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2022.11.24. 목요 cafe

작성자
akuc
작성일
2022-12-04 20:18
조회
165
노트 7

종교적 상징

예술이나 일상생활에서 상징이 지닌 일반적 성격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이 언급되어왔다. 그러나 상징(symbol)과 표지(sign)는 전혀 다르다는 통찰이 강조되어야 한다. 표지, 표식, 기호 등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과의 내면적 관계성을 지닐 필요가 없다. 표지는 필요나 편의에 따라 언제나 약속하면 변경 가능하다.
그러나 상징은 상징이 지시하는 그 실재에 존재론적으로 참여한다. 상징은 어떤 상징물을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인간 집단과 상징물에 의해 매개되는 어떤 실재와의 상호 관련성(correlation)에 따라 탄생하고 성장하고 소멸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상징은 양면성을 지닌다. 종교적 상징은 한편으로는 상징들이 상징하려고 하는 무한자를 향하고, 다른 한편으로 무한자를 상징하는 매개물로서의 유한자를 향한다.
상징은 무한한 것을 유한성으로 끌어내리고, 유한한 것을 무한성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적 역할을 한다. 거기에 상징의 위험성이 있다.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 자체와 동일시하려는 상징의 우상화 위험, 상징을 실증적 사실로 폄하하는 세속화의 위험이 그것이다. 「조직신학」제 1권, 239-240쪽

되새김

틸리히의 신학뿐만 아니라 모든 신학과 종교 담론에서 상징의 문제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틸리히 신학은 상징의 신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사회가 세속화되고 비종교화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 문명사회에서 ‘신성한 것’, ‘궁극적 실재’를 매개해주던 상징과 상징 기능이 모두 변하거나 호소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흔히 “종교란 결국 종교적 상징체계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상징이 종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지를 말함과 동시에, 종교가 말하려는 진리, 구원, 치유 등이 종교적 상징을 통해 표현되고 구성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흔히 인간의 특징을 말할 때 ‘사유하는 인간(Homo sapiens)’이라는 표현과 함께 ‘상징의 동물(animal symbolicum)’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인간에게만 상징 능력이 있으며 상징을 필요로 하는가?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종(種)은 오랜 진화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적으로 말하면 창조의 여섯째 날에 이르러 하나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지각 활동이나 의식 활동을 넘어서서 “스스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반성적 자기의식(reflective self- consciousness)이 창발되었다”(테이야르 드 샤르댕)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지각 활동과 의식 활동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동식물에 도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 현상을 다시 한번 되새김하는 방식으로 ‘반성적 사유 능력’을 갖기 때문에 ‘자의식(自意識)’이 생긴다.
인간도 자연의 엄정한 인과율과 시공간적 조건의 제약을 받으면서 생존하지만 자연과 역사에 유폐당한 채 갇혀 있지는 않다. 언어생활, 상상력, 미래에 대한 꿈, 희망, 운명에의 도전 등을 통해 ‘자기 초월적 존재(self-transcendental being)’가 된다. 그러나 인간의 이 독특한 자기 초월 능력은 인간의 유한성에 의해 제한되고 난파당해 좌절되곤 한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상징 행위’가 가능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종교는 ‘상징체계’라고 말하는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기독교 예배 행위와 전례(典禮) 진행 과정을 잠시 되돌아본다. 우선 예배 행위가 일어나는 교회당이나 성당의 고딕식 건축 양식, 출입문이나 창틀의 부레 모형(vesica piscis), 제단의 촛불,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상과 모형, 촛대의 모양과 숫자, 설교단의 높이와 위치, 성직자의 예복과 문양, 제단에 바치는 예물과 헌금, 무엇보다도 가톨릭 교회의 미사 전례 등은 상징을 모르고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대웅전에 모신 삼존불상, 탱화, 단청 무늬와 색상, 범종과 연화대, 나무로 만든 큰 물고기 모양의 목어(木魚), 석탑과 가람 배치 등이 모두 상징적이다.
틸리히의 상징신학에서 강조하는 점은 상징과 표지의 차이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의 십자고상(十字苦像)과 태극기, 달마상은 상징이지만, 네거리 신호등과 올림픽 오륜기, 대통령 연설대에 새겨진 쌍봉황은 표지이다. 물론 표지도 함부로 취급하거나 다루면 안 된다. 하지만 표지는 주로 지시 기능을 하기 때문에 합의에 의해 변경할 수 있다. 네거리 신호등의 적색은 ‘정지’ 표시지만, 시각적으로 너무 자극적이라는 시민 다수의 의견이 모아지면 주황색으로 바꿀 수 있다. 대통령의 문장 무늬도 쌍봉황 날짐승이 아니라 황금 사자로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십자고상, 태극기, 달마상 등은 합의에 의해 쉽게 바꿀 수 없다. 상징은 단순히 ‘지시 기능’이 아니라, 상징하려는 어떤 ‘실재의 의미와 힘’을‘지시(pointing to)하면서 동시에 그 의미와 힘에 참여(par­ticipation) 하는 기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고상을 밟거나 침을 뱉고 지나가면 살려준다는 박해자의 강압을 거부하고 순교를 택하는 것이다. 태극기는 동양의 우주론과 음양오행론을 바탕으로 만든 대한민국의 국기이면서 한민족이 겪어온 시련의 역사를 상징한다. 따라서 태극기를 불태우는 것은 국가를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 종교적 상징의 기능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상징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종교에서 중요하게 여겨진다.
상징은 단순한 기호나 평면적인 표지 기능을 뛰어넘는다. 상징은 실재계의 다양한 양태와 구조를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종교사에는 우주목 상징(宇宙木 象徵, the symbol of cosmic tree)’이 있다. 성경에서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에덴동산의 한가운데에 있다고 말한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사람들이 신성시 하는 중심 나무가 있다. 그때 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우주의 중심을 상징한다. 하늘 보좌와 마을의 중심 그리고 땅의 중심을 잇는다고 믿는다. 우주목은 세계가 살아 있는 유기적 관계 속에 있는 전일적 실재이며, 끊임없는 재생과 창조적 생산력의 상징이 된다.
상징은 단순한 단어나 문장이 수행하지 못하는 다의적(多意的) 의미를, 혹은 실재가 지닌 다차원(多次元)의 의미를 하나의 상징물로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중층적(重層的)이거나, 심지어 모순되는 실재의 면모를 하나의 상징으로 드러낸다. 예를 들어 모든 종교에서 성인식이나 세례식에서의 ‘물의 상징’을 생각해보자.
기독교의 입교 예식에서 유아 세례나 성인 세례를 할 때 물을 사용한다. 개신교의 세례식에서는 ‘죄를 씻는다’는 정화(淨化)의 상징성이 강조되지만 다른 의미도 담겨 있다.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첫째, 물은 태초의 혼돈을 상징한다. 위험, 혼돈, 죽음, 해체의 상징이다. 옛사람의 죽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세례는 거듭남, 곧 중생을 상징한다. 둘째, 물은 정화 기능을 상징한다. 물은 온갖 오물을 씻어내고 깨끗하게 한다. 지난 죄를 씻고 정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는 속죄와 속량을 상징한다. 세례식에서는 우유나 향수를 성수로 사용하지 않는다. 맑고 순수한 물을 사용한다. 셋째, 물은 생육과 성장과 번성을 상징한다. 신성의 씨앗이 발아하여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중세의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현대의 가톨릭 교회에서는 개신교에 비해 훨씬 더 상징신학이 발전했으며 교회의 모든 예전에 성례전적 (sacramental) 비의(秘議)를 보존한다. 가톨릭 교회 전통의 성례전과 상징신학에 비해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에서는 성례전과 상징신학은 약해지고 ‘말씀 중심’과 신자 개개인의 인격적 결단과 의지의 선택이 강조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세 기독교와 현대 가톨릭은 보다 성례전적 상징신학 체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는 보다 의지적 윤리 종교로서 말씀 중심의 신앙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위에서 거칠게 단순화시켜 대비한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의 특징은 서양 철학사에서 ‘보편자(the universals)’ 논쟁이라고 일컫는 실재관 논쟁에서 관점의 차이, 곧 중세적 실재론(實在論, realism)과 근대적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의 차이에서부터 유래한다. 철학적 개념은 시대에 따라서 정반대 개념으로 변하기도 해서 혼동을 일으킨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 1274)로 대표되는 중세의 실재론은 현대 사상에서 보면 관념론에 해당하고, 윌리엄 오캄(William of Ockham, 1285〜1349)으로 대표되는 유명론은 현대 과학의 객관적 실재론에 해당한다.
보편 논쟁의 의미에 대해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대표로 하는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 대부분은 실재론자(중세적 의미에서)였다. 실재론에 의하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 최 아무개 등 수많은 개인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구체적인 개인으로 존재하기 전에 인간이라는 실재, 혹은 인간성, 인간임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개별자는 그 보편자‘인간, 인간성, 인간임’의 속성을 분여 받고 인간본질 혹은 본성에 참여하기 때문에 인류적(人類的) 의식이 가능하다. ‘사람’이라는 보편자는 개인들의 마음이나 의식밖에 이미 앞서서,‘사물에 앞서서(ante res)’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보편 본질이 단지 추상적 호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힘’을 가지며, 따라서‘실재성’을 갖는다는 신념이다.
위의 입장과 대조되는 유명론(唯名論)은 개별 사물과 개별 인간만이 실제로 존재하고, 보편자 곧 ‘인간(manhood)’이라는 보편 개념은 개별적 사물과 개인들의 실재성 이후에 인간 의식이 이름 붙여놓은 추상적인 집단 명칭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즉, 보편자는 ‘사물 이후에 (post res)’ 인간이 사유 속에서 종합한 개념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유명론적 실재관은 개개인의 개체성, 인격성, 사유 능력과 의지적 판단, 개인의 주체적 수용과 참여 등을 중요하게 여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오캄의 유명론을 지지했다.
우리는 지금 틸리히 신학의 상징론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다. 그러다가 잠시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시대에 중요하게 벌어졌던 철학적 논쟁점인 보편 논쟁에 대해 회상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가 보다 성례전적이며 상징신학이 아직도 강한 데 비하여 개신교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된 이유가 위에서 살펴본 보편 논쟁과 사상사적으로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상징론에서 본다면 중세 실재론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새롭게 계승하고 있다. 틸리히의 상징론에서 근본 명제, 곧 "상징은 상징이 상징하려는 실재의 존재론적 힘과 의미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틸리히는 개신교 신학자로서 개신교 원리를 존중한다. 상징이 지시하고 매개하는 그 ‘힘과 의미’ 에 개인 인격체가 응답하는 참여적 결단 의지, 곧 ‘믿음과 신뢰’를 강조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가톨릭 교회가 성례전으로 간주하던 일곱 가지 성례(유아 세례, 견신례. 사제 서품례. 참회 고해성사. 혼배성사, 종부성사, 성찬미사)중에서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 성례전으로 받아들였다. 성례전 중에서 성만찬 예식의 상징성이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에서 어떻게 달리 나타나는지, 또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가톨릭 교회의 경우, 스콜라신학과 중세의 모든 신학이 실재론적 성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의 도전에 맞서서 트렌트 공의회(1545〜1563)에서 다시 한번 성례전의 근본 입장이 재차 확인되고 선언되었다. 정당하게 서품을 받은 성직자에 의해 집례되는 성례전은, 성례전 그 자체의 고유한 힘에 힘입어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효력을 미친다. 다시 말해 성례전에 참여하는 평신도의 주관적 입장, 태도, 역할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품을 받은 가톨릭 성직자에 의해 규정대로 집례되는 성례 의식 그 자체에 의해서 신비한 능력이 초자연적으로 작동하고 영향을 끼친다.
가톨릭 집례에서 가장 중요한 성례인 ‘미사’는 사제가 성례전을 통해 ‘그리스도 몸의 희생 제사’를 반복함으로써 ‘빵과 포도주’가 성체(聖體)로 변화하고 성별된다. 이것을 소위 화체설(化體說)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의 강조점은, 실재론자들에게 있어서 개별적 개인들에 앞서서 인간 본질이 독립적으로, 보다 온전한 양태로 존재하듯이,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이 성별된 성체 안에, 그것과 함께 현존한다는 신념적 고백이다.‘미사’가 끝난 뒤에도 한번 축성된‘떡과 포도주’는그 신성성을 담보한다. 교회는 단순히 개인 신자들이 모여서 이루는 종교법인체가 아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거룩한 것’,곧 그리스도의 구원능력과 은총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거룩한 실재다. 중세 가톨릭교회에 있어서는 신적인 것이 성례전의 형식을 통해서 세계에 현존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에 의해서 중세 1 천 년을 지배해오던 가톨릭교회의 성례주의는 커다란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되었다. 루터는 본래 어거스틴파 수도사요 성례를 집례하는 사제였기 때문에 가톨릭교회의 성례전, 특히 ‘고해성사 참회 ’와 ‘성찬미사 전례’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존중하며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당시 중세 가톨릭의 성례전이 교황권을 중심으로 하는 성직 질서가 은총의 매개자로서, 성례전의 집례자로서 그 권위를 남용하고 변질시키는 점에 대해 항의한 것이다. 한마디로 거칠게 말한다면,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은 객관적 사물처럼 되고, 거룩한 물품처럼 거래 되고, 기계가 자동으로 찍어내는 공산품처럼 사제가 행하는 예식 집행에 따라서 (ex opere operato) 마법적 구원의 약이 제조되고 배급되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틸리히의 상징론에 의하면, 특히 종교적 상징이 상징으로서 건전하게 그 역동성을 지속하려면 상징물이나 상징 행위가 지시하는 ‘객관적 실재’(하나님의 은총, 그리스도의 속죄, 성령의 능력)와 그것을 수용하고 응답하고 참여하는 ‘주관적 실재’(믿는 자의 신앙고백과 결단)가 밀접하게 상관관계(correlation)를 이루며 함께 작동해야 한다. 후자가 무시되고 전자만 강조되면, 성례전은 유사종교적 ‘마술’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반대로 ‘객관적 실재’가 약화되고 ‘주관적 실재’만 강조되면 성례전은 종교가 담당하는 상징적 성례(聖禮)가 아니라 기껏해야 역사적 ‘기념식’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전자의 위험은 가톨릭교회가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이고, 후자의 위험은 개신교가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가톨릭의 화체설이 극단적 우파라면, 츠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의 ‘회상과 고백으로서의 성례전’은 극단적 좌파 입장이 된다. 츠빙글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성만찬을 통해 회상하고 신앙 공동체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의지의 표식으로서 성례전은 독특한 표징 예식이다. 교리사는 츠빙글리의 입장을 ‘기념설’이라고 불렀다. 마틴 루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비록 영적 몸이지만 ‘몸으로서의 성찬 예전에 현존’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믿는 신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보편적 편재’를 믿는 일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찬 예식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가톨릭의 화체설)은 아니지만,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와 함께 계신다는 견해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른바 루터의 성찬론에서 말하는 ‘공재설(共在說)’이다.
칼빈의 주장은 가톨릭의 화체설, 루터의 공재설, 츠빙글리의 기념설과는 다르다. 마지막 제자들과 함께한 이별의 식탁에서 제정하시고 계승해가라고 명하신 최초의 성찬, 그리스도의 골고다 언덕 위에서의 원초적인 속죄 고난, 예배에서 성직자에 의해 집례되는 예전으로서의 성찬식, 그리고 거기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사건으로 재현되는 참여적 성찬 체험, 이 네 가지 사건은 성령의 감동 감화에 의해 ‘하나의 동시적 사건’으로 통전된다. 이른바 ‘성령감화설’이다. 칼빈의 성령감화설은 개혁파 신학 전통의 성서 해석에서 ‘성령의 내적 증언’과 맥을 같이한다. 또한 한국의 민중신학자 서남동이 말하는 성서 해석학. 이른바 성령론적-공시적 해석(pneumatological-synchronical interpretation) 과 통한다.
성령의 감동 감화 안에서 “이것은 내 몸이다. 내 피다”라는 성찬식의 핵심 예전어(禮典語) ‘이것은 〜이다(is, est)’라는 말씀의 뜻이, 가시적 물질과 불가시적 영적 몸 사이에 분리나 동일화를 초극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상징’이 된다. ‘상징’ 안에서 초월적인 것과 내재적인 것,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이 만나고 잠정적으로 하나가 된다. 그때 구원, 곧 치유와 자유와 해방과 샬롬이 현실화 된다.
상징신학 담론에서 성찬 예식의 상징적 의미 해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말씀의 상징’이다. 특히 개신교에서는 올바른 예배의 필요충분조건으로 “성례전이 바르게 집례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 되는 곳에 참 교회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the word of God)’이라는 표현보다 더 오․남용되는 신학적 언어도 찾기 힘들 것이다. 흔히 ‘설교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이처럼 위험하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한 신학적 언어가 없을 것이다. 잘못하면 신성모독과 참람함의 극치가 될 수 있다. 어떻게 인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가?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 보수 신학 캠프 쪽으로 다가갈수록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모든 표현은 ‘상징적 의미 ’에서 타당한 것이다.
성경 말씀 안에 기록되고 선언된 말씀이 신성한 하늘의 ‘초자연적 정보(supernatural information) 를 알려주는 일, 그리고 계시된 말씀들(revealed words)’이라는 표현이 있어서 자못 혼란스럽다. 예를 들어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이 계시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며, 증언된 예언의 말씀을 제하거나 더하면 재앙을 받고 생명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경고한다(계 22:18〜 19).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에 유익하다”(딤후 3:16).
틸리히는 계시의 매개로 세 가지 범주를 제시한다. 첫째 범주로는 하늘, 땅, 나무, 바위. 바람, 별, 홍수, 가뭄, 계절의 순환 등 자연의 사물과 사건이 ‘계시의 매개들(the mediums of revealation)’이 될 수 있다. 둘째 범주로는 혁명, 전쟁, 왕조와 문명의 흥망성쇠, 통치자의 악정과 선정 등 역사적 사건이 ‘계시의 매개들’이 될 수 있다. 셋째 범주로는 영웅 탄생, 예언자 소명, 메시아적 왕의 등극, 지혜 현자의 생몰 등 인격적 존재들이 ‘계시의 매개들’이 될 수 있다. 어떤 매개라도 그것들이 계시로서 의미를 가지려면 ‘언어’에 담기고 언어에 의해 언표 되고 언어로 해석됨으로써 계시 기능을 할 수 있다.
언어가 계시적 매개가 되는 것은 구체적인 언어 체계들, 곧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중국어, 영어. 한국어 등의 ‘언어 의미론(seman­tics)’ 이전에 그러한 언어 문법 체계와 발음 구조를 가능케 하는 ‘존재의 집으로서 언어’(하이데거), 언어성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담론 주제가 된다. 틸리히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다양한 언어들은 하나님의 언어성이랄 수 있는 ‘로고스’에 근거한다. 로고스는 실재와 사람 마음의 공통적인 합리적 구조 (the rational structure of reality and mind)’이다.

소박하게 생각하는 신자들은 하나님과 성령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세계 모든 언어 체계를 알고 계실 터이니 계시를 받는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그때마다 활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리 하나님의 특별 계시 말씀이라고 해도, 일반적인 인간의 언어학적 문법, 의미론, 언어 구조를 떠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 뜻, 계획 등이 전달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하나님은 단순한 우주 원리거나 자연법칙이 아니시다.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지혜, 지성, 뜻, 사랑의 의지를 지니신 로고스적 신성(Godhead)이라고 믿는다.
계시란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사건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행위와 뜻과 문법’이 로고스다. 이 로고스가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생명체로 특별하게 육화되어 나타나셨다. 예수의 입에서 발화된 말씀들만이 아니라 ‘예수’라는 생명체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 현실을 목도하여 놀라고 감격한 사도들의 증언집이 ‘성경’이다. 성경에 기반을 둔 설교자의 말씀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육신이 되는 말씀’을 자기 시대의 상황에서 새롭게 증언하 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상징은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징하려는 본질적 실재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개신교의 ‘설교’는 말씀을 매개로 하는 고도의 ‘상징 행위’이다. 그 말씀이 사람을 뒤흔들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심판하고 구원하는 힘으로 작용할 때, 설교 말씀은 그 상징적 책임을 완수한다. 성례전은 ‘시각적 눈으로 보고 마음의 눈으로 듣는 말씀’ 이고, 설교는 ‘청각적 귀로 듣고 마음의 귀로 보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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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7. 9. 금요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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