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두번째주일 / 1월 두번째 주일
선한 싸움 (1)
로마서(Romans)12:1-8
신태성 목사
오늘은 선한 싸움에 승리하기 위한 두번째 방법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려고 합니다.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선한 사건, 선한 변화, 선한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것을 복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반대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심지 않은 것엔 복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5:31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느냐?”
갈라디아서 6:7-9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렇습니다. 선한 싸움을 하지도 않으면서 선한 사건이 일어나고, 선한 변화가 일어나고, 선한 열매가 맺어지길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여러분에게 주신 새로운 한 해에 선한 것들이 넘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선한 싸움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한 또다른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기” 이 말을 듣고 실망하시는 분들도 계실것 같고, 어떤분들은 조금 부담을 가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제물로 드려진다고 하면, 제사에 쓰이기 위한 피와 죽음을 동반하는 어떤 것이 떠오르기도 하고, 어마어마한 희생을 감내해야 할 것 같은 느낌, 직장도, 가정도 포기하고 재산이나 소유물, 인생을 통채를 바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해서 산 제물이 되는 것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히려 영적인 개념에서, 신앙의 개념에서 산 제물이 되는 것은 중심의 이동, 완전히 다른 패턴의 삶을 선택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런 선택이 어리석은 것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어리석은 천재로 살기보단, 현명한 바보로 사는 것을 시사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 12장 1-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세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 산 제물이 되는 것의 유익들, 2) 산 제물이 되는 방법들, 그리고 3) 산 제물을 필요로 하는 대상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은 산 제물이 되는 것, 산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산 제물로 바쳐진다고 하면, 마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것과 같은 장면만 떠올리고 하는데, 사도 바울은 산 제물이 되는 것이 결코 그러한 측면만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힘든 만큼, 어려운 만큼 좋은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산 제물이 되는 것”이 선한 싸움(좋은 싸움)이라고 칭하는지 아시겠죠?) 구체적으로 산 제물이 되는 것은 세가지 유익들을 가져다 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산 제물이 되는 것의 첫번째 유익은 그것이 거룩한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것이야말로 진실하고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이고, 세번째 유익은 산 제물이 되려고 할 때, 산 제물로 바쳐지려고 할때,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어디에서 다 들어본 말들 같지요? 그런데 여러분!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면 중대하고 무서운 말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이 어떤 뜻이냐 하면, 산 제물이 될때까지 우리는 거룩한 존재로 사는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산 제물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거짓이요, 온전한 예배가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산 제물이 될때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얼마나 수고하고 계신지 잘 압니다. 저는 여러분이 얼마나 어렵게 예배에 참석하고 계신지 잘 압니다. 저는 여러분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라도 더 배우고 따르기 위해 애쓰고 계신지 잘 압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산 제물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들이 헛수고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실로 거룩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면, 만약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리기 원한다면,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길 원한다면, 전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입니까?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 대답은 거룩한 산 제물이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지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어떻게 (how)를 이해하면 무엇(what)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계십니다. 세가지 방식들이 있는데요. 첫째는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않는 것이고, 두번째는 신앙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함으로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 세번째는 바쳐질 곳에 제물로 바쳐지는 것입니다.
첫번째, 거룩한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지구를 떠나라”라는 말이 아닙니다. 산이나 동굴로 들어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과는 상관없이 살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단순히 세상은 나쁘고 악하니까,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멀리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을 이해하고 있으나 세상을 넘어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이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 것이라 여겨집니다. “말이 쉽지….” 맞는 말입니다.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과 무관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실로 거룩한 산 제물이 되고자 한다면, 그래서 선한 싸움에 승리해서, 선한 사건, 선한 변화, 선한 열매를 맺기 원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넘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걸린 시간? 40년.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이후 광야에서 40여년을 방황해야만 했습니다. 사실 그 거리는 한달이면 넉넉히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여년을 보내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굳이 그렇게 하셨어야 했을까요? 어떤 이들은 불순종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들,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이해하고 있으나 세상을 넘어서서 살아갈수 있는 존재들이 되게 하시고자.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하고 기뻐하시는 백성으로 살도록 하시고자. .
실제로 출애굽의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출애굽하니까 광야만 떠올리잖나요? 아닙니다. 광야가 메인 타픽이 아니예요)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신 이유가 광야에 있지 않고, 가나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광야로 보내신 것이,아니라,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출애굽 시키신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 어디에 있다 하더라도, 세상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고자…, 분별되고 거룩한 삶 살도록 하기 위해 광야의 시간을 보내게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 (즉 세상에서의 삶)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지 2세대도 지나지 않아 그들이 점점 가나안 사람들처럼 변해가고, 우상들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 시키시고 변화시키신 것 마저도 없었다면 이들이 어땠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신 분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점은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그것, 무엇인가요? 세상 사람들의 행동이나 관습을 본받지 않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을 이해하고 있으나 세상을 넘어 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T: 빌리그래엄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크리스천들)은 세상이 읽고 있는 성경들이다. 우리는 세상이 필요로 하고 있는 신념들이다. 우리는 세상이 참조하고 있는 말씀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같은 행동들과 생각들이 아니라, 다른 하나님의 것들로 말이다.”
두번째, 거룩한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신앙의 정도에 따라” 생각이나 행동이 새로워져서 딴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 된다고 할 때, 우리는 말을 부드럽게 한다던지, 종교 생활이나 자원 봉사, 헌금 생활 정도로만 여길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에 따르면,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은 신앙 안에서, 신앙의 양식과 기준 속에서 생각하고 반응하려고 할 때에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3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For by the grace given me I say to every one of you: Do not think of yourself more highly than you ought, but rather think of yourself with sober judgment, in accordance with the faith God has distributed to each of you)”
혼자 생각해서 행동하지 말고, 어디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요? 믿음의 기준 속에서 “In accordance with the faith.” metron (μέτρον, a measure) pisteōs (πίστεως, of faith)
사도 바울은 인간의 본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자신의 관점, 자신의 경험, 자신의 상황, 자신의 느낌, 자신의 처지 속에서 어떤 것을 판단하고 행동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을요. 우리 자신이 곧 잣대요, 기준이요, 모든 것들 판단하는 관점이라는 것을요.
물론, 자신을 모든 행동과 생각의 중심에 두는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이상한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늘의 세대를 나르시스틱 세대라고 하는데, 내가 우주의 중심이고자 하는 것을 비판만 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업그레이드(upgrade)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악순환 (bad cycle)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이렇게 말하면 좋은 말 같잖아요. 조금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성숙해지거나 성장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룩한 산제물이 되고자 하는 자는 더이상 자기 자신 속에서 어떤 것을 판단하거나, 자기의 욕망이 이끄는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믿음 속에서 어떤 것을 판단하고 생각해보고 행동함으로써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자만이 (또한 그러한 공동체만이)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때, 정탐하기 위해 12명을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은 각 12지파에서 선출된 사람들이었는데, 40일 동안 정탐을 한 후 이들의 보고가 매우 다른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먼저, 10명의 정탐꾼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땅은 온갖 식물이 잘 자라는 땅입니다. 그러나 그곳 백성들은 강해요. 그들의 성은 성벽도 큽니다. 우리는 그 백성들을 공격할 수 없어요.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그 땅은 우리를 삼키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본 사람들은 모두 키가 매우 컸습니다. 우리가 본 네피림 백성들은 거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큰 소리를 지르거나 어떤 이들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40년 동안 자신들을 이끌고 섬긴 모세와 아론을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정탐하러 갔던 땅은 매우 좋은 곳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겁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를 배반하지 맙시다. 그 땅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방벽이 없지만 우리에게는 여호와가 계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같은 곳에 가서 같은 것을 보고, 경험 했는데, 어떻게 10명의 정탐꾼들과 나머지 두명, 여호수아와 갈렙의 판단이 이렇게 다를수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자신들이 보고 느끼는것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 안에서, 신앙의 분량 속에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아시겠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의 세대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다 은혜로워야 한다거나, 낙천적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객관적인 사실이 다 무시되고, 현실을 외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10명의 정탐꾼들이 목격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습니다 (인정한 것입니다). 다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즉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하고 계신다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각에서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인용하자면, “믿음의 분량과 기준” 속에서 어떻게 하면 과거와는 다른 사람, 다른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고 시도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때 비로소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10명의 정탐꾼들이 만든 보고도 그렇지만, 그들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반응들은 과거 그들이 애굽에 있을때나, 애굽에서 나올때나, 광야 여정에서나, 과거 그들이 보였던 마인드셋 그리고 행동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믿음 속에서 다른 존재들이 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이들이 과연 거룩한 산제물로 드려진 사람들로 여겨집니까? 이들 중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신앙의 기준 속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하거나 질문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와 외에는,… 적어도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요.
영화 “hiding place”의 실제 인물이기도 한 코리 텐 블룸 (Corrie Ten Boom)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믿음은 사람의 눈이 볼 수 없을만큼 먼 거리에 있는 안개와 같이 뿌옇게 보이는 실제를 간파할 수 있도록 하는 레이더와도 같다 (Faith is like radar that sees through the fog-the reality of things at a distance that the human eye cannot see)”
알파 연합 교회가 현재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 때문에 많은 부담과 어려움을 안고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알파 교회가 캐나다 동부에 있는 한인 교회에 어떤 역사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에, 저는 정말 알파 교회가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알파 교회가 다시 일어나면 분명 다른 교회들도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새롭게 시작하자”라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한가지만 여쭤보고 싶습니다. 사실 이보다 더 어려웠던 시간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설사 지금만큼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그때 그 순간을 딛고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든든하고 멋진 모습으로 말이죠. 여전히 신앙을 지키며, 하나님의 도를 섬기는 교회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 비결이 무엇이었나요? 문제가 없어서, 갈등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믿음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주셨고, 그 믿음 안에서 은총을 베푸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믿음의 분량 속에서, 믿음의 시각 속에서, 믿음의 기준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산 제물이 되는 것의 유익들이 우리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과거보다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줄 믿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성도와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더 깊고 숭고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섬기는 알파 연합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세번째, 거룩한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제물이 쓰여야 하는 곳에 쓰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이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선물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제물은 제물의 용도에 따라, 제물이 필요한 대상에게 쓰여질때까지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 된다고 할 때, 그렇다면 이 제물은 어디에 쓰여야 할까요? 어디에 바쳐져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에 따르면, 두가지 대상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바쳐질 장소는 바로 하나님, 두번째 장소는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본문 1절과 4-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산 제물이 된다고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정도는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산 제물이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쳐지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종종 간과하곤 합니다. 그저 교회의 멤버가 되고, 예배 참석하고, 뭐 봉사할 일 있으면 하고 그 정도로 우리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제물은 두가지 대상들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 무엇입니까? 네, 먼저가 하나님이요, 그리고 두번째가 신앙 공동체.
혹자는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 사람을 위해선 헌신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하나님은 신앙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바쳐져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때, 우리 모두가 거룩한 산 제물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힘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교회를 우습게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건물이, 노래가, 설교가, 사람들이 구려서 그런 것일까요? 우리가 지역 사회 봉사를 덜 했기 때문입니까? 복음이 더이상 시대의 패러다임에 맞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그렇수도 있어요.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판단하기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로가 “반목”했으면 했지, 서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것만 얻으려 하지, 서로가 서로에게 제물로 바쳐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배울 것도 없고, 존경스럽지도 않고, 소속하고 싶지 않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제가 아는 알파 연합 교회는 제외하고 말입니다.
진심입니다. 그래서 저는 알파 연합 교회가 현재의 과제를 잘 극복해서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건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네 맞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을 위한 산 제물로 바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우리는 다시 부흥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 모두가 선한 사건과 열매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연합 교회가 강조하는 3가지 덕목이 있습니다: DEI (Diversity, Equality, Inclusiveness). 다양성, 평등, 포괄성입니다. 어떤 이들이 이를 정의(Justice)의 통로들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연합교회에서는 이 세가지가 하나님의 나라의 표증이요, 이 세가지가 극복되어야 우리 사회에 분열, 불의, 그리고 미움을 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진실로 성취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철학 때문에, 저같은 1세대 소수이민자도 백인이나 타민족 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죠.
이러한 철학에 대한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다양성, 평등, 포괄성이 이뤄지기 위해 가장 필요한 훈련(혹은 준비)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과 타인을 위해 제물로 바쳐지고자 하는 마음과 태도가 아닐까요? 같은 교우에게도 바쳐지는 것이 어렵다면, 우리끼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는 것이 어렵다면, 과연 3가지 덕목들 – 다양성, 평등, 포괄성 – 을 우리가 세상 속에서 성취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여러분중에 자기 자신을 희생시키는 일이 고귀한 줄은 알지만 굳이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네 어려운 일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을 위한 산 제물이 되어주는 것은 분명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언제나 그것이 어리석은 일은 아닙니다.
프로렌스 나이팅게일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상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길은 간단하다. 그것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관습들이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특별한 은사들을 희생시키는 자기 죽음을 통해서만 찾아온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이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라고요. 그것은 오히려 우리 삶에 엄청난 복과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거룩한 산 제물이 되십시오. 참된 예배자가 되시길 원하십니까? 거룩한 산 제물이 되고자 하십시요.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온전히 알길 원하십니까? 거룩한 산 제물이 되기실 바랍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입니다.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고자만 한다면 주님이 분명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알파 연합 교회 성도 여러분!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선한 싸움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비록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선한 싸움의 승리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증거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하고자만 한다면 주님께서 분명 이뤄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놀라우신 주님! 오늘도 귀한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복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거룩한 산 제물이 되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 우리를 도우시고 붙잡아주시어서, 그러한 선한 싸움에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함으로,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아는 자들이 아닌 증거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관객들이 아닌 선한 열매, 선한 변화, 선한 사건의 주인공들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주님!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을 넘어 살아가게 하시고, 우리가 처한 문제들이 아니라 믿음의 시각에서 판단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서로를 위해 바쳐지는 자들이 되게 하시어서, 우리가 참된 예배자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더욱 깊이 분별하고 실천하는 거룩한 산제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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