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8. 목요 cafe
목요 CAFE
작성자
akuc
작성일
2021-10-28 18:09
조회
847
노트 1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
라틴어 엑시스테레(existere)에서 ‘존재한다(to exist)’라는 말은 그 어원적 의미가 ‘〜로부터 나와 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나와 선다는 말인가? 물음에 대한 답은 ‘비존재 (non-being)’이다. 즉, 비존재로부터 나와 선다는 것이다. ‘비존재’를 의미하는 두 개의 헬라 어가 있다. 하나는 ‘절대적 비존재(absolute non-being)’를 뜻하는 ouk on’이고, 또 하나는 ‘상대적 비존재(relative non-being)’를 뜻하는 me on’이다.
절대적 비존재(ouk on)로부터 나와 선다는 뜻이라면,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본래가 ‘없음’이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지만 유한하고 불안하고 언제나 무로 환원될 피조물로서 유한자가 된다. 다른 한편 ‘존재 한다’ 라는 말뜻이 ‘상대적 비존재(me on)’로부터 나와 선다는 뜻이라면 잠재적 가능적 상태에서 현실적 상태로 전환한다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현대 실존철학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그들 이 경험하는 실재(reality)에 본질적 레벨(essential level)과 실존적 레벨 (existential level)이 있음을 깨달았다. 플라톤 철학에 이르러 본질적 존재와 실존적 존재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존재론적 문제나 윤리적인 문제로 뚜렷이 자각되었다.
플라톤에게 있어 존재하는 실존들은 그림자, 모방, 가치 없는 것, 마침내 악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학에서 인간의 현실적 실존은 본질적 상태인 이데아 세계로부터의 타락이거나 전락이라고 여겨졌다.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 발생기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침에 따라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는 현실 존재로서의 인간과 세계가 불완전 상태이며 무엇인가 본질적 상태에서의 이탈, 타락이라는 견해에 동감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에서 비록 본래적 창조의 선함을 교의적으로 말했을지라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본질과 실존의 괴리를 그의 ‘형상과 질료의 역동적 상호 의존성 교의’로서 플라톤주의를 수정했을지라도 대세는 뒤집지 못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로부터 계몽주의에 이르는 동안, 실존에 대한 새로운 느낌과 확신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어떤 본질적 존재 상태에서 나와 선다는 것은 타락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과 잠세성을 실현하고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성취하는 주체자일 뿐만 아니라 세계와 역사를 완성으로 이끄는 담지자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실존은 가능태와 잠세태로서 본질을 현실화 시켜가는 현실자가 되었다.
플라톤과 고대 기독교에 편만해 있던 본질과 실존의 괴리, 분열, 갈등, 불일치는 좁혀지고 무시되었다. 그러한 신념은 헤겔의 절대적 관념 철학에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말로 정식화되었다. 역사 진보의 낙관주의와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쉘링,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마르크스, 니체 등에 의해 헤겔의 관념적 본질주의가 비판받기 시작했다. 인간 실존과 세계 현실은 화해 상태에 있지 않고 곤궁 상태, 소외 상태에 있음을 절규하게 되었다. 실존적 불안, 삶의 무의미, 사회적 갈등과 착취, 존재의 허무성이 날카롭게 조명되면서 실존론적 사고와 사상이 다시 대두되었다. 그것은 고전적 의미로 말하면 실존과 본질 사이의 괴리 상태가 다시 문제가 된 것이다.
실존주의 사조에서 인간 분석과 사회 분석은 기독교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지라도 기독교의 기본적인 견해, 곧 현실적 인간실존과 세계 현실은‘죄와 죽음의 권세’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기독교가 옛 인간과 옛 세계를 치유하고 갱신할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환자가 치료를 받으려면 자기가 병든 상태임을 인정하고 의사에게 도움을 받으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실존주의 사상은 기독교의 복음 전파와 기독교 진리의 변증에 ‘도우미’가 될 수 있다.『조직신학』 제2권의 제목은 ‘실존과 그리스도’이다. 구세주, 메시아,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실존 분석과 함께 논함으로써 상관 방법에 따라 기독교 진리를 계몽 시대 이후의 ‘성숙한 현대인’에게 좀 더 효과적으로 변증한다. 「조직신학」 제2권, 20〜27쪽
되새김
실존주의 사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사회 전체를 풍미했던 시대 사조다. 실존주의는 철학, 문학, 심리학, 신학 등 전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실존주의 사상은 19세기 덴마크의 기독교 사상가 케르케고르와 러시아의 사상가 베르쟈에프, 문호 도스토옙스키뿐만 아니라 니체와 카뮈의 사상에도 나타난다. 철학계에서는 20세기 전반의 야스퍼스, 하이데거, 마르셀, 사르트르를 대표적인 4대 실존 철학자로 꼽는다.
틸리히의「조직신학」제2권은, 스코틀랜드에 에버딘 대학(Aberdeen University)의 세계적인 학술 강좌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s)에서 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쓴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 교수의『인간의 본성과 운명 (The Nature and Destiny of A/Aw)』도 기포드 강연의 산물이다. 요즘엔 실존주의 풍조는 약화되고 포스트모던 풍조가 강해졌다. 그렇다면 틸리히가『조직신학j 제2권의 신학적 내용을 변증하는데 지나치게 실존 주의적 사상과의 대화 속에서 그리스도론과 신학적 인간학을 다룬 것은 시대 상황적 제약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틸리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특정 시대를 풍미하는 철학 사조로 실존주의는 성쇠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곤궁, 고독, 내적 분열, 자기소외를 실존적으로 진지하게 성찰하면 언제 어디서든 실존주의가 문제로 제기했던 주제들이 대두되며, 그것은 기독교 복음의 전달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의 고전적인 탄식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 하는 실존적 절규는 모든 시대를 넘어 실존적 인간 분석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문제는 곧 모든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 구원의 근본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20세기 현대인들에게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라는 성경적 선포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적 상황에 대해 틸리히는 진지하게 생각한 것이다.‘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라는 기독교의 근본 주장이 시대 상황의 변화 때문에 오해되거나 변질 되었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다는 도리(道理)도 오해되거나 변질될 가능성이 있음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라는 기독교의 근본 주장이 주로
도덕적, 윤리적 의미로만 해석되어 살인이나 도둑질, 거짓말, 성적간음 행위등으로 해석된다면 현대인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사회가 일반적으로 용인하는 도덕적 중간 윤리 수준을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으세요!”라는 전도 용어가 그 본래적 진지성과 혁명성을 담지하지 못하고 따분한 도덕적 율법주의 타령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절규하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절망적 구원의 요청이 나올 리 없다.
키르케고르가『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갈파한 대로 인간은 자기 실존의 비참 상태에 빠져 절망하기 전에는 구원의 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영적 의사로서 신학적 인간학과 그리스도론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실존 분석, 심층심리학, 타락 설화의 새로운 관점으로 현대인이 왜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하는가에 대해 해석하고자 했다.
우선 틸리히는 '존재한다, 실존한다(to exist)’는 말을 라틴어 existere 에 대한 어원학적 분석을 통해 실존의 근본 문제를 성찰한다. 어원 분석은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 실재(실존)한다는 것은 로부터 나와 선다’는 뜻이다. 그 ‘무엇’은 비존재 (non-being)인데, 비존재를 표현하는 헬라어에는 철학을 낳은 후예답게 두 개의 단어가 있고, 각각의 단어는 서로 다른 뜻을 갖고 있다. 하나는 기독교 창조 교리에서 쓰는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할 때 의미하는‘절대적 비존재(absolute non-being/ ouk on)’이고, 다른 하나는「창세기」 1 장에 나타난 깊음과 혼돈과 어둠으로 묘사된 ‘상대적 비존재(relative non-being/me on)’이다.
존재함, 실재함을 ‘절대적 무’로부터 나와서 선다는 의미로 보면 존재하는 것, 실존하는 것(to exist)은 선물이고 기적이고 다시없음에로 되돌아갈 불안한 유한자로 자각된다. ‘상대적 무’로부터 나와서 선다는 의미로 보면 존재하는 것, 실존한다는 것은 가능태와 잠세태를 극복하고 현실태로 자신을 구현하고 실현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도 그 존재자 안에는 언제나 모호성과 혼돈의 불안정성이 동반된다.
두말할 필요 없이 실존주의적 관심은 우주가 왜 어디로부터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형이상학적 문제라든지, 심지어 베르그송의 생의 철학이 강조하는 생명현상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등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주체적 실존(Existenz)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실존적 체험 (das existentielle Erlebnis)이 중요하며, 모든 관심이 여기에 모아진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특이한 인간적 실존을 ‘현존재’라고 불렀고, 사르트르는 존재자 일반이 존재하는 방식인 ‘즉자적 존재’에 대비하여 실존 곧 현존재를 ‘대자적 존재’라고 불렀다. 실존, 현존재, 대자적 존재, 주체적 자아는 무엇이라 말하든 간에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유한한 존재’임을 미리 깨달으며,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임을 느끼고, 자기 존재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창조적 결단의 존재임을 안다.
실존주의 사상의 공통점으로 거론되는 명제, 곧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는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였으며, 현재는 인간 본질적 상태에서 소외된 상태, 타락한 상태라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질주의를 근본적으로 거절하기 때문이다. 인간 실존은 무 앞 에서, 죽음 앞에서, 세계 현실 앞에서, 타자 앞에서 스스로를 선택 결단하는 ‘자유’를 행사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모호성에 휩싸이기 때문에 책임적 자유라는 무거운 존재론적 짐을 회피하여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함으로써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하고 비인간화 된다.
현대인의 도피성은 국가주의, 정치경제적 이념과 그 제도 조직, 생물학적 본능, 문화 이념, 무제약적 예술성, 과학주의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 점에서 실존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근본적으로 갈라진다. 기독교는 인간의 본래성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하고, 단순한 무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의지와 행위에 의해 존재를 선물로 받은 피조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본질과 실존의 차이를 말한다. 본질은 창조와 인간성의 본래 모습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라고 기뻐하신 진선미가 충만한 생명 상태이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적 반란과 탐욕과 교만에 의해 생명 동산에 반란이 일어났고, 죄와 죽음의 권세가 생명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는 소외된 실존의 원형이며, 동시에 치유하는 능력이라고 고백하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복음의 변증을 위해 실존주의를 과감히 사용하지만, 실존주의를 넘어서 믿음에 의한 ‘존재에로의 용기’를 갖는다.
실존주의와 기독교의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을 너무 부정적으로 혹은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가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인간 소외, 자기 내면에서의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 무의미, 회의, 폭력성, 자기중심적 이기심, 무제약적 탐욕과 공격성 등을 실존적 인간의 현실 모습으로 부각하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기독교 신앙을 비관주의라고 보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원죄 (original sin)가 원복(original blessing)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비존재의 힘이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의 피조물 긍정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의 실존적 탄식과 절망은「로마서」8장 끝부분으로 오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一「로마 서」 8장 38~39절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
라틴어 엑시스테레(existere)에서 ‘존재한다(to exist)’라는 말은 그 어원적 의미가 ‘〜로부터 나와 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나와 선다는 말인가? 물음에 대한 답은 ‘비존재 (non-being)’이다. 즉, 비존재로부터 나와 선다는 것이다. ‘비존재’를 의미하는 두 개의 헬라 어가 있다. 하나는 ‘절대적 비존재(absolute non-being)’를 뜻하는 ouk on’이고, 또 하나는 ‘상대적 비존재(relative non-being)’를 뜻하는 me on’이다.
절대적 비존재(ouk on)로부터 나와 선다는 뜻이라면,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본래가 ‘없음’이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지만 유한하고 불안하고 언제나 무로 환원될 피조물로서 유한자가 된다. 다른 한편 ‘존재 한다’ 라는 말뜻이 ‘상대적 비존재(me on)’로부터 나와 선다는 뜻이라면 잠재적 가능적 상태에서 현실적 상태로 전환한다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현대 실존철학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그들 이 경험하는 실재(reality)에 본질적 레벨(essential level)과 실존적 레벨 (existential level)이 있음을 깨달았다. 플라톤 철학에 이르러 본질적 존재와 실존적 존재 사이의 갈등과 대립이 존재론적 문제나 윤리적인 문제로 뚜렷이 자각되었다.
플라톤에게 있어 존재하는 실존들은 그림자, 모방, 가치 없는 것, 마침내 악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학에서 인간의 현실적 실존은 본질적 상태인 이데아 세계로부터의 타락이거나 전락이라고 여겨졌다.
신플라톤주의가 기독교 발생기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침에 따라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는 현실 존재로서의 인간과 세계가 불완전 상태이며 무엇인가 본질적 상태에서의 이탈, 타락이라는 견해에 동감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에서 비록 본래적 창조의 선함을 교의적으로 말했을지라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본질과 실존의 괴리를 그의 ‘형상과 질료의 역동적 상호 의존성 교의’로서 플라톤주의를 수정했을지라도 대세는 뒤집지 못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로부터 계몽주의에 이르는 동안, 실존에 대한 새로운 느낌과 확신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어떤 본질적 존재 상태에서 나와 선다는 것은 타락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과 잠세성을 실현하고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성취하는 주체자일 뿐만 아니라 세계와 역사를 완성으로 이끄는 담지자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실존은 가능태와 잠세태로서 본질을 현실화 시켜가는 현실자가 되었다.
플라톤과 고대 기독교에 편만해 있던 본질과 실존의 괴리, 분열, 갈등, 불일치는 좁혀지고 무시되었다. 그러한 신념은 헤겔의 절대적 관념 철학에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는 말로 정식화되었다. 역사 진보의 낙관주의와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쉘링,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마르크스, 니체 등에 의해 헤겔의 관념적 본질주의가 비판받기 시작했다. 인간 실존과 세계 현실은 화해 상태에 있지 않고 곤궁 상태, 소외 상태에 있음을 절규하게 되었다. 실존적 불안, 삶의 무의미, 사회적 갈등과 착취, 존재의 허무성이 날카롭게 조명되면서 실존론적 사고와 사상이 다시 대두되었다. 그것은 고전적 의미로 말하면 실존과 본질 사이의 괴리 상태가 다시 문제가 된 것이다.
실존주의 사조에서 인간 분석과 사회 분석은 기독교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지라도 기독교의 기본적인 견해, 곧 현실적 인간실존과 세계 현실은‘죄와 죽음의 권세’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기독교가 옛 인간과 옛 세계를 치유하고 갱신할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환자가 치료를 받으려면 자기가 병든 상태임을 인정하고 의사에게 도움을 받으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실존주의 사상은 기독교의 복음 전파와 기독교 진리의 변증에 ‘도우미’가 될 수 있다.『조직신학』 제2권의 제목은 ‘실존과 그리스도’이다. 구세주, 메시아, 새로운 존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실존 분석과 함께 논함으로써 상관 방법에 따라 기독교 진리를 계몽 시대 이후의 ‘성숙한 현대인’에게 좀 더 효과적으로 변증한다. 「조직신학」 제2권, 20〜27쪽
되새김
실존주의 사상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사회 전체를 풍미했던 시대 사조다. 실존주의는 철학, 문학, 심리학, 신학 등 전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실존주의 사상은 19세기 덴마크의 기독교 사상가 케르케고르와 러시아의 사상가 베르쟈에프, 문호 도스토옙스키뿐만 아니라 니체와 카뮈의 사상에도 나타난다. 철학계에서는 20세기 전반의 야스퍼스, 하이데거, 마르셀, 사르트르를 대표적인 4대 실존 철학자로 꼽는다.
틸리히의「조직신학」제2권은, 스코틀랜드에 에버딘 대학(Aberdeen University)의 세계적인 학술 강좌 기포드 강연(Gifford Lectures)에서 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쓴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 교수의『인간의 본성과 운명 (The Nature and Destiny of A/Aw)』도 기포드 강연의 산물이다. 요즘엔 실존주의 풍조는 약화되고 포스트모던 풍조가 강해졌다. 그렇다면 틸리히가『조직신학j 제2권의 신학적 내용을 변증하는데 지나치게 실존 주의적 사상과의 대화 속에서 그리스도론과 신학적 인간학을 다룬 것은 시대 상황적 제약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틸리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특정 시대를 풍미하는 철학 사조로 실존주의는 성쇠를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곤궁, 고독, 내적 분열, 자기소외를 실존적으로 진지하게 성찰하면 언제 어디서든 실존주의가 문제로 제기했던 주제들이 대두되며, 그것은 기독교 복음의 전달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의 고전적인 탄식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 하는 실존적 절규는 모든 시대를 넘어 실존적 인간 분석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사도 바울의 문제는 곧 모든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 구원의 근본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20세기 현대인들에게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시오!’라는 성경적 선포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적 상황에 대해 틸리히는 진지하게 생각한 것이다.‘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라는 기독교의 근본 주장이 시대 상황의 변화 때문에 오해되거나 변질 되었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다는 도리(道理)도 오해되거나 변질될 가능성이 있음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라는 기독교의 근본 주장이 주로
도덕적, 윤리적 의미로만 해석되어 살인이나 도둑질, 거짓말, 성적간음 행위등으로 해석된다면 현대인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사회가 일반적으로 용인하는 도덕적 중간 윤리 수준을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받으세요!”라는 전도 용어가 그 본래적 진지성과 혁명성을 담지하지 못하고 따분한 도덕적 율법주의 타령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절규하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절망적 구원의 요청이 나올 리 없다.
키르케고르가『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갈파한 대로 인간은 자기 실존의 비참 상태에 빠져 절망하기 전에는 구원의 문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영적 의사로서 신학적 인간학과 그리스도론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실존 분석, 심층심리학, 타락 설화의 새로운 관점으로 현대인이 왜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하는가에 대해 해석하고자 했다.
우선 틸리히는 '존재한다, 실존한다(to exist)’는 말을 라틴어 existere 에 대한 어원학적 분석을 통해 실존의 근본 문제를 성찰한다. 어원 분석은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 실재(실존)한다는 것은 로부터 나와 선다’는 뜻이다. 그 ‘무엇’은 비존재 (non-being)인데, 비존재를 표현하는 헬라어에는 철학을 낳은 후예답게 두 개의 단어가 있고, 각각의 단어는 서로 다른 뜻을 갖고 있다. 하나는 기독교 창조 교리에서 쓰는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할 때 의미하는‘절대적 비존재(absolute non-being/ ouk on)’이고, 다른 하나는「창세기」 1 장에 나타난 깊음과 혼돈과 어둠으로 묘사된 ‘상대적 비존재(relative non-being/me on)’이다.
존재함, 실재함을 ‘절대적 무’로부터 나와서 선다는 의미로 보면 존재하는 것, 실존하는 것(to exist)은 선물이고 기적이고 다시없음에로 되돌아갈 불안한 유한자로 자각된다. ‘상대적 무’로부터 나와서 선다는 의미로 보면 존재하는 것, 실존한다는 것은 가능태와 잠세태를 극복하고 현실태로 자신을 구현하고 실현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도 그 존재자 안에는 언제나 모호성과 혼돈의 불안정성이 동반된다.
두말할 필요 없이 실존주의적 관심은 우주가 왜 어디로부터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형이상학적 문제라든지, 심지어 베르그송의 생의 철학이 강조하는 생명현상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등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주체적 실존(Existenz)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실존적 체험 (das existentielle Erlebnis)이 중요하며, 모든 관심이 여기에 모아진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특이한 인간적 실존을 ‘현존재’라고 불렀고, 사르트르는 존재자 일반이 존재하는 방식인 ‘즉자적 존재’에 대비하여 실존 곧 현존재를 ‘대자적 존재’라고 불렀다. 실존, 현존재, 대자적 존재, 주체적 자아는 무엇이라 말하든 간에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유한한 존재’임을 미리 깨달으며,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임을 느끼고, 자기 존재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창조적 결단의 존재임을 안다.
실존주의 사상의 공통점으로 거론되는 명제, 곧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는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였으며, 현재는 인간 본질적 상태에서 소외된 상태, 타락한 상태라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질주의를 근본적으로 거절하기 때문이다. 인간 실존은 무 앞 에서, 죽음 앞에서, 세계 현실 앞에서, 타자 앞에서 스스로를 선택 결단하는 ‘자유’를 행사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모호성에 휩싸이기 때문에 책임적 자유라는 무거운 존재론적 짐을 회피하여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함으로써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하고 비인간화 된다.
현대인의 도피성은 국가주의, 정치경제적 이념과 그 제도 조직, 생물학적 본능, 문화 이념, 무제약적 예술성, 과학주의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 점에서 실존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근본적으로 갈라진다. 기독교는 인간의 본래성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하고, 단순한 무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의지와 행위에 의해 존재를 선물로 받은 피조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본질과 실존의 차이를 말한다. 본질은 창조와 인간성의 본래 모습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라고 기뻐하신 진선미가 충만한 생명 상태이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적 반란과 탐욕과 교만에 의해 생명 동산에 반란이 일어났고, 죄와 죽음의 권세가 생명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새로운 존재’는 소외된 실존의 원형이며, 동시에 치유하는 능력이라고 고백하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은 복음의 변증을 위해 실존주의를 과감히 사용하지만, 실존주의를 넘어서 믿음에 의한 ‘존재에로의 용기’를 갖는다.
실존주의와 기독교의 신학적 인간학은 인간을 너무 부정적으로 혹은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가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인간 소외, 자기 내면에서의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 무의미, 회의, 폭력성, 자기중심적 이기심, 무제약적 탐욕과 공격성 등을 실존적 인간의 현실 모습으로 부각하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기독교 신앙을 비관주의라고 보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원죄 (original sin)가 원복(original blessing)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비존재의 힘이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의 피조물 긍정과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도 바울의 실존적 탄식과 절망은「로마서」8장 끝부분으로 오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一「로마 서」 8장 38~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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