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다섯번째 주일 / 6월 세번째 주일
사무엘기상 17:43-49, 고린도후서 6:6-10
성령강림절, 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정해빈목사
1989년 6월 5일 중국 정부가 민주화 시위를 하는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탱크를 진입시켰을 때 한 청년이 탱크를 가로막고 있는 장면이 전세계에 방송된 적이 있었습니다. 선두에 선 전차가 방향을 틀어서 행진하려고 하였지만 이 학생은 계속해서 전차의 행진을 온 몸으로 막았습니다. 이 청년이 탱크 앞에 서 있는 사진은 중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93년 캘리포니아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에린 브로코비치는 본래 가난한 이혼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중 미국의 거대 에너지 회사 PG&E가 불법으로 중금속 크롬을 방출시켜서 수질오염을 일으켰고 이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암으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 사실을 회사가 알게 되었습니다. 회사는 그녀에게 뇌물을 주며 회유하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하였고 수백 명의 피해자와 함께 소송을 제기해서 소송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 사건을 다룬 [에린 브로코비치] 영화가 2000년에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1955년 12월 1일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퇴근길에 버스에 탄 흑인 여성 로자 파크는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하였고 이것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남부지역에서는 버스, 극장, 학교, 식당 등에서 백인과 흑인의 자리가 구별되어 있었는데 로자 파크는 여성의 몸으로 조용하게 비폭력적으로 불의에 저항하였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미국에서는 1950-1960년대 본격적인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의 한 청년은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려는 군부세력과 맞섰고 캘리포니아의 한 백인 여성은 거대 에너지 회사와 맞섰고 앨라배마의 한 흑인 여성은 인종차별의 거대한 벽에 맞섰습니다. 그것은 마치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에 맞서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골리앗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특별한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발걸음이 옳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뜻이 옳았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고 잘못된 골리앗의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장벽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중국의 청년과 두 여성의 이야기는 예외적인 경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의한 장벽이 거대하다고 하더라도 그 불의한 장벽이 영원이 계속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올바른 뜻과 명분을 가지고 조용하게 실천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서 잘못된 사회는 무너질 것이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사무엘기상 17장은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물맷돌로 쓰러트리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사무엘기상 17:1절에 의하면 블레셋 족속은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이스라엘도 이에 맞서 사람을 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래 블레셋 민족은 에게해(그리스와 터키 사이)에서 사는 해양민족이었는데 동쪽으로 이주하여 가나안 해안가에 정착했습니다. 그들은 철기문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 가나안에서 가장 강력한 민족이 블레셋 민족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가나안 지역이 블레셋 이름을 따서 팔레스타인 지역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거인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희롱하였지만 아무도 이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형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 위해 전쟁터에 도착한 다윗은 이 장면을 보고 싸울 것을 자청하였고 사울 왕이 준 몸에 맞지 않는 갑옷을 거절하였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서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 주님께서는 칼이나 창 따위를 쓰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 모인 이 온 무리가 알게 하겠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주님께 달린 것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칼과 창이 아니라 물맷돌을 이용해서 거인 골리앗을 쓰러트렸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기술, 평소에 양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오는 사자나 곰을 물리치는데 사용했던 물맷돌을 이용했기 때문에 거인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목적과 명분이 정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블레셋 민족은 약소국 이스라엘을 괴롭혔고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통해서 전쟁의 승패가 무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목적과 명분에 달려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었습니다. 아무리 군사와 무기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목적이 분명하지 않는 전쟁과 명분이 없는 전쟁은 결국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불의는 정의를 이길 수 없습니다. 다윗은 전쟁의 승패가 무기에 달려있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싸움에 임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면, 하나님의 정의가 함께 하면 싸워 이기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골리앗 같은 상대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에서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받은 여러 가지 고난을 담담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바울이 쓴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같은 편지를 보면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육체적/정신적으로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로마인들로부터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걸어가는 길이 유대인들과 달랐고 로마인들과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말했기 때문에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은 로마제국이 걸어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당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였고 예수님이 전하신 하나님나라 복음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그 길은 로마제국이 걸어가는 길과 달랐습니다. 로마제국은 식민지를 정복하고 백성들을 노예로 삼고 황제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환영하였고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골리앗과 같은 로마제국에 맞서며 복음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바울은 세상을 소란하게 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예수의 길을 따라간 것은 마치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는 것과 같았습니다. 바울이 끝까지 로마제국에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걸어간 길이 옳고 의로운 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끝까지 로마제국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불의의 장벽, 불공평의 장벽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잘못된 체제/사회/구조는 워낙 견고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은 골리앗과 같은 거대한 불의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2020년-2021년 골리앗처럼 거대한 코로나 감염 장벽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회개하고 지구촌 모든 국가가 서로 협력할 때 골리앗처럼 거대한 이 코로나 장벽도 무너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아버지의 날을 맞이해서 골리앗과 싸우며 가정을 위해 헌신하신 모든 아버지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주신 의의 무기를 들고 승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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