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2021.9.30. 목요 cafe

목요 CAFE
작성자
akuc
작성일
2021-10-01 15:13
조회
737
노트 24

교회 공의회의 기독론 신조가 지닌 의미와 한계

4세기 초부터 5세기 어간에 결정된 교회 공의회의 기독론에 관한 신조의 근본은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제공한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관한 여러 가지 상징적 표현, 예를 들어 ‘사람의 아들(Son of Man)’,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 ‘메시아 그리스도(the Christ)’, ‘로고스(the Logos)’ 등에 의해 이미 제공되었다 할 수 있다.
네 단계의 호칭 가운데 마지막 네 번째 로고스이신 그리스도 고백에 의하여 본래 말하려던 네 단계 상징의 본래 뜻이 문자적으로 많이 훼손되고 변질되었다. 로고스로서의 상징은 본래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매우 개념적인 상징이다. 결과적으로 초기 기독론은 ‘로고스 기독론’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헬라 철학적 개념을 사용했다고 초대 교부들을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태도이다.
당시 헬라 문화적 세계인들에게 복음을 변증하려 할 때 개념적으로 이해시키는 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교의적 신학 작업에서는 기독론이 항상 관심과 쟁점의 중심이었다. 함께 담론화된 신론, 인간론, 성령론, 삼위일체론도 사실은 기독론을 명료하게 정립하는 과정에서 파생적으로 혹은 부수적으로 다뤄진 교의적 진술이었던 것이다.
기독론에 관련된 교의(christological dogma)와 교의(dogma)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입장들은 공평한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교의 형성 작업이라는 게 결코 ‘사변적인 이유들(speculative reasons)’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고, 루터가 올바르게 인식한 것처럼 교회 안팎으로 닥친 기독교 본질의 훼손과 변질을 막기 위한 신학적 작업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교의와 기독론적 교의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론에 관한 역사적 공의회의 교의 정립 작업에 관한 질문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관점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정립한 기독론적 교의들이 어느 만큼 기독교 복음 메시지의 순수한 의미를 교회 안팎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재긍정하는 데 성공했느냐 하는 관점이다. 둘째, 정립된 기독론적 교의들이 본래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를 드러냈던 상징을 개념적으로 표현하는 데(conceptualization) 있어서 과연 어떻게 성공했는가 하는 관점이다.
총괄적으로 평한다면,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줄여 말하면, 기독론적 교의들은 교회를 구원하고 지켜냈지만 매우 부적절한 개념적 도구들을 사용해서 그 작업을 수행한 것이다.
전통적 용례로 말하면, 기독론 논쟁의 핵심은 예수 안에 있는 신성과 인간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감손(減損, diminution)은 인간 실존의 조건과 상황에 온전히 참여하는 그리스도의 본질을 박탈시킨다. 반대로 그의 신성을 감손하면 실존적 소외를 온전히 극복하신 그리스도의 본질을 위협하고, 심지어 박탈해버린다. 그러므로 문제의 관건은 어떻게 인간성과 신성이 온전히 일치되느냐의 문제로 귀착되었다. 인간성과 신성이라는 두 개의 본질에 관련된 기독론 담론은 결국 돌이켜보면 문제 제기는 옳았지만, 그 해결 담론화 과정에서 교부들이 개념적 수단들(conceptual tools)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과오를 범한 것이다. 전통적 기독론 담론의 결정적 부적합성은 ‘본질(nature)’이라는 어휘를 사용했다는 점에 있다. ‘본질’ 개념을 인간성에 적용할 때는 그 개념이 모호해지고, 하나님에게 적용하려 할 때는 원천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 본래성, 가능성인가, 혹은 실존적 현실성인가가 매우 애매모호한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본질과 실존의 분리를 넘어선 분이기에 하나님의 신성을 본질 개념으로 분리해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모두 관념적 개념일 뿐이다. 니케아나 칼케톤 공의회의 기독론 교의의 결정문 채택에서 공의회의 중요하고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공의회적 결정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실패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 -『조직신학」제2권, 138〜150쪽

되새김

1950-60년대 무렵으로 기억된다. 한국을 방문한 세계교회협의회 지도자들이 한국 기독교 교계를 돌아본 후, 한국 교계에는 예수와 기독이 서로 싸우는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비판한 적이 있다. 예수와 그리스도의 싸움이란 당시 성서 비평학의 도입 문제로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가 교단적으로 분리되어 서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느라 경쟁하던 교계 상황을 두고 한 촌평이다.
그 뒤 한국 개신교는 장로교단뿐만 아니라 감리교단과 성결교단 등 다른 교단들도 크게 두 캠프로 나누어졌는데, 진보 성향을 지닌 교단 명칭에는 ‘기독교’라는 이름이 붙고 보수 성향의 교단에는 ‘예수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폴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내포한 숙명적인 난제, 곧 어떻게 왜 역사적 인물 예수가 그리스도 메시아가 되느냐, 곧 자연인 인간 예수와 신적인 그리스도라는, 차원이 다른 두 범주의 실제 경험을 어떻게 동시적으로, 불가분리적으로, 그러나 불가혼합적으로 이해하느냐의 문제인데, 그 문제가 기독론의 핵심 과제라고 갈파한다.
누차 살펴왔듯이,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기독교 창시자의 이름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홍길동, 제퍼슨 토마스, 모택동처럼 고유명사로 오해하곤 한다. 틸리히는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 ‘그리스도인 예수(Jesus as Christ)’로 자각하면서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사적 인물인 싯다르타가 깨달은 자, 곧 붓다가 되었기에 ‘고타마 붓다’라고 하듯이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초의 위대한 교리사가요 역사가였던 베를린 대학의 하르낙 (Carl Gustav Adolf von Harnack, 1851~1930) 교수는 초기 기독교를 연구한 결과로 두 가지를 주장했다. 첫째, 기독교의 확장 과정에서 형성된 초기 교회 공의회의 기독론 결정들은(니케아로부터 칼케톤에 이르기까지) 그 공의회 이후 발전한 기독교 정통 교리의 규범이 되었고, 중세와 종교개혁을 거쳐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독론의 교리는 새롭게 추가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정통적 교회들의 신앙고백을 규정하는 표준이 되었다.
둘째, 기독교 복음 메시지가 헬라 철학적 개념을 빌려 기독론의 교리로 확정된 것은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서 교회가 생존하고 확장해 나가기 위한 불가피한 결과였다. 하지만 예수의 복음 그 자체와 공의회에서 결정한 교리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연구를 통해 역사적 산물인 기독론의 교의 및 교리로부터 예수의 순수한 복음을 구별하는 일에 진력해야 한다.
틸리히의 견해도 하르낙 교수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의회에서 결정한 기독론이나 신론의 교의들이 복음의 헬라 철학화라고 단순하게 비판할 것은 아니지만, 생동하는 복음을 3~5세기 교리적 개념 안에 유폐시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견해다.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가? 틸리히는 니케아 공의회(A.D. 325).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381). 그리고 칼케톤 공의회(A.D. 451)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공의회에서 주역을 담당했던 교부들이 주로 헬라 철학에 정통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과 신성, 예수와 하나님과의 본질적 동질성을 담론화하는 데 ‘본질(本質, 헬라어 ousia, 영어 nature)’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차용했는데,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헬라 형이상학적 개념 어휘로서의 본질(ousia, nature)은 신, 인간, 혹은 어떤 사물을 그것 되게 하는 불변적이고 항구적인 속성이나 특성을 의미한다. 틸리히는 예수가 참다운 인간성을 지닌 분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인간성 (human nature)이 불변적이고 항구적인 실체(實體, substance)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한 헬라 교부들의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보았다.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몸 안에 간, 쓸개, 허파, 심장, 뇌수를 지니듯이 인간성이라는 변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지닌다는 것은 관념적 추상 개념일 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가치와 의미를 지향하고 선택하고 결단하면서 자기를 형성해가는 ‘되어감의 존재’이며, 형성적 존재이고, 실존적 상황과 조건에 둘러싸여 응답하고 반응하는 존재이다.
틸리히는 초대 교부들과 후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 (神性, divine nature)을 지녔다고 생각할 때, 신성을 신이 지닌 변하지 않는 실체 혹은 속성을 의미한다고 가볍게 생각하는 사고 습관에 대해 비판한다. 예를 들어 흔히들 신적 속성이 전지전능, 무소부재, 시공 초월, 인과율 초월이라고 생각한다면 역사적 인물인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신성을 지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틸리히에 의하면, 하나님은 실존과 본질의 분리가 없는 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존적 현존이 곧 그의 본질로서 존재 자체의 드러남이기 때문이다.
틸리히가 그러한 헬라적 철학 개념을 가지고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보편성과 신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동기는, 당시 교회 안팎으로 이교적 종교 풍조가 너무나 강하여 복음의 본질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당시 헬라 문화권 안에서 풍미하던 이교적 구원 종교의 아류(亞流)로 교회를 변질시키거나 타락시키려는 온갖 도전에 안전한 방어막을 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적 이교 사상은 예수의 몸을 지닌 육체성을 완전히 부인하거나 경시하는 신비 종교였다. 신적 존재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 모양’으로 변신하여 구원할 사람을 다 구원한 후에는 천계로 돌아간다는 ‘구원자의 환생론’은 너무나 널리 퍼져 있는 신 화론적 구원관이었다. ‘땅 위를 걸어 다니신 신적 구원자’라는 그럴듯한 통속적-사이비 경건주의 영성은 기적을 찾는 일반 기독교 신자들이 옛날에나 요즘에나 언제든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통속적 신자들은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그리스도이시다”(고전 1:22~24)라는 초대교회와 사도 바울의 ‘역설적(paradoxical)’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늘날 유대인들이 예수를 예언자로는 받아들이지만 그리스도로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기적이 눈에 보이게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양과 상식과 철학으로 무장한 지혜로운 헬라인들에게도 십자가의 역설적 복음은 그저 ‘미련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참 그리스도는 ‘지혜’를 주어야 하는데 예수는‘미련하게도’자기를 십자가에 내주었던 것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예수의 본질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정통과 비정통, 이단과 정론의 싸움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그렇다면 왜 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일까? 틸리히는 본래 규정할 수도 없고 실체론적 개념으로는 양립할 수도 없는 인간성과 신성의 ‘본질’ 개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틸리히는 신앙의 선조들이 복음의 본질을 각종 사이비 구원 교리, 그럴듯한 신비 종교, 기적을 추구하는 마법 종교, 자신의 변화와 혁명 없이 구원을 얻으려는 싸구려 기독교의 범람에 대항하여, 복음의 본질을 굳게 지키고 이교 사상의 범람으로부터 교회를 지키려는 열정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 방법론은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과제라고 본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구별하고 ‘본연지성’으로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을 말하고 기질지성으로는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이라는 일곱 가지 감정을 꼽았다. 소위 말하는 사단칠정론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다루기보다는 관념적인 이상으로서의 인간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불교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인간 본성이나 신적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연생기설(因緣生起說)을 종지(宗旨)로 삼는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공무허(空無虛)의 근본 존재론으로 보면 기독교의 기독론 논쟁은 실체론(實體論)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학자들의 헛된 논쟁에 불과하다.
신약 성서의 복음서에서 직간접적으로 전해지는 예수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본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신성모독죄를 절대로 범하지 않았다. 예수의 율법 해석과 기적 행위를 보고 감탄한 나머지 한 추종자가 "선한 선생님이여 !”라고 불렀을 때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하시면서 선한 선생님 칭호도 사양한 분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요 14:28)고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명함으로써 자기를 투명하게 비우고 하나님만을 드러나게 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요 14:9~11)라고 대담하게 선언한다. 다만 그 하나 됨이 형이상학적 ‘본질’의 동질성 때문이 아니라 뜻의 일치, 사역의 일치, 상 호내주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예수는 기독교 교리가 확정한 원죄론으로 단죄하지 않았다. 유혹과 약함에 휩싸이지만, 그들이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적 존재라고 보았고, 예수가 하는 일은 보통 사람도 할 수 있고 더 큰 일도 가능하다고 인간성 자체를 믿고 긍정한 분이었다(요 14:12~17). 새로운 그리스도론 정립은 언제나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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