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2021. 7. 1. 목요 Cafe

목요 CAFE
작성자
akuc
작성일
2021-06-27 17:54
조회
959
틸리히 신학 되새김 - 노트 33

인간적 영과 신적 영의 관계
엑스터시와 합리성

영 혹은 성령이란 능력과 의미가 통일된 상태에서 현실화되는 것(the actualization of power and meaning in unity)이라고 포괄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인간 경험의 한계 안에서 볼 때, 이런 독특한 영 체험은 오직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사람만이 자기 자신을 영적 존재로 감지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힘과 의미가 통일된 상태로 스스로를 인식하는 자의식 능력이 없다면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말뜻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영적 현존(spiritual presence)으로서 사람의 영혼 안에 거하시고 역사하신다. ‘사람의 영혼 안에(in)’라는 말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관계성에서, 무조건적인 것과 조건적인 것, 창조적인 지반과 피조적인 실존 사이의 관계성에 있어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신적인 영 (the divine spirit)이 인간적인 영 (the human spirit) 안으로 경계를 깨트리고 들어오신다는 것은, 단순히 전자가 후자 안에 공간적으로 함께 거주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그 이상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신적 영의‘안’이란 동시에 인간적 영의‘밖’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은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성공적인 자기 초월을 향해 내몰리게 된다. 인간의 영은 여전히 인간의 영이요, 몸을 지닌 존재지만, 성령의 현존에 의해 몸 밖으로 나와 서고 제약을 넘어서서 궁극적인 힘과 의미에 의해 사로잡히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런 상태를 종교학에서는 고전적 용어로 엑스터시 (ecstasy) 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의 현존은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그 한계를 초월하게 하지만, 사람이 지닌 이성의 합리적 구조를 파괴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증언하는 진정한 엑스터시는 통전된 인간 자아의 중심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만일 파괴한다면 그 경우는 성령의 임재가 아니라 악령에 사로잡힌 상태인 것이다.
인간 존재는 자기 초월 운동을 하기 때문에. 자기 초월을 온전히 달성하고자 염원하지만, 인간 그 자신의 힘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는 창조적인 새로운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은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과 그 안에 내포된 불안정한 질문을 제기할 수는 있지만, 그 질문에 대답을 줄 수는 없다. 이 말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을 인간의 영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한(the finite)은 무한(the infinite)을 강요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영만이 불안정성과 모호성을 극복한 생명 상태를 창조할 수 있다.
인간의 유한한 영과 하나님의 무한한 영과의 관계성을 인간의 언어와 일상사의 존재 비유로 올바르게 설명할 길은 없다. 그래서 흔히 자연과 초자연이라는 이원론적 도식이 등장하곤 한다. 그러나 자연과 초자연이라는 이중 구조적 실재관은 이제 시대착오적이며 현대적 인간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실재의 차원(dimension)이라는 은유를 차용하여 ‘깊이의 차원 (dimension of depth)’, ‘궁극적인 것의 차원 (dimension of the ultimate)’, 혹은 '영원한 것의 차원 (dimension of the eternal)’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모든 유한한 것은 유한하지만 무한한 것에 의해 규정되고, 무한한 것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의 본질적인 관계성에서 볼 때, 양자는 상관관계(correlation)라기보다는 상호내주(mutual immanence)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성령의 현존은 영적 차원을 담지하고 있는 중심을 지닌 인격적 자아를 파괴하지 않는다. 엑스터시는 합리적 구조를 부정하지 않는다. 신앙적으로 말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창조 세계를 파괴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피조세계 그 자체는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선한 세계이며, 그 창조 세계 안에서 당신의 영광과 현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사와 기독교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영이 역사함으로써 나타나는 엑스터시 현상은 창조 세계의 구조를 분열시키거나 혼란시키는 듯한 경우가 허다함을 말해준다. 신체적으로 사람을 이동시키거나 투기하기도 한다. 심리적으로는 개인에게 초능력과 초인적 의지를 부여하기도 한다. 방언을 하거나 마음을 읽는 독심술을 발휘하기도 한다. 먼 거리에 있는 환자를 치유하는 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하나님 영의 현존은 시공을 초월하여 기상천외한 기사이적을 나타내고, 심신이 병든 자를 치유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게 한다.
이러한 일상적 일을 넘어서는 듯한 사건들이 성령 체험에서 일어나지만,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규칙과 법칙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러한 현상이 실재의 합리적 구조를 파괴한 결과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때 흔히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으로 영감(inspiration)과 은혜의 주입(infusion)이라는 표현을 쓴다. 영감을 받는 일을 하나님이나 천계(天界)에 관한 정보를 받는 일처럼 오해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거룩하신 성령의 주입 (infuslo Spiritus Sanncti)’으로 말미암아 믿음과 사랑이 주어진다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강조되던 신학적 견해는 성령을 물질적 초능력처럼 주고받는 대상물처럼 오해하기 쉽기 때문에 개신교는 반대해왔다.
개신교의 견해에 따르면 성령은 언제나 철저히 인격적 주체자이시며, 결코 사제의 성례전 예전 집행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은혜가 오가는 초자연적 물질 같은 성격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성례전에 있어서도 말씀이 함께해야 한다. 신앙과 사랑은 중심 잡힌 인격적 사람의 심령 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영의 현존이 일으키는 결과적 영향이라고 개신교는 본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간의 무의식적 차원이 더 밝혀지고, ‘성령의 유출(outpouring of the Spirit)’이나 생기의 들이마심 (breathing)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쓰는 한, 개신교라도 성령 은사에 대한 실재론적 이해를 완전히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엑스터시와 정신의 합리적 구조의 통일에 관한 고전적 표현은 사도 바울이 성령론에서 뚜렷하게 서술하고 있다. 바울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신학자(theologian of the Spirit)다. 그리스도론과 종말론은 모두 이러한 사도 바울의 사상, 곧 황홀경은 합리적 구조를 파괴하지 않고 통일된다는 중심 사상에 의존한다. ‘은총에 의해, 믿음을 통한 칭의 교리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는 새로운 존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이 성령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다는 바울의 핵심 주장을 변증한다.
올바르고 성공적인 기도란 하나님과의 재연합 상태에 관련된 황홀한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영 혼자서는 기도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성령이 사람을 통해 기도할 때면 언어적 말을 사용하지 않을지라도 기도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소위 ‘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상태란 단순한 심리적 감정이입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영이신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상태이며, 그래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장(能方場, in the sphere of this Spiritual power) 안에 살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황홀경이 마음의 합리적 구조를 분열시켜 혼란에 빠뜨리는 경향성에 대해 경고하고 저항했다. 고전적 표현은「고린도전서」 (고전 14:1~19)에 나타난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로 방언을 할 때, 방언 행동이 신앙 공동체를 혼돈에 빠트리고 분열시키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비판하고 거부했다. 그것은 영적으로 교만한 행위가 된다. 참된 성령 은사는 사랑 그 자체로 나타난다.「고린도전서」13장 사랑의 찬가에서 도덕적 지상 명법과 인식론적 이성의 합리적 구조는 황홀케 하시는 성령 현존과 완전히 일치를 이룬다.
기독교 교회가 역사 속에서 발전할 때, 성령 현존 문제는 항상 쉽지 않은 과제를 안고 진행되어왔다. 교회는 성령 은사 사건과 행위로 교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혼돈 상태에 빠트리는 광신적 신앙 운동을 극복해야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경직된 교권 구조와 성직 질서 권위 체계로 변질되어 속화되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동시에 프로테스탄트 교회사를 살펴보면, 성령의 현존 안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어야 할 교회가 정통 교리 체계나 도덕 체계 지킴이로 전락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경향 또한 극복해야만 했다.
그러한 참된 성령의 현존 체험에 기초한 참된 황홀경이 교회 안에서 왜곡되고 변질될 때, 세속적 차원에서도 그에 대한 반동이 일어난다. 약물중독에 의한 황홀경 체험이나 심리적 과잉 흥분 상태에 탐닉하는 히피 문화를 예로 들 수 있다. 약물중독에 의한 것이나 광신적이고 열광적인 신앙에 의한 황홀경 체험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인격적 책임성, 문화적 합리성, 영적 창조성 등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일상적인 주객구조(subject-object structure)가 초극되는 참된 황홀경 체험에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의식 차원에서 참된 자유, 해방, 희열을 경험하게 하고 거기에서 자발적인 사랑의 봉사, 예술적 영감, 정의에 대한 열정을 갖추게 한다.
진정한 기도란 주체-객체 구조가 극복되는 역설적 황홀 상태에서 일어난다. 진지한 기도란 연약한 피조물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서 말하는 형태로 일어난다. 하나님은 기도자의 파트너가 되고 ‘나와 당신’ 관계의 구조 안으로 스스로 들어오신다. 그러나 매우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동시에 언제나 주체이시며 단순한 객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사람의 기도를 통해서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그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다.” 「조직신학」제3권, 111〜120쪽

되새김

여기에서 틸리히는 엑스터시라는 종교적 황홀경이 어떤 상태이며, 거기에 어떠한 위험이 따르는지를 소상하고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틸리히는 종교적 엑스터시를 영혼이 육체를 떠나 초자연계를 오가며 신묘한 경험을 한다는 식의 존재론적 영육이원론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인간의 정신적 실재(의식, 초의식, 영혼)가 근본적으로 물질적 실재인 육체를 떠난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종교학이나 기독교 신학에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틸리히도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황홀경 상태를 존재론적 이원론, 곧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이론에 의거해 설명하지 않는다.

우선 틸리히는 종교적 황홀 경험, 특히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는 황홀 경험은 인간이 주체적으로 만들어내는 심리적 이상 상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 경험은 궁극적인 것에 의해 인간 존재가 사로잡힘을 받을 때, 즉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간의 영혼이 압도당하고 사로잡힘을 받을 때 경험하는 종교체험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럴 경우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식론의 차원에서 다른 패러다임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곧 일상적으로 사물을 경험하거나 진리를 논할 때 인간의 마음은 ‘주체-객체 구조’의 틀 안에서 대상을 인식하고 경험한다. 그러나 황홀경 상태에서는 주객 구조의 인식론적 틀이 초극되면서 대상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주객일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 영 안에 있음의 체험, 성령의 능력 안에 있음의 체험.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지복감(至福感)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사로잡힘을 받는 수동성과 피동성을 경험하면서도 인간의 인격적 주체성, 자아의 중심 잡힌 통전적 자아가 무시되거나 파괴되거나 억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틸리히는 이 점을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 만약 황홀경 상태에서 인간 자아의 주체성이 몰수되거나 파괴되거나 혼란과 분열 상태에 빠진다면, 그것은 성령에 의해 일어난 황홀경이 아니라 ‘악령에 사로잡힌 상태’이며,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증언하는 경우라고 했다. 이 점은 틸리히가 그의 계시론에서 말한 “계시는 이성을 파괴하지 않는다”라는 명제와 통한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성서적 근거를,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14장 은사론에서, 특히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방언과 예언 은사를 받았다는 신도들이 일으키는 공동체의 파괴와 분열을 경고하는 데서 찾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성령의 임재 체험과 역사하심의 체험을 통해 인간의 의식은 고양되고 승화되면서 진선미를 추구하는 활동에서 이전보다 더 창조적이고 생동적이 된다는 것이다. 진리 추구의 성실성과 진실성은 더욱 숭고해지고, 도덕적 윤리 의식과 사랑의 실천 능력은 더욱 강해지며, 예술 등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영감과 창의력도 더욱 강화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에 붙잡힘을 받은 인간의 영은 더욱 예민한 감수성과 일체감을 가지고 타자의 고통과 슬픔에 동병상련하며 그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려는 노력에 참여하게 된다. 불교의 『유마경』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명제 “중생의 병은 무명(無明)에서 오고 보살(菩薩, 보디사트바)의 병은 대비(大悲)에서 온다”라는 말과 통 한다. 성 프란시스가 성령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가 청빈의 실천과 가난한 자와의 일치를 수도원의 사명으로 삼은 것도 똑같은 종교적 반응인 셈이다.
틸리히는 2천 년의 기독교 사상사 혹은 신학사에서, 특히 프로테스탄트 신학사에서 사도 바울 신학의 본질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칭의 신앙에 있다고 강조한 점을 비판적으로 수정한다. 바울의 신학은 ‘율법과 복음’이라는 구조로 보는 것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 체험’이라는 성령론적 신학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바울은 정통 교리를 주장하는 신학자라기보다 철저히 ‘성령 신학자’라는 것이다. 그의 기독교 신앙에로의 체험 자체가 성령 체험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는 성령 은사 체험에서 방언, 예언, 신유 능력을 직접적으로 행했으며, 몸 밖에 있었던 것 같은 ‘삼층천(三層天, third heaven) 신비체험’을 했다. 그는 교회를 본질적으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신비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보았다.
기독교 교회사를 살펴보거나 교회 역사가 서양보다 짧은 한국 교회사를 볼 때, 성령 운동은 사회가 혼란하거나 교회의 교권 구조가 경직 되어 영적 역동성을 잃어버릴 때 그 반동으로 일어났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령 운동은 세 가지 위험에 늘 직면한다.
첫 번째 위험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직 질서와 교권주의가 보여주었듯이 성령을 교권과 직제 아래 묶어두려는 유혹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흔히 성령 운동이 가져올 수 있는 무질서와 혼란, 교회의 분열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을 교권이나 성직 질서가 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폐해가 오히려 더 크다. 물론 어느 정도 안정될지는 모르겠으나 제도적 종교 단체로 전락해버린다.
두 번째 위험은 개신교 정통주의에서 흔히 발생한다. 개신교는 성령의 자유하신 역사(役事)를 교리 체계와 도덕률로 제어하려고 한다. 그 결과, 개신교 신학의 역사는 언제나 신비주의에 대해 경계심을 갖고 역동적 영(프뉴마)을 질서 있는 말씀(로고스)에 종속시키려는 잘못을 저질러왔다. 개신교는 영의 종교인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교리주의나 도덕 종교로 변질시키려는 유혹을 스스로 항상 깨어서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세 번째 위험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지도자가 자신의 역할을 망각하고 영적 휴브리스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신앙 부흥 운동을 크게 일으킨 지도자들 중에는 은혜의 도관(導管)이자 매개체(媒介體)로 역할해야 하는 임무를 망각하고 스스로 영을 부리고 명령하는 자처럼 자신을 신격화하는 경우가 있다. 결국 그들은 돈과 권력, 명예욕, 심지어 성적문란으로 몰락하고 만다. 이렇게 건전한 신학적 지성이 동반되지 않은 한국교계의 성령운동이 종국에는 파탄에 이르는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만 한다.
성령의 임재에서 사람이 체험하는 엑스터시가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주체-객체 구조’를 초극하는 상태라는 가장 보편적 사례로서 틸리히가 ‘참된 기도의 역설’을 강조하는 것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교회에서 예배를 올릴 때 대표 기도를 하거나 개인의 은밀한 탄원 기도를 할 때 기독교 신자는 감히 ‘기도를 들으시는 주,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한다. 틸리히도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한다. 기도는 명상이나 자기 내면을 심층적으로 성찰하는 묵상과는 다르다. 알고 보면 기도는 엄청난 사건으로, 하나님의 허락이고 초청이다. 들풀 같고 먼지 같은 피조물이 영존자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 !”라고 부르는 일이 어찌 놀라운 사건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유의할 것은 기도할 때 기도하는 자, 곧 신자의 상대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전제하지만, 기도란 김 아무개와 최 아무개가 서로 간에 ‘주체와 객체 상호 대화 관계’에서 갖는 그런 대화나 청원 관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앞에서, 그리고 우리 위에서 기도를 경청하시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서, 우리 존재의 근저에서 기도를 가능케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입술을 열어 기도의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기도를 아시는 분이라고「시편」기자는 고백한다.(시 139:1〜6). 사람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롬 8:27). 그러므로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자기 자랑식의 기도나, 내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식의 기도는 마땅한 기도가 아니다.

목요CAFÉ  매주 목요일오후 7시(2021.7.1 미주동부시간  오후7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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