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2021.9.2. 목요 cafe

목요 CAFE
작성자
akuc
작성일
2021-08-28 10:39
조회
722
노트 20
인간 실존의 한계상황적 체험들과 그 의미
유한성과 죽음의 불안, 고난과 고독, 회의와 무의미

존재의 궁극적 능력으로부터의 소외 결과는 인간 실존의 유한성으로 규정된다. 인간은 자연적 운명에 따라서 그가 본래 비존재로부터 왔던 것처럼 다시 비존재로 돌아간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숙명적 제약을 받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불안에 몰린다.
성서적 종교가 말하는 일관된 주장은 생물체로서 인간의 죽음이란 자연적 창조 질서이며, 인간 존재가 자연적으로 불멸적 속성을 지녔다는 불사성 (immortality)은 플라톤의 교리에서는 가능하지만 본래 기독교 교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플라톤의 ‘영혼불멸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이승의 인간이 저승에 가서도 이승의 삶을 계속 이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본래 순수 이데아의 세계에 있던 순수 영혼이 그 본질적 상태에서 타락했다가 다시 그 본질적 상태로 회복한다는 주장, 곧 ‘본래 속성상 신적인 순수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신념이다.
기독교의 「창세기」 타락 설화에 의하면 사람은 땅의 먼지, 곧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일정 기간 삶을 누리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유한한 존재이다. 다만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생명나무 과실’을 먹도록 허락 되는 한 인간은 죽지 않고 불멸성을 얻는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이 상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원에 참여할 때 (participation in the eternal)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있지만 영원으로부터 분리되면 (sepe- ration from the eternal) 인간은 자연스런 유한성에 종속된다.
죄가 죽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죄가 죽음에게 ‘권세’, 곧 ‘죽음의 쏘는 가시’(고전 15:56)를 준다. 이 ‘죽음의 권세’와 ‘쏘는 가시’는 영 원하신 하나님 생명에 참여함으로써만 극복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죽음의 권세, 쏘는 가시’를 무력화시켰다고 믿으며 그 ‘새로운 존재의 능력’에 참여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은 단순한 자연적 죽음을 예견해서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유한성이 ‘죄의 쏘는 가시’를 동반함으로써 ‘죄책감’이 동 반되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영원에의 참여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 렸다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에서 근원적‘죽음에로의 불안’이 자리 잡는 것이다.
타락 상태, 곧 인간 실존의 소외 상태에서 인간의 유한성의 구체적 특징으로서 시간, 공간, 인과율, 상대적 실체의 제한성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된다. 존재 그 자체의 능력의 현존을 통해서 가능한 ‘영원한 현재’를 시간성 속에서 생명의 의미 충만과 기쁨으로 느끼지 못하고, 소외 상태에서의 실존적 시간은 덧없음과 찰나성으로 체험된다. 시간의 흐름은 모든 의미 있었던 인간의 성취물을 파괴하고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게 만든다.
인간은 시간의 덧없음에 저항하면서 기념물을 만들고 기록을 남기고 불멸성의 신화 종교를 만든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유한한 시간성의 덧없음과 파괴성에 직면하여 ‘절망(despair)’한다. 절망은 회의를 낳고 허무주의를 낳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살을 통해 스스로를 파괴하고자 한다.
인간의 실존적 소외 상태의 특징으로 겪는 체험 가운데 동서 종교사에서 공통으로 다루어지는 중요한 주제는 고난(suffering)과 고독 (loneliness)의 문제이다. 고(苦), 고난의 문제는 자기 통전이라는 생명 운동이 최고 단계에 이른 인격적 존재자 인간이 삶 속에서 부딪히는 가장 난해하고 피할 수 없는 실존적 곤궁성이다. 그런데 고(苦)가 실존적 생명체에서 발생하는 이유와 그것을 극복하는 길에 있어서 불교와 기독교는 서로 독특한 관점의 차이를 나타낸다.
단순화시켜 비교해 보면, 불교에서는 개체아로서 존재 하려는 존재에 로의 의지 자체가 고의 원인이 된다. 생즉고(生卽苦)이다. 살려는 의지, 존재하려는 의지 자체가 위대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으로 고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생은 존재하려는 의지, 자기를 강화하려는 의지, 자기를 지속시키고 영속시키려는 탐진치 삼독(三毒)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특히 부파불교(소승불교) 전통에서는 고의 극복은 자아를 부정하고, 구체적 생명체로서 개체아의 온갖 의지를 극복하고 무아 혹은 묘공(妙空)에로의 일치로서 해탈을 고(苦) 극복의 궁극적 길로 제시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고 혹은 고난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과의 일치 관계에서 일탈한 소외된 인간 실존 상태의 결과라고 본다. 그 고난은 파괴적 힘을 갖지만 존재론의 측면에서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며 극복 되고 승화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인간이 개체아로서, 인격체로서, 독립적 생명체로서 존재하려는 의지와‘존재에로의 용기’는 긍정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여기에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가 뿌리내리고 있다. 인격적 개인, 공동체, 그리고 역사적 실재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관점의 차이가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인간 소외 현상에서 경험하는 ‘홀로임(solitude)’과 ‘외로 움(loneliness)’에 대해 고찰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고독한 단독자이다. 혼자 태어나고 홀로 죽는다. 홀로 있음, 곧 독거(獨居) 는 모든 종교의 영성 수행자에게는 필수적인 것으로, 외로움 혹은 고독과는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소외 상태의 체험은 조심히 구별되어야 한다. 홀로임은 존재자의 존재론적 구조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가 좀더 깊은 단계로 발전하려면 자기 통전과 자기 집중화된 개체의 독립과 홀로 있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외로움이란 존재론적인 기본 구조, 곧 ‘개체화와 참여’ 구조를 인정하지 않고 단절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외로움은 치유되어야 할 질병이고 존재론적 구조를 부정하고 그것으로부터 일탈한 행위의 결과이다. 『조직신학』제2권, 66〜78쪽

되새김

틸리히는 철학적 신학자이며 변증신학자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계시적 진리 말씀으로, 성경 구절에 모든 권위를 두고 무조건적으로 계시에 의탁하고 실존적 곤궁의 당면한 문제에 쉽게 해결과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결론은 같을지 몰라도,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겪는 솔직한 물음, 고독, 회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그것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의 힘과 의미’로 돌파하고 극복하도록 돕는다. 인간 실존의 한계상황적 체험들, 특히 인간 실존의 유한성에서 오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죄책감과 고독, 불멸성에 대한 갈망과 영생의 길에 집중 한다.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이 겪는 가장 기본적인 곤고함은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존재론적 불안과 죄책감이다. 인간은 단순히 삶을 영위하다가 언젠가 죽는 존재가 아니라, 그 사실을 무의식적으로나 잠재의식적으로 항상 자각하면서 죽음을 예견하고 준비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모든 유한한 존재자는 자연 질서에 따라서,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창조 질서에 따라서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 그 자연스러운 현상을 왜 인간은 그렇게도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는가? 삶에 대한 집착 때문인가? 기독교라는 역사적 종교가 지닌 특징 때문인가?
동아시아 문명권의 종교 문화에는, 예를 들어 불교나 유교, 도교 등에는 인간이 천수를 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사실에 대해 서양 기독교 문명권에서 이야기하는 불안감 같은 게 없다. 인간 나이 칠십이 넘어가면 그 사람은 많이 배웠든 조금 배웠든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달관이 생기고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태어나서 삶을 누리다가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유한성을 대자연의 질서 속에서 자연스럽게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사후생에 대한 종교적 믿음 형태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더구나 사후생을 전혀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 신앙에서는 죽음으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그렇게 불안과 두려움과 절망을 느끼는 것일까?
틸리히는 거의 전통 교리로 굳어진 통설, 즉 ‘인간의 죽음은 타락으로 인한 원죄의 죗값’이라는 생각에 대해 타락 설화를 잘못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성서에 나오는 인간 창조 설화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 달리 인간 존재의 피조성과 유한성을 분명하게 말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흙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은 하나님의 축복의 햇빛이 비치는 동안 삶을 누리다가 본래의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성서의 기본 입장이다. 자연 질서로서 죽음을 평안하게 감당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원죄 때문에 유한자가 되어 죽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죽음에게 ‘가시, 죽음의 권세’를 부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죄란 무엇인가? 예수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요, 틸리히의 신학 용어로 표현하면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의 힘과 의미”에서 이탈하여 근원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 소속, 하나 됨의 상태에서 분리되는 것이 죄다.
죄가 없는 사람, 혹은 있더라도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죽음이 별로 두렵지 않다. 죽음 속에서 가시가 뽑히고, 죽음의 권세가 이미 무력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영생 신앙과 불멸성 신앙은 플라톤의 생각같이 인간의 본성에 처음부터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불멸적 영혼의 실체 때문이 아니라,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영원성 안에서 유한한 생명체가 용납되고 받아들여 져서 차원이 다른 생명을 새롭게 덧입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자비로우심, 사랑이 들풀같이 연약하고 먼지처럼 덧없는 인간 생명체를 당신의 품안에 받아주신다는 사실로 죽음을 극복한다. 그리고 그 또렷한 징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드러내셨다고 초대교회 신자들은 확신했다(행 2:23~24). ‘하나님께서 그(예수)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는 것’과,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예수)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행 2:24a, 24b).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 모든 존재자의 ‘존재의 지반과 능력’이신 하 나님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것일까? 좀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무궁하고 신비로운 사랑’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랑의 존재론적 지반이기 때문에 사랑 안에서 죽는 사람은 죽음에 삼킴 당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도록 만든 그 힘은 바로 ‘사랑의 힘’이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는 확신만 가지면 모든 문제가 풀리고 죽음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세월호 침몰 사건(2014년 4월 16일) 때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선체 안에서 꺼져가는 휴대폰에 “엄마, 사랑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어린 학생들의 영혼을 죽음은 건드리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죽음은 일생일대의 최대 문제이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상황 중 가장 엄숙하며, 어찌할 수 없는 커다란 절벽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해야 할 때, 곧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거리’를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는 현실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유한자 로서 비애와 고통을 절감한다. 죽은 자는 이미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갔는데, 산 자는 더 이상 죽음의 경계선을 넘어오지 못한다는 정지 명령을 절감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대표적 종교인 무교와 유교, 불교,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며, 또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려 했을까?
무교에서는 아예 실재관 자체가 ‘이승-저승’이라는 이원론적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죽은 자는 모두 이승의 삶을 마치고 저승으로 옮겨 간다. 저승으로 옮겨 가기 전 ‘영혼의 정화’라는 통과의례가 있지만, 이승과 저승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
유교는 매우 윤리적인 종교요 합리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사생관에 있어 이기론적(理氣論的) 형이상학과 무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 성리학자들에 따르면 우주 만물을 구성하는 근원적 일기(一氣)로 모든 인간의 혼이 환원된다. 다만 천도와 부합하고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다 간 사람의 혼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후손들과 동기감응(同氣感應) 한다. 그러나 결국엔 우주적 일기(一氣)로 통합된다. 엄밀히 말하면 유교는 개인 영혼의 영생 신앙 혹은 불멸 신앙의 종교는 아니다.
불교는 아예 처음부터 ‘죽음이라는 실체는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인연 생기론’이 기본 종지(宗旨)이기 때문에 인연이 다한 개체 생명은 물질적, 정신적 구성소로 해체되고 마침내 공(空)으로 돌아간다. 한마디로 ‘공수래공수거’다. 불교의 해탈과 성불 사상은 사실 플라톤의 이데아들의 예지계(睿智界) 사상과 더 닮았다. 김 아무개, 최 아무개의 100세 일생의 결실물이 불멸한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의 현상이 나타나기 이전의 그 바탕, 그 존재론적 가능성, 그 창발적 힘과 의미가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공(空), 무(無), 불성(佛性)이라 부르고, 플라톤 철학에서는 이데아, 예지계, 영혼이라 부른다. 일반 불교 신자들은 서방 정토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영생 신앙을 갖고 있지만, 불교 본래의 영생관은 일반 불자들의 그것과 다르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개인의 생명은 유한하며 자연의 산물인 까닭에 죽으면 자연의 순리에 따라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영존하시는 하나님 신앙, 없는 것을 있게 불러내시는 창조주 하나님 신앙, 연약한 피조물을 기억하시고 자비와 성실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확신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에서만 ‘유한한 개인 생명의 사후 영생’이 가능하고 논리적으로 의미가 있다.
그런데 유한한 개인 생명의 ‘영원화와 그 존재론적 형태 변화’는 언 제 일어날까? 죽음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믿는다. 그 사건을 하나님 신앙의 전제 없이 형이상학적으로 말하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영혼불멸 신앙이 되고, 인격적 하나님 신앙에서 보면‘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생’신앙이 된다.
인간이 죽음 다음으로 심각하게 체험하는 것은 고통(pain)과 고난 (suflfering)의 문제다. 불교에서는 아예 생즉고(生卽苦)라 하여 생(生)이 곧 고(苦)라고 할 만큼 고의 문제를 깊이 성찰한다. 심지어 고의 문제를 너무 깊이 생각한 나머지 유한 생명체로서 우주 가운데 출현해서 살다가 가는 놀라운 삶의 기적, 신비, 경이로움, 감사함을 간과해버릴 지경에까지 나아 갔다.
한자어 고(苦)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괴로움을 다 함축하지만 여기서는 고통과 고난을 구별해서 쓰기로 한다. 고통은 생명체가 겪는 아픔, 통증, 생존을 위해 치러야 하는 아픔을 말한다. 그 아픔에는 질병, 자연재해, 전쟁, 기아 등이 있다. 그에 비해 고난은 고통의 의미를 물으면서 고통을 견디고 고통과 싸워 이기려는 인간 생명의 고통을 말한다. 함석헌은『뜻으로 본 한국 역사』(한길사, 1992)에서 한국 역사의 기조를 고난으로 파악했다. “고난은 인생을 심화(深化)한다. 고난은 역사를 정화(淨化) 한다.”
인간의 삶 속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현실이며,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그것은 비극이면서도 감사할 일이다. 고난의 아픔과 고통을 모르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지내놓고 보니 그렇다는 말이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생에 고난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천재지변이 있다. 화산 폭발과 지진, 대홍수와 가뭄, 전염병, 그리고 교통사고 등이 우리 삶에서 구체적인 고난을 일으킨다. 역사 공동체에서는 인재(人災)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전쟁, 정치적 폭력, 노예 제도, 인신매매, 경제적 절대빈곤 등이 고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이것들은 모두 비극적이다.
물론 우리는 고난 찬양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고난이 ‘신비’이면 서 ‘감사’하기까지 한 이유는, 고난과 동반되는 시련과 연단, 극기 훈련, 생각의 내면화 등이 없다면 인간은 동물적 본능과 욕망 충족의 반복 운동 단계에서 한치도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학도 없고, 철학도 없고, 예술도 없을 것이다. 물론 역사도 없고 영성적 종교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이 “고난은 인생을 심화하고, 역사를 정화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과학과 의술이 극도로 발전해 모든 질병에서 인간이 해방되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없는 세상이 된다면 ‘행복한 동물’이 될지는 모르지만 ‘숭고함을 아는 인간’은 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되새김하고 싶은 주제는 인간 실존 상황에서 겪는 홀로임과 외로움의 차이, 그리고 그 의미이다. 두 가지 경험은 고독한 정감과 쓸쓸한 정조를 공통으로 갖는다. 그러나 홀로 있음은 보다 의도적이고 의지적으로 홀로 있음을 선택하는 영성 수행자들에게서 발견된다. 수도원의 독거와 불교 수행승들의 암자 생활, 초기 사막 은둔자들의 고행 등을 들 수 있다. 종교적 수행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홀로 있음’의 시공간을 원할 때가 있다.
이와 달리, 외로움이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거나 분리된 상태에서 느끼는 심리적 아픔을 말한다. ‘군중과 가족 속에서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관계의 단절로 인한 고립 상태에서 느끼는 아픔이다. 진정한 대화 상대자도 없고,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을 서로 주고받는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외톨이 상태이다.

진정으로 홀로 있음을 아는 자만이 참된 참여와 사귐과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외로움은 치유되고 극복되어야 할 심리적 질병이다. 그에 비해 홀로 있음은 자기 통전과 자기 창조와 자기 초월을 수행하는 개체 생명이 내면적으로 더 영글어지고 정화되고 승화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리고 타자와의 깊은 사귐을 가능케 하기 위해 권장할 존재론적 필수 요소이다. 이렇듯 질적으로 전혀 다른 두 종류의 고독 상태를 혼동하거나 오해할 때, 종교는 세속화되고 대중적 종교성 안에서 천박하게 집단 심리적 열광주의 상태 혹은 집단 최면 상태의 사이비 종교에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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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카페’는 한사람의 강의를 일방적으로 듣기보다는 교재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나름으로 자신이 소화해서 자기의 신앙에 소리를 내보자는 의도입니다.
편한 마음으로 사랑방을 드나들 듯이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매주 목요일 오후 7시 (9월 2일 목요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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