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두번째 주일 / 12월 두번째 주일
서로 발을 씻겨주라
요한복음(John) 13:1–15
류정희 목사
- 들어가는 말
제가 여러분과 함께 알파교회에서 신앙생활하게 된 지도 이제 거의 1년이 다 되어갑니다. 저는 이 교회에 오기 전에는 밀알교회에서 12년간 다양한 사역을 했었습니다. 제가 일했었던 밀알교회를 저는 여전히 사랑하고, 밀알교회가 토론토에서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 하는 여러 사역들을 보면서, 이민교회를 포함하여 한국교회 전체가 교회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어 실망스러운 이 때에 그나마 괜찮은 교회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알파교회에 온 이후로는 알파교회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알파교회에서는 크고 요란하지는 않지만 은밀하게 약자를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성인장애인공동체에 참여하여 섬기고 계시고, 새가족 여러분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고 계신 것을 봅니다. 이외에도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대로 아무도 모르게, 계신 곳에서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또한, 40대가 최대 연령층인 밀알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섬김을 받으셔야 할법한 연세의 성도님들이, 수십 년 동안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개의치 않고 부엌에서, 교실에서, 예배의 여러 부분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기쁨으로 감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성숙한 분들이시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파교회는 토론토 한인이민역사의 초창기부터 한인사회를 섬겨운 훌륭한 신앙의 역사를 가졌고 헌신된 일꾼들도 많이 있지만, 당면한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 신앙을 후대로 계승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의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이들 중 아마 가장 큰 문제는 이 교회가 한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연합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과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덜 매력적인, 진보적인 신앙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저희 교회의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 신앙의 전통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퍼뜨리고, 나아가 후대로 계승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우리가 ‘뜨거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하나된 공동체, 그것보다 더 흡인력 있는 곳이 있을까요? ‘사랑으로 하나된 공동체’는 요한복음이 지향하는 참된 제자공동체, 즉 참된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 갈 수 있을지에 대해 여러분들과 함께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 본론 (성경본문/ 요한복음 13:1-15)
1) 세족식의 배경
오늘 이야기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시는 장면입니다. 흔히들 이것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죠. 여기서, 여러분들께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그들과 마지막으로 식사를 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시간에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잠시 한번 생각을 해 보시죠…. 아마도 그들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을 나누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어린 자녀들이 있다면 그들이 이어갈 삶에서 꼭 기억해야할 것을 말해주려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유언이라고 하죠. 그러면,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성경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 세족식: 십자가에서의 희생적 사랑을 상징하는 행위비유
13장 1절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 즉 자신의 죽음이 가까와 있어 제자들과 헤어질 때가 다가온 것을 아시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끝까지’ 사랑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 ‘끝까지’는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시간적 의미의 ‘끝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이전에는 사랑하지 않다가 지금부터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는 사랑하셨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사랑하기를 멈추신 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사랑하셨는데 마지막 순간까지도 변함 없이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 없이 한결 같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구약성경 시편에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하고 할 때 그 ‘인자하심’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사람들’ 즉 ‘제자들’을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심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셨다’라고 합니다.
‘끝까지’의 두 번째 뜻은 ‘모든 것을 다 쏟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일말의 남김도 없이 다 내어주는 사랑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지만, 가깝게는 세족의 사건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완전한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뿐 아니라, 주님과 선생으로서의 권위를 철저히 내려놓고 종의 모습으로 제자들을 섬기신 본문의 세족의식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족의식은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의 섬김의 삶과, 그 삶의 절정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하나의 드라마로 보여준 ‘행위 비유’입니다.
그러면 이제 세족 장면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사랑을 보여주는 행위 비유가 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4절의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스승의 지위를 버림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초대교회의 찬송가로 여겨지는 빌립보서 2:6-7절에서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표현한 말씀을 떠올립니다(“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둘째, ‘겉옷을 벗고’라고 했는데, 이 ‘벗고’에 사용된 단어는 옷을 벗는 것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던 헬라어 단어가 아니라, 요한복음 10:11절,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에서 ‘(생명을) 버림’을 표현할 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요한복음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세족식에서의 예수님의 섬김을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것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째,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는데, 이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그가 종이라 할지라도 결코 시키지 않았던 낮고 천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당시 유대인 사회의 풍습에 따르면 아내가 남편을 위해, 자녀가 부모를 위해, 또는 제자가 스승을 위해 발을 씻어 주기도 했습니다. 이 경우, 발을 씻어 주는 행위는 친근한 사이에서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둘을 종합해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깊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낮고 천한 종의 모습으로 기꺼이 발을 씻겨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째, 12절에서 ‘(옷을) 입으시고’에 사용된 단어 또한 요한복음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에서 ‘(목숨을) 다시 얻음’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다섯째, 12절에서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은 빌립보서 2: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에서 표현된 예수님의 높아지심에 해당합니다.
결론적으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세족식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 비유로 나타내고자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가르침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본문에서는 다른 제자들의 반응은 기록하지 않고 오직 베드로의 반응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베드로를 제자들의 수장으로서 모든 제자들을 대표하는 존재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반응은 모든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반응은 “주님,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입니다. 베드로는 어떤 감정으로 이 말을 하는 걸까요? 어쩌구니 없다, 말도 안된다, 당치도 않는다, 우째 이런 일이? 등등의 감정이 아닐까요? 발 씻어줌의 형태로 표현된 ‘섬김’의 방향은 종이 주인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제자가 스승에게와 같이 항상 한 방향, 즉 아래에서 위로였습니다. 그것이 사회가 만든 통념이요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종이나 하는 일을 하신 것은 사회의 통념적인 질서를 완전히 뒤집는 행동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이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하시는 일이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강림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면 그 때에는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더욱 세게 예수님께 항변합니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께 내 발을 내어 주어 그 분의 사랑으로 깨끗하게 되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나는 예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교리를 믿는 것을 넘어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 맺음을 말합니다. ‘발’은 신체부위에서 가장 더럽고 냄새나고 못난 부분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발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고 씻어달라고 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발을 내어주는 것은 상대방의 사랑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 발을 내어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 나의 모든 부족함, 못남, 추함, 악취 등 이 세상 어느누구, 심지어 부모나 자녀와 배우자에게까지도 보여주기 싫은, 때로는 나 자신도 보기 싫어 외면해버리는 그것을 내어드리고 맡겨드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확신에 근거하여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죄악과 더러움을 다 내어드리고 깨끗이하여 주실 것을 언제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과 상관 없는 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과 상관 있는 사람입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과 상관 있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의미는, 세상의 질서에 역행하는 새로운 질서에 따라 사는 삶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승이시고 주님이신 예수님이 종이 되신 것은 기존의 세상 질서를 180도 바꿔놓는 일이었습니다. 강한 자 능력 있는자 가진 자가 섬김 받는 세상이 아니라, 약한 자 무능한 자 없는 자가 섬김 받는 세상, 강한 자 능력 있는 자 가진 자는 이들을 섬기는 세상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실천하신 섬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거듭났다’라고 하고, 이와 같이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 처럼 사는 삶을 ‘영생’이라고 하며, 예수님께서 이 ‘풍성한 삶’ 즉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이 과격한 사랑을 경험하시고 또한 실천하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가 거듭난 사람,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결론 및 적용: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라
이제 예수님은 드라마로 보여준 행위 비유를 마치시고 다시 식탁으로 오셔서 자리에 앉아 스승과 주님으로서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이 가르치심을 우리 모두 마음으로 받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12-15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뒤에, 옷을 입으시고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세족의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살펴봤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언제나 모든 것을 다바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는 정반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물음에 “네, 주님! 잘 압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세상의 질서를 뒤집는 사랑,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섬김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다른 형제와 자매, 나아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부족함, 연약함, 추악함을 때로는 덮어 주고 감싸 주며, 그것을 씻어 깨끗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막중한 과제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발 씻어주심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한편,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발을 내어줄 수도 있어야 합니다. 발을 내어주지 않는데 어떻게 발을 씻어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해 오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의 어려움과 난처함을 사랑으로 해결해 준 신앙의 선배가 아닌가요? 내가 기도와 사랑으로 도와주었던 어떤 형제가 아닌가요?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발씻김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 상관 없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한 교회에서 아무리 오랜 기간 함께 교우로 지내왔다 할지라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고 발 씻김을 받은 경험이 없다면, 그와 나는 상관 없는 사람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서론에서 했던 문제제기로 돌아가서 결론을 맺으려 합니다. 이미 한 교회에 속하게 된 우리끼리 서로 자신의 연약함, 부족함, 두려움, 어려움 등 소위 발에 해당하는 쉽게 내보이기 어려운 곳을 믿음으로 서로 내어보입시다. 그리고, 상대방이 내게 그렇게 할 때 감당하기 힘들다고 도망치지 말고,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끝까지’ 사랑하며 그 발을 씻어줍시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 서로 상관 있는 사람들이 됩시다. 서로 깊이 알아가며 하나의 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어져 갑시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들과도 상관 있는 사람이 됩시다. 누군가 새로운 얼굴이 보이면, 저 사람은 누구지? 인상이 그렇고 그렇네. 다음 주에도 나올려나? 다른 사람이 인사하겠지? 등등 방관하지 마시고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그들의 발을 씻어줄 준비를 합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자들의 공동체이고 교회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조금 뒤에 나오는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요한일서 4장 11-12절에서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이 참된 교회의 표지이며, 이 사랑이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이와 같이 서로 발을 씻겨 주며 세상의 질서와 반대되는 변혁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면 알파한인연합교회는 이 토론토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가진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로서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믿음의 후손들로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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