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29. 목요 cafe
목요 CAFE
작성자
akuc
작성일
2021-07-29 11:30
조회
1078
노트 22
그리스도이신 예수
기독교가 초지일관 주장하는 메시지는 나사렛 사람 예수(Jesus of Nazareth)라는 분이 새로운 상태, 곧 새로운 존재 (the New Being)를 가져온 메시아 구세주(the Christ)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라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종교가 아니고, ‘당신은 그리스도 메시아입니다’라는 신앙고백과 함께 탄생한 종교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은 동시에 이 세상 권세자들이 그를 거부하고 내리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제자들에 의해 그리스도라고 고백받고 받아들여짐으로 써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의 길을 걷는다.
그 인간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계속 부르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큰 역설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겪는 실존적 소외를 극복한 그분은 인간 실존적 소외와 실존적 소외가 일으키는 온갖 부정적 결과에도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서 이야기가 전하려는 핵심이자 본질이다. 그 사실과 진실을 가장 짧고 단순한 어휘로 표현한 것이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주장이고, 줄여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으로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의 고유명사가 아니고 가장 짧으면서, 가장 핵심적인 기독론의 고백 신조인 셈이다. 흔히 예배 의전에서 설교를 할 때 이 거대한 역설, 곧 나사렛 인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역설적 신앙 고백의 중요성이 희석되어 ‘고타마 붓다’라는 관례적 호칭처럼 남용되지만, 진정한 복음적 기독교의 설교와 교육에서는 거듭거듭 보통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역설적 진실을 강조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역사적 인물로서 역사적 사실성과 동시에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고백적 수용의 양면성을 필수적으로 내포한다. 기독교라는 위대한 종교의 발생사건은 그 두 가지 양면성을 동시에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보통의 인간 실존이 구체적인 하나의 인격체와 그의 삶속에서 소외를 극복하고 승리한 역사적 사실이 없다면‘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 곧 구원은 희망, 예언, 기다림, 결국 신화적 종교담론이 되고 말 것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초대 기독교교회가 영지주의와 가현론적 기독론의 득세에 맞서서 왜 그렇게 치열하게 투쟁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동시에 나사렛 사람,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고백하며 받아들이는 믿음 고백의 사건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생명력 종교로 존재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예수는 위대한 랍비, 마지막 예언자, 존경받는 인류의 지혜자 성인으로만 남을 것이다. 후자 곧 신앙고백적 사건으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면, 일정 기간은 기독교가 위대한 휴머니즘 운동으로서, 사회 변혁적 혁명 에너지로서, 지혜 명상적 종교로서 유용하겠지만 2천 년 이상 살아 있는 우주적 종교로 존속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직신학』제2권, 97〜99쪽
되새김
신학교에 들어가면 1학년 기초 학기 때 으레 듣는 이야기가 있다. 신학을 하는 태도랄까 입장에 대해서인데, 두 가지 서로 대비되는 입장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위로부터의 신학(theology from above)’이요,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신학(theology from below)’이다.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라는 공간적 방향을 상징적으로 사용한 말이다.
‘위로부터’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행적(先行的) 자기 알림, 곧 계시를 통해 땅위의 인간세계로 신학적 진리가 알려지고 선포되는 성격임을 강조한 입장이다. 일컬어‘계시신학’이라 통칭하는데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정통주의 신학과 칼바르트로 대표되는 신정통주의 신학의 입장을 그 사례로 들곤한다.
‘아래로부터 ’라는 말은 하늘의 계시가 중요하지만 신학도 결국 인간이 하는 학문인 만큼 인간의 실존적 물음, 인간의 상황, 인간의 이성과 양심과 종교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초자연적 계시를 의미 있는 대답과 해결로 인지하는 신학 태도를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 슐라이에르마허의 자유주의 신학,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 등 상황 중시의 신학이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다.
이 두 가지 신학 태도 중에 틸리히의 신학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후자라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틸리히의 신학 체계뿐만 아니라 교회사에 나타난 모든 위대한 신학은 ‘변증법적 (dialectical)’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단순히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인간주의적 신학, 인본주의적 신학, 이성 중심의 신학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평가이다. 틸리히 신학에서 인간 실존 그 자체와 인간 상황은 질문을 하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구원의 계시를 의미 있게 만드는 해석학적 구성 성분이기는 하지만 대답 그 자체를 가지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론(Christology)에도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입장이 계속 있어왔다. 그리스도론은 왜, 어떤 근거로 역사적 인물인 인간 예수를 영원한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증언하는가를 논하는 신학 내용 중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영역이다.
‘위로부터의 기독론’ 입장에서는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아 구세주가 되신 것은 본래 그분의 본질이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로고스였고, 육신을 이루어 세상에 오셨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자기 계시, 하나님의 독생자, 신성을 품성 속에 갖추고 나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적 발상이다. 초대 교부 시대의 ‘로고스 기독론(logos Christology)’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대표하는 입장이었고, 3~5세기 교회의 교부들이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로고스 기독론’은 정통 신학의 주류 기독론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깊이 읽어보면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동일한 고백에 도달하지만, 그 이유와 방향을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말한 입장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특히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와 함께 3년간 동고동락하면서 인간 예수, 랍비 예수, 목수 예수를 몸으로 체험했던 열두 제자의 ‘그리스도 고백’ 이유는 로고스 기독론의 입장과 같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물 붓듯이 부으셔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 보이셨고(행 2:22), 하나님이 죽음에서 일으키셔서 이 세상의 악한 세력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예수의 면모를 한시도 놓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기독론을 ‘성령론적 기독론(pneumatological Chri-stology)’ 이라 했는데, 이것은 ‘로고스 기독론’과 대조되면서 초대교회부터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뿌리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모습과 인성을 지닌 인간 실존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구절이 무수히 많다. 여느 사람처럼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면서 성숙해가는 모습(눅 2:40), 예수께서 큰 뜻을 품고 공생에 들어가실 때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신 일, 성전을 정화시키면서 거룩한 분노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는 모습(마 21:12〜13),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아픔을 비통해 하시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요 11 :33〜35), 자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는 효자로서의 마지막 모습(요 19:26),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피와 림프액이 모두 빠져나가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모습(요 19 :28)등을 들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증언하기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4:7)고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말을 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영어 성경에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다” 를 who is un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로 번역했다. 동정, 연민, 감응, 교감 등으로 번역된 헬라어 sympathes는 sym(함께)+path(감정, 의식)+y(상태, 성질)의 합성어다.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함께 느끼고 의식하고 공감하고 공명하는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 다. 우리 한글 개역 성경에는 ‘체휼(體恤)’이라 번역했다. 국어사전에 없는 단어이다. 몸으로 함께 아파하고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사랑하면 함께 기뻐하지만 동시에 함께 아파한다. 사랑은 아프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하나님은 피조물 때문에 기쁘기도 하지만 아프기도 하다. 메시아 구세주는 더욱더 그러하다.
틸리히의 기독론은 철학적 신학답게 얼핏 보면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알고 보면 초대교회의 성령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이어받은 입장이다. 나사렛 예수의 구체적인 삶이라는 역사적 사실(fact)로부터 시작한다.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서의 자격을 얻으려면, 다시 말해 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고백하려면 두 가지 필요충분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예수는 인간 일반이 겪는 인간 실존적 상황에 철저히 참여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진짜로 사람이라야 한다. 반신반인적(半神半人的) 신화적 초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인간 일반의 희비애락을 느꼈고, 굶으면 배고프고 매 맞으면 아파했다. 그야말로 생로병사에 동참했다. 고대 사회에서/특히 힌두이즘에서는 신적인 초월자가 인간의 모습으로 환생한다는 신화론적 구세주관이 너무나 흔했고 일반인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기독론이 정립되어가는 과정과 헬레니즘 문화권에 복음이 전파되면서‘초월적 신적 존재가 인간으로 나타나셨다’는 신화론적 기독론의 유혹을 꾸준히 받아왔고, 목회신학적 필요성에 의해 사도들의 목회 서신에도 그런 요소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초대 복음적 교회는 예수의 인간적인 ‘사실성’에 굳건히 뿌리박았고 양보하지 않았다.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적었고, 마리아의 자궁에서 열 달을 지냈고, 아기로 탄생했고, 성장 과정을 겪었고, 유혹과 시련을 받았고, 십자가 처형의 고통과 죽음을 철저히 맛보았다.
둘째, 예수가 단순히 랍비, 성인, 초능력자, 위대한 지혜자 교사임을 넘어서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가 되는 자격은, 인간 실존 상황에 똑같이 참여하면서도 일반인의 실존적 존재가 겪는 소외성(죄성)을 극복한 삶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인간 실존의 곤궁(predicament)과 소외(estrangement)는 다른 개념이다. 곤궁이란 인간의 실존적 삶이 구체적 삶 속에서 항상 매몰되는 궁지에 내몰리는 상태를 말한다. 희비애락, 생로병사, 애증의 인간관계, 선악의 양심 갈등, 역사적 불평등과 억압, 절대자에 대한 의심과 불신앙 등을 겪는 가능적 상태를 말한다. 소외는 마땅히 그러해야 할 자리와 상태에서 이탈되고 변질된 분리, 퇴행, 죄책감, 고독, 분노, 허무감 등에 시달리는 곤경의 실현태 혹은 현실태를 말한다.「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는 쉬운 말로 표현했다.
틸리히는 그 점에 주목했다. 인간 실존적 소외는 적어도 네 가지 차원에서 현실성을 나타낸다.
첫째,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 본래적 자기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의식과 무의식, 양심의 소리와 감정의 욕구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소외된 삶을 살아간다.
둘째, 인간 실존적 소외는 구체적 인간관계에서 자유, 평등, 사랑, 화해의 삶을 살지 못하고 애증 관계, 적대 관계에 시달린다. 인간 실존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소외되어 있다.
셋째, 인간 실존은 자기가 거기에서 지음받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되거나 실존적 삶을 위협하는 두려운 힘이 되었다. 자연으로부터 뿌리 뽑혀 화분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은 꼴이 되었다. 인간 실존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증이 있다.
넷째, 인간 실존은 자기의 존재 근거인 하나님, 곧 존재 자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그리워하면서도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기 싫어한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신앙하고 적대시한다.
기독교에서는 이 네 가지 실존적 모습을 일컬어 인간은 ‘죄 아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아 구세주가 되신 것은 일반 사람들이 모두 빠져 있는 그 실존적 소외 상태를 극복한 삶을 살았다는 데 있다고 틸리히는 말한다. 그의 양심에는 갈등이 없었다. 십자가를 질 것인가 고민하는 모습은 양심의 갈등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에게는 의식과 무의식 간의 괴리와 갈등이 없었다. 통째로 온전한 인격이요, 통전적 품성이었다. 특히 그는 인간관계에서 철저히 인간을 믿으며 사랑했고 낮은 자들과 하나 되는 겸손함과 섬김의 삶을 살았다.
자기를 배신한 제자들과 돌을 던지고 창을 던지는 몰지각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천부에게 빌었다. 병자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그의 몸에서 나왔고 바람과 파도도 그의 말 앞에서 순종하였다. 그가 ‘하늘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에게 끝까지 순명했고 천부와 하나 됨의 삶을 살았다. 부활하신 후만이 아니라 살아 계실 때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감히 말씀하실 수 있었고, 교권주의자들은 그의 주장이 신성을 모독한 거라며 그를 죽였다.
틸리히의 기독론은 그렇게 철저히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다. 그러나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래로부터 시작하지만, 그 결과로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말하고 받아들인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모든 사람은 불성(佛性)을 지녔고, 누구든지 깨닫기만 하면 부처가 된다’는 선언에서 위대한 휴머니즘 종교로서 불교에 매력을 느낀다. 불교에 비하면 기독교의 구세주론은 ‘오직 예수 한 분만’이라는 점을 강조한 나머지 휴머니즘 종교로서 기독교의 매력은 없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틸리히의 지론을 따르면 놀랍게도 모든 인간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될 후보 자격을 갖추고 있다. 다만 실존적으로,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그 역설적 존재 양태, 곧 ‘철저하게 인간 실존적 곤경에 참여하면서도 그 소외를 극복한 삶’을 살아내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문제는 ‘그리스도론’이 지나치게 교리화되어 있고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압도적으로 강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찬양하고 숭배하는 데에만 신경을 쓴다는 점이다. 실존적 상황에 참여하셨지만 그것의 소외를 극복하신 ‘참 사람-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망각하고, 단순한 구세주의 호칭처럼 부르고 있다는 데 한국 기독교의 목회적 문제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할 뿐, 그분처럼 살고 그분의 삶을 따르려고 하는 ‘생활 신앙’이 없고 교리적 기독론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생활’만 있는 것이다.
‘목요CAFE’는 한사람의 강의를 일방적으로 듣기보다는 교재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름으로 자신이 소화해서 자기의 신앙에 소리를 내보자는 의도입니다.
편한 마음으로 사랑방을 드나들 듯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미 동부표준시간)
Join Zoom Mee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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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이신 예수
기독교가 초지일관 주장하는 메시지는 나사렛 사람 예수(Jesus of Nazareth)라는 분이 새로운 상태, 곧 새로운 존재 (the New Being)를 가져온 메시아 구세주(the Christ)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라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종교가 아니고, ‘당신은 그리스도 메시아입니다’라는 신앙고백과 함께 탄생한 종교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은 동시에 이 세상 권세자들이 그를 거부하고 내리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제자들에 의해 그리스도라고 고백받고 받아들여짐으로 써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의 길을 걷는다.
그 인간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계속 부르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큰 역설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겪는 실존적 소외를 극복한 그분은 인간 실존적 소외와 실존적 소외가 일으키는 온갖 부정적 결과에도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서 이야기가 전하려는 핵심이자 본질이다. 그 사실과 진실을 가장 짧고 단순한 어휘로 표현한 것이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주장이고, 줄여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으로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의 고유명사가 아니고 가장 짧으면서, 가장 핵심적인 기독론의 고백 신조인 셈이다. 흔히 예배 의전에서 설교를 할 때 이 거대한 역설, 곧 나사렛 인간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역설적 신앙 고백의 중요성이 희석되어 ‘고타마 붓다’라는 관례적 호칭처럼 남용되지만, 진정한 복음적 기독교의 설교와 교육에서는 거듭거듭 보통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역설적 진실을 강조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역사적 인물로서 역사적 사실성과 동시에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고백적 수용의 양면성을 필수적으로 내포한다. 기독교라는 위대한 종교의 발생사건은 그 두 가지 양면성을 동시에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보통의 인간 실존이 구체적인 하나의 인격체와 그의 삶속에서 소외를 극복하고 승리한 역사적 사실이 없다면‘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 곧 구원은 희망, 예언, 기다림, 결국 신화적 종교담론이 되고 말 것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초대 기독교교회가 영지주의와 가현론적 기독론의 득세에 맞서서 왜 그렇게 치열하게 투쟁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동시에 나사렛 사람,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고백하며 받아들이는 믿음 고백의 사건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생명력 종교로 존재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예수는 위대한 랍비, 마지막 예언자, 존경받는 인류의 지혜자 성인으로만 남을 것이다. 후자 곧 신앙고백적 사건으로서의 기독교가 아니면, 일정 기간은 기독교가 위대한 휴머니즘 운동으로서, 사회 변혁적 혁명 에너지로서, 지혜 명상적 종교로서 유용하겠지만 2천 년 이상 살아 있는 우주적 종교로 존속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직신학』제2권, 97〜99쪽
되새김
신학교에 들어가면 1학년 기초 학기 때 으레 듣는 이야기가 있다. 신학을 하는 태도랄까 입장에 대해서인데, 두 가지 서로 대비되는 입장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위로부터의 신학(theology from above)’이요,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의 신학(theology from below)’이다. ‘위로부터’와 ‘아래로부터’라는 공간적 방향을 상징적으로 사용한 말이다.
‘위로부터’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행적(先行的) 자기 알림, 곧 계시를 통해 땅위의 인간세계로 신학적 진리가 알려지고 선포되는 성격임을 강조한 입장이다. 일컬어‘계시신학’이라 통칭하는데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의 정통주의 신학과 칼바르트로 대표되는 신정통주의 신학의 입장을 그 사례로 들곤한다.
‘아래로부터 ’라는 말은 하늘의 계시가 중요하지만 신학도 결국 인간이 하는 학문인 만큼 인간의 실존적 물음, 인간의 상황, 인간의 이성과 양심과 종교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초자연적 계시를 의미 있는 대답과 해결로 인지하는 신학 태도를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 슐라이에르마허의 자유주의 신학,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 등 상황 중시의 신학이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다.
이 두 가지 신학 태도 중에 틸리히의 신학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후자라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틸리히의 신학 체계뿐만 아니라 교회사에 나타난 모든 위대한 신학은 ‘변증법적 (dialectical)’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단순히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인간주의적 신학, 인본주의적 신학, 이성 중심의 신학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평가이다. 틸리히 신학에서 인간 실존 그 자체와 인간 상황은 질문을 하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구원의 계시를 의미 있게 만드는 해석학적 구성 성분이기는 하지만 대답 그 자체를 가지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론(Christology)에도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입장이 계속 있어왔다. 그리스도론은 왜, 어떤 근거로 역사적 인물인 인간 예수를 영원한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증언하는가를 논하는 신학 내용 중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영역이다.
‘위로부터의 기독론’ 입장에서는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아 구세주가 되신 것은 본래 그분의 본질이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로고스였고, 육신을 이루어 세상에 오셨으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자기 계시, 하나님의 독생자, 신성을 품성 속에 갖추고 나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적 발상이다. 초대 교부 시대의 ‘로고스 기독론(logos Christology)’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을 대표하는 입장이었고, 3~5세기 교회의 교부들이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로고스 기독론’은 정통 신학의 주류 기독론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을 깊이 읽어보면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동일한 고백에 도달하지만, 그 이유와 방향을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라고 말한 입장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특히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와 함께 3년간 동고동락하면서 인간 예수, 랍비 예수, 목수 예수를 몸으로 체험했던 열두 제자의 ‘그리스도 고백’ 이유는 로고스 기독론의 입장과 같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물 붓듯이 부으셔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 보이셨고(행 2:22), 하나님이 죽음에서 일으키셔서 이 세상의 악한 세력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행 2:36)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예수의 면모를 한시도 놓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기독론을 ‘성령론적 기독론(pneumatological Chri-stology)’ 이라 했는데, 이것은 ‘로고스 기독론’과 대조되면서 초대교회부터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의 뿌리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모습과 인성을 지닌 인간 실존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구절이 무수히 많다. 여느 사람처럼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면서 성숙해가는 모습(눅 2:40), 예수께서 큰 뜻을 품고 공생에 들어가실 때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신 일, 성전을 정화시키면서 거룩한 분노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는 모습(마 21:12〜13),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아픔을 비통해 하시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요 11 :33〜35), 자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는 효자로서의 마지막 모습(요 19:26), 십자가 처형으로 인해 피와 림프액이 모두 빠져나가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하신 모습(요 19 :28)등을 들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증언하기를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4:7)고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말을 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영어 성경에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다” 를 who is un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로 번역했다. 동정, 연민, 감응, 교감 등으로 번역된 헬라어 sympathes는 sym(함께)+path(감정, 의식)+y(상태, 성질)의 합성어다.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함께 느끼고 의식하고 공감하고 공명하는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 다. 우리 한글 개역 성경에는 ‘체휼(體恤)’이라 번역했다. 국어사전에 없는 단어이다. 몸으로 함께 아파하고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사랑하면 함께 기뻐하지만 동시에 함께 아파한다. 사랑은 아프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하나님은 피조물 때문에 기쁘기도 하지만 아프기도 하다. 메시아 구세주는 더욱더 그러하다.
틸리히의 기독론은 철학적 신학답게 얼핏 보면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알고 보면 초대교회의 성령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이어받은 입장이다. 나사렛 예수의 구체적인 삶이라는 역사적 사실(fact)로부터 시작한다.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서의 자격을 얻으려면, 다시 말해 사람들이 그를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고백하려면 두 가지 필요충분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예수는 인간 일반이 겪는 인간 실존적 상황에 철저히 참여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진짜로 사람이라야 한다. 반신반인적(半神半人的) 신화적 초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인간 일반의 희비애락을 느꼈고, 굶으면 배고프고 매 맞으면 아파했다. 그야말로 생로병사에 동참했다. 고대 사회에서/특히 힌두이즘에서는 신적인 초월자가 인간의 모습으로 환생한다는 신화론적 구세주관이 너무나 흔했고 일반인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기독론이 정립되어가는 과정과 헬레니즘 문화권에 복음이 전파되면서‘초월적 신적 존재가 인간으로 나타나셨다’는 신화론적 기독론의 유혹을 꾸준히 받아왔고, 목회신학적 필요성에 의해 사도들의 목회 서신에도 그런 요소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초대 복음적 교회는 예수의 인간적인 ‘사실성’에 굳건히 뿌리박았고 양보하지 않았다.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적었고, 마리아의 자궁에서 열 달을 지냈고, 아기로 탄생했고, 성장 과정을 겪었고, 유혹과 시련을 받았고, 십자가 처형의 고통과 죽음을 철저히 맛보았다.
둘째, 예수가 단순히 랍비, 성인, 초능력자, 위대한 지혜자 교사임을 넘어서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가 되는 자격은, 인간 실존 상황에 똑같이 참여하면서도 일반인의 실존적 존재가 겪는 소외성(죄성)을 극복한 삶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인간 실존의 곤궁(predicament)과 소외(estrangement)는 다른 개념이다. 곤궁이란 인간의 실존적 삶이 구체적 삶 속에서 항상 매몰되는 궁지에 내몰리는 상태를 말한다. 희비애락, 생로병사, 애증의 인간관계, 선악의 양심 갈등, 역사적 불평등과 억압, 절대자에 대한 의심과 불신앙 등을 겪는 가능적 상태를 말한다. 소외는 마땅히 그러해야 할 자리와 상태에서 이탈되고 변질된 분리, 퇴행, 죄책감, 고독, 분노, 허무감 등에 시달리는 곤경의 실현태 혹은 현실태를 말한다.「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는 쉬운 말로 표현했다.
틸리히는 그 점에 주목했다. 인간 실존적 소외는 적어도 네 가지 차원에서 현실성을 나타낸다.
첫째,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서 본래적 자기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의식과 무의식, 양심의 소리와 감정의 욕구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소외된 삶을 살아간다.
둘째, 인간 실존적 소외는 구체적 인간관계에서 자유, 평등, 사랑, 화해의 삶을 살지 못하고 애증 관계, 적대 관계에 시달린다. 인간 실존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소외되어 있다.
셋째, 인간 실존은 자기가 거기에서 지음받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되거나 실존적 삶을 위협하는 두려운 힘이 되었다. 자연으로부터 뿌리 뽑혀 화분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은 꼴이 되었다. 인간 실존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증이 있다.
넷째, 인간 실존은 자기의 존재 근거인 하나님, 곧 존재 자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그리워하면서도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기 싫어한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신앙하고 적대시한다.
기독교에서는 이 네 가지 실존적 모습을 일컬어 인간은 ‘죄 아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아 구세주가 되신 것은 일반 사람들이 모두 빠져 있는 그 실존적 소외 상태를 극복한 삶을 살았다는 데 있다고 틸리히는 말한다. 그의 양심에는 갈등이 없었다. 십자가를 질 것인가 고민하는 모습은 양심의 갈등 문제와는 성격이 다르다. 그에게는 의식과 무의식 간의 괴리와 갈등이 없었다. 통째로 온전한 인격이요, 통전적 품성이었다. 특히 그는 인간관계에서 철저히 인간을 믿으며 사랑했고 낮은 자들과 하나 되는 겸손함과 섬김의 삶을 살았다.
자기를 배신한 제자들과 돌을 던지고 창을 던지는 몰지각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천부에게 빌었다. 병자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그의 몸에서 나왔고 바람과 파도도 그의 말 앞에서 순종하였다. 그가 ‘하늘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에게 끝까지 순명했고 천부와 하나 됨의 삶을 살았다. 부활하신 후만이 아니라 살아 계실 때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감히 말씀하실 수 있었고, 교권주의자들은 그의 주장이 신성을 모독한 거라며 그를 죽였다.
틸리히의 기독론은 그렇게 철저히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이다. 그러나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아래로부터 시작하지만, 그 결과로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말하고 받아들인다. 동아시아 사람들은 ‘모든 사람은 불성(佛性)을 지녔고, 누구든지 깨닫기만 하면 부처가 된다’는 선언에서 위대한 휴머니즘 종교로서 불교에 매력을 느낀다. 불교에 비하면 기독교의 구세주론은 ‘오직 예수 한 분만’이라는 점을 강조한 나머지 휴머니즘 종교로서 기독교의 매력은 없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틸리히의 지론을 따르면 놀랍게도 모든 인간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될 후보 자격을 갖추고 있다. 다만 실존적으로,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그 역설적 존재 양태, 곧 ‘철저하게 인간 실존적 곤경에 참여하면서도 그 소외를 극복한 삶’을 살아내는 데 실패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문제는 ‘그리스도론’이 지나치게 교리화되어 있고 ‘위로부터의 기독론’이 압도적으로 강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찬양하고 숭배하는 데에만 신경을 쓴다는 점이다. 실존적 상황에 참여하셨지만 그것의 소외를 극복하신 ‘참 사람-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망각하고, 단순한 구세주의 호칭처럼 부르고 있다는 데 한국 기독교의 목회적 문제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할 뿐, 그분처럼 살고 그분의 삶을 따르려고 하는 ‘생활 신앙’이 없고 교리적 기독론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신앙생활’만 있는 것이다.
‘목요CAFE’는 한사람의 강의를 일방적으로 듣기보다는 교재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름으로 자신이 소화해서 자기의 신앙에 소리를 내보자는 의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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