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후 다섯번째 주일/7월 두번째 주일
성령강림절,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다
누가복음 10:25-37
정해빈 목사
오늘 우리가 읽은 이번 주일 성서일과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설명하려고 할 때 그냥 말하기보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도 청중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비유를 주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 두가지를 말하라면 “탕자의 비유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너무 유명한 이야기라서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이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인 반 빈센트 고흐도 “선한 사마리아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저는 오늘 이 이야기가 강조하는 3가지 주제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 주제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율법교사, 제사장, 레위 사람, 이렇게 3명의 종교지도자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에 쓰여진 대로 네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니까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율법교사가 자기지식을 자랑하고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계속 질문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길에 쓰러졌는데 제사장도 그 옆을 피해서 지나갔고 레위 사람도 그 옆을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유대교를 대표하는 율법교사, 제사장, 레위 사람 모두 이웃의 아픔에 무감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강도만난 자를 지나친 것은 그들이 율법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자신들도 거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강도만난 자를 도와주면 피가 옷에 묻어서 더러워지니까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본래 뜻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상을 거룩하게 하라는데 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다면 그 사람이 지금 더러워져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씻기고 치료해서 거룩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열심히 성경읽고 기도하는 것은 나의 경건생활을 위해서 좋은 일이지만 나의 경건이 나의 개인적인 경건에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자비로우니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거룩한 교회가 되자고 말하기 보다는 우리 교회가 자비로운 교회가 되자고 말하는 것이 더 옳습니다. 본래 거룩과 자비는 같은 뜻인데 거룩을 말하면 자꾸 개인적인 거룩을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거룩을 자비로 바꾸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개인적인 거룩에 집착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귀족이 되었기 때문에 이웃의 아픔에 무감감했습니다. 종교지도자가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탐하면 귀족이 되어서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귀족이 되니까 강도만나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귀찮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저 같은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성범죄를 저지르고, 교회 돈을 착복하고, 가짜뉴스를 퍼트리면서 정치권을 기웃거리고, 불법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목사들의 위선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종교지도자가 혼자서만 거룩한 척 하지 말고, 귀족처럼 살지 말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에서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지도자들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가 혹시 여기 나오는 타락한 종교지도자는 아닌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두번째 주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은 유대인들이 평소에 무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면, 자신이 평소에 존경하는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고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는데 자신이 평소에 무시했던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을 구해 주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은 이 일을 통해서 자신이 사마리아 사람을 무시했던 것을 회개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도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라가 둘로 갈라졌는데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며 대립했습니다. 남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윗/솔로몬의 후손이고 예루살렘 성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족의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고 북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한 후에 앗시리아에 의해서 피가 섞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모세의 후손이고 12지파 중에서 10지파의 후손이기 때문에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페르시아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사마리아에서 살던 사람들과 충돌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여튼 정통 유대인들은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에 대한 반감이 있었는데 정작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은 자신이 평소에 무시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설명하면 어떤 기독교인이 강도를 만나 쓰러졌는데 평소에 존경하는 카톨릭 신부님도 그냥 지나가고 개신교 목사님도 그냥 지나갔는데 평소에 안 좋게 생각했던 이슬람교인이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이냐, 그 사람의 종교가 무엇이냐, 그 사람의 지위가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는 나보다 더 선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들은 청중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는데 자신들이 무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누가 나의 이웃인가 아닌가 따지지 말고 고통받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구해 준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이 이야기는 우리 안에 있는 편견, 우리가 더 옳고 우리가 더 정통성이 있다는 편견을 벗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이 이야기의 세번째 주제는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다는 주제입니다. 1970년대 토론토대학에서 공부하시고 민중신학을 연구하셨던 서남동 목사님은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이 우리의 메시야라고 말했습니다. 나를 구해주고 나에게 깨달음을 주는 사람이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이 나의 메시야가 될 수 있을까요? 강도만난 사람 입장에서는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을 구해주었으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의 메시야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입장에서는 강도만난 사람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그 사람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강도만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의 메시야가 될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사마리아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이기적인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였고 이 사랑을 통해서 자신도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메시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을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다”로 정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이 예수님이요 우리의 메시야 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사람에게 물 한잔 주는 것이 바로 나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메시야를 만나야 하는 것처럼, 구원받으려면 지금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귀족처럼, 짐승처럼 살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 수 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것이고 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은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강도만나 피 흘리는 사람이 예수님이고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라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십시다. 아멘.
Pentecost, each other saves one another
Luke 10:25-37
Just then a lawyer stood up to test Jesus. “Teacher,” he said,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He said to him, “What is written in the law? What do you read there?” He answered,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and your neighbor as yourself.” And he said to him, “You have given the right answer; do this, and you will live.” But wanting to justify himself, he asked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Jesus replied, “A man was going down from Jerusalem to Jericho, and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who stripped him, beat him, and went away, leaving him half dead. Now by chance a priest was going down that road; and when he saw him, he passed by on the other side. So likewise a Levite, when he came to the place and saw him, passed by on the other side. But a Samaritan while traveling came near him; and when he saw him, he was moved with pity. He went to him and bandaged his wounds, having poured oil and wine on them. Then he put him on his own animal, brought him to an inn, and took care of him. The next day he took out two denarii, gave them to the innkeeper, and said, ‘Take care of him; and when I come back, I will repay you whatever more you spend.’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the robbers?” He said, “The one who showed him mercy.” Jesus said to him, “Go and do likewise.” (Luke 10:25-37)
The well-known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gives us three spiritual messages. First, Jesus rebuked the hypocrisy of the religious leaders of Judaism. The scribe tried to testify Jesus with knowledge, and the priest and the Levite in the story did not save the man who was robbed on the road. Perhaps they would have considered personal piety more important than helping neighbors in need. They thought that the person who was shed on the road was dirty and passed by him. It would have been more important for them to go to the temple than to save those in trouble. They paid more attention to piety than to mercy. But Jesus said mercy was more important than piety. Jesus accused the fallen religious leaders who had already become nobility. The second theme of today’s story is about the good Samaritan. Surprisingly enough, the person who helped the fallen man on the street was not the religious leaders that the Jews usually admire, but the Samaritan that the Jews usually ignore. A person who was helped by the good Samaritan would have repented that he had ignored him before. Historically, the Orthodox Jews living in the south have long despised the northern Samaritans. In their view, the Samaritans were “unclean” people, mixed with foreign nations. But today’s scripture teaches that it is more important to practice love, not to find the nationality, religion, and status of a person. This story helps us not only to get rid of the prejudices that are in us but also to realize that others can practice love more than we do. The third theme of this story is the realization that each other is saving each other. Rev., Seo, Nam-Dong who studied Minjung Theology insisted that the man who met the robber on the roadside is our Messiah.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person who was robbed, since the Samaritan saved himself, the Samaritan became his Messiah. On the other hand, since the Samaritan had the opportunity to save the person who was robbed, the person who was robbed become the Messiah of the Samaritan. Through the practice of love, they became Messiah to each other. More precisely, the person who bleeds on the road is Jesus and our Messiah. If we do not want to be selfish like nobles and beasts, we must meet the person who is suffering now. If we pass someone who is in trouble, God will reprove us, and if we help that person, God will praise us. Today’s story makes us realize that the suffering person is the Messiah who will save u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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