을 마주 대할 때까지 우리 는 아무런 의지할 것 없는 한 과부처럼 끝없이 갈망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가장 선명하게 우리의 남은 생을 이 산 자의 갈망으로 채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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