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다윗이 울부짖다

성령강림절  열두번째 주일 / 8월 두번째 주일
사무엘기하 18:31-33, 에베소서 4:25-32
성령강림절, 다윗이 울부짖다
정해빈목사

 

어느 종교이든지 그 종교의 경전을 보면 공통적으로 천지창조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지창조 이야기를 보면 그 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제일 먼저 빛을 창조하셨고 순서대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남자와 여자를 똑같이 창조하셨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종교이든지 그 종교 경전의 1장이 중요합니다. 1장을 읽으면 그 종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아름답습니다. 혼돈과 흑암과 무질서가 물러가고 빛이 들어왔고 온 세상에 생명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갈등이나 싸움이나 죄악이 없습니다. 창세기 1장만 읽어도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창조하셨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돌보게 하셨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종교의 창조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나라가 망한 후에 포로가 되어 바벨론 제국으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바벨론 종교의 창조 이야기, 수메르 신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창조 이야기는 끔찍합니다. 마르둑이라는 신과 티아마트라는 신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마르둑이 티아마트의 시체를 둘로 나누어서 한쪽을 위로 던져서 하늘을 만들었고 또 한쪽을 밑으로 던져서 땅을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마르둑은 흙에다가 죽은 티아마트의 피를 섞어서 인간을 만든 다음에 신을 시중드는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바벨론 창조 이야기에 의하면 전쟁에서 패배한 신의 시체를 통해서 세상과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바벨론 종교의 창조 이야기가 무섭고 폭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를 보면 그 종교가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인지 아니면 폭력을 사용하는 종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에게도 단군신화와 천지창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옛날 하늘에 환인(桓因)이라는 신이 있었는데 환웅(桓雄)이라는 아들이 인간세상을 돕고자 하여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서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에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하늘의 지혜와 기술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느 날 곰과 호랑이가 환웅을 찾아와서 인간이 되고 싶다고 말하자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면서 이것을 먹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호랑이는 100일을 견디지 못했고 곰은 100일을 견뎌서 여자가 되었고 환웅과 여자가 결혼해서 단군이 태어났습니다. 우리 민족의 천지창조 이야기도 창세기처럼 아름답습니다. 홍익인간이라는 뜻도 아름답고 신과 인간과 동물이 서로 만나는 이야기도 아름답습니다. 단군신화에는 전쟁이나 갈등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서양의 천지창조 이야기는 살벌합니다. 서양의 문화는 그리스 문화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리스 신화를 보면 아버지와 아들이 권력을 놓고 갈등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늘의 신과 땅의 신이 만나서 시간을 지배하는 크로노스를 낳았습니다. 크로노스는 아버지 우라노스를 제거하고 모든 신들의 왕이 됩니다. 크로노스는 아들 제우스를 낳았는데 이번에는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를 제거하고 모든 신들의 왕이 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제거하고 왕이 되니까 또 그 아들의 아들이 아버지를 제거합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권력을 놓고 아버지와 아들이 다툼을 벌이는 문화가 서양 문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류는 시간이 흐르면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름다운 창조 이야기나 단군 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 이야기를 버리고 권력 다툼을 벌이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크로노스와 아들 제우스가 싸우는 그리스 신화가 인류 역사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권력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들 모두는 죄인이고 가인의 후손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면서 성을 쌓았습니다. 힘이 세고 남의 것을 빼앗는 가인이 인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사무엘기하 18장에도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이 권력 다툼을 벌이다가 압살롬이 죽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명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인 다말을 욕보인 일이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화가 났지만 암논이 맏아들이기 때문에 책망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은 아버지와 배 다른 형 암논에게 앙심을 품었고 2년쯤 지난 뒤에 암논을 죽이고 도망을 갑니다. 아버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으니까 맏아들 암논도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망다니던 압살롬은 시간이 지나서 왕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압살롬은 아버지를 밀어내고 왕이 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백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 끝에 결국 아버지를 쫓아내고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기하 18장을 보면 다윗의 부하들과 압살롬의 부하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을 때 다윗이 부하들에게 압살롬이 아직 철이 없으니 나를 보아서라도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다윗의 부하 요압은 다윗의 부탁을 거절하고 압살롬을 죽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통곡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압살롬아,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야 할 맏아들 암논은 다말을 간음한 것 때문에 압살롬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압살롬은 반역을 꿈꾸다가 죽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군사령관 요압은 다윗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가 왕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한때 하나님께 사랑받고 백성들에게 사랑받았던 다윗이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예언대로 다윗의 집안에 칼부림이 그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교만하고 범죄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신중하게 처신하였더라면 그는 이런 비극을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에베소서 4장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새로운 삶, 새로운 생활윤리를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요즘 에베소서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 일상생활에 대한 좋은 가르침이 에베소서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변화받고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들은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거짓을 버리고 참된 말을 해야 하고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해야하고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은 이제부터는 수고를 하면서 제 손으로 떳떳하게 일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보며 슬퍼하시고 탄식하신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을 버리고 서로 친절히 대하고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도덕 교과서처럼 너무 당연한 말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에베소서의 말씀과 반대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바벨론 신화도 마찬가지고 그리스 신화도 마찬가지고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갈등하고 다투고 싸우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 뒤에 숨어서 댓글로 상대방을 비방하고 혐오를 부추기고 가짜 뉴스를 퍼트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다윗이 죽은 압살롬을 생각하며 크게 울부짖었던 것처럼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다윗이 울부짖었던 것처럼 성령을 떠난 삶은 고통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허물많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덕을 세우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을 슬프게 하는 삶이 아니라 성령님을 기쁘게 하는 그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