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여덟번째 주일예배 / 10월 다섯째주 주일
새로 태어나는 여정을 향하여
본문: 신명기 34:1-12 마태복음 22: 34 – 46
서동천 목사
영어 단어가운데, “컴패션”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함께 아파한다” 또는 “연민”으로도
표현됩니다.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과 마음을 같이하며, 그의 아픔이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고 돌보려함을 의미합니다. 스스로의 안전이나 자존심 보다는 상대방의 고통에
동참하거나, 어려움을 같이 나누려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삶을 남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이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중의 하나가 바로 컴패션입니다. “당신에게 평화와 기쁨이 없으면, 나에게도 평화와
기쁨이 있을수 없다”는 생각이 바로 이런것을 의미하지요.
이번 여름에 서울을 방문했을때에 한미방위조약 7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있어서 둘러볼
기회가 있었읍니다. 두 나라가 어느 쪽이든지 외부의 위협이나 전쟁의 위험이 있을때에는
서로 돕고 방위해준다는 두 나라 서로의 약속이지요. 그래서 한국과 미국은 계속해서
컴패션을 서로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읍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사람의 이야기가 있읍니다. 그는 예수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눈이 뜨게되기를 바랬읍니다. 그는 강한의지, 인내심, 확신과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야기와 그가 바라는 바를 듣고서 그의 눈을 뜨게해주셨죠.
이것은 컴패션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예수님이 바르티매오를 부르셨듯이, 그가 오늘 우리를 부르셔서 새로운 삶의 길을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바꾸어 주시려고 하시는 것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앎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주시기를 기대합니까?
예수님을 따르기위해서 혹시 포기해야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분은 신앙의 눈으로 자신의 삶의 여정을 보고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여건에 처해 있든지 상관없이 우리를 찾으며,
부르고 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노라.”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어려운 여건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그런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향해
걸어갈수 있도록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컴패션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유명한 작곡가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무척 반항적이었읍니다. 이 아들은
부모가 다 잠자리에 간 후 늦게나 집에 들어오곤했읍니다. 이 아들은 자기 방에 가기전에 꼭
아버지의 피아노 앞에 앉아 아주 천천히, 그리고 요란스럽고도 크게 기초 음계를 치곤했는데,
“도-레-미-파-솔-라-시…”까지만 치고는 마지막 “도”건반은 누르지 않은 채 늘 제 방으로
가곤했읍니다.
그 작곡가는 아들이 항상 마지막 “도”를 누르지 않고 끝내는 일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렸읍니다. 드디어 음악가이신 아버지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아랫층으로 가서 아들이 미처
끝내지않는 마지막 “도”를 치고서야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믿음이라는 건반을 누르는데, 쳐야할 마지막 건반까지 다 치지 않고 그만둡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하기는 하는데, 완전히 용서하지는 않읍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완전히 사랑하지는 않읍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봉사하기는 하는데, 완전히 봉사하진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드리기는 하는데, 완전히 받아드리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크리스챤의 생활모습으로 살아 가는데,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며 사는데, 완전치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모시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내와 놀라운 은혜로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계속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이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어느 계명이 제일 중요한것이냐고 물었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읍니다. 예수님은 사랑이 율법을 이해하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율법과 예언서의 중심내용임을 지적하셨죠.
이 내용은 예수님의 목회와 선교의 욧점입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믿는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는 내용의 중심을 이루며,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이지요.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그는 모든 창조물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창조물들을 사랑해야지요.
내가 배고플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마를 때 너희가 마실물을 주었다.
내가 낯선 사람이었을 때 너희가 나를 맞아주었다.
내가 벗었을 때 너희가 입을 옷을 주었다.
내가 아플 때에 너희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너희가 나를 만나러 왔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이 배고픈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리고, 목마를 때 마실 물을 드렸읍니까?
저희가 언제 주님이 나그네되신 것을 보고 맞아드렸으며, 벗으신것을 보고 입을 옷을
드렸나요?
저희가 언제 주님이 아프시거나 감옥에 갇히신것을 보고 방문했읍니까?(마태복음 25:)
1517년 10월 31일에 마틴루터는 독일의 비텐버그에서 95개의 조항을 내걸고서 캐토릭
교회가 돈을 받고 사람의 죄를 탕감해준다는 증서를 파는 잘못을 지적했죠. 이 사건이
종교개혁의 시작을 이루었고, 마침내 캐토릭으로부터 분리하여 새로운 종교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읍니다.
이 종교개혁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를 찬양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개혁의 여정과 기독교가 새로 태어나는 이 놀라운 여정을 계속해야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은 오늘 우리에게 적절합니다. 우리교회는 새로운 꿈과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늘 변화해야합니다. 교회는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고 더욱 가까이
갈수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을 모든 교리나 활동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늘 강조해야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위험한 길을 가더라도 변화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완전한 삶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회에 주시는 삶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단지 태어나는데 그치지 않고
새로 태어나는 여정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메시야를
따르는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명히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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