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다섯번째 주일/ 7월 첫번째 주일
시선통(視線痛) Pain of Perspective
창세기 22:1-14, 사사기(Judges) 11:29-40, 로마서(Romans) 6:12-23
유상진 목사
오늘 제1독서로 주어진 구약성서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22장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려고, 그의 외동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칠 것을 지시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그 어떤 번민도, 지체함도 없었습니다. 자신이 100세에 낳은 외동아들 이삭과 삼 일 길을 걸어서 하나님이 명하신 모리아의 어떤 산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이삭과 함께 제단을 쌓고, 어리둥절해 있는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단단히 결박하고 칼을 빼 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급하게 제지하십니다.
창세기 22장 12절입니다.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셨다는 겁니다. “이제 넌 내 사람이다. 이제 내가 너를 믿을 수 있겠다.” 뭐 그런 인정이지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아브라함은 때마침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명명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다.”는 의미이지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 뭐 나름 해피엔딩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인공 아브라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조금만 시선을 돌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해서 3일을 걸어 모리아산에 도착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이삭을 결박해서 번제물로 바치려고 하는 순간, 아브라함은 자신을 두 번 씩이나 부르는 다급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제물로 무사히 제사를 마친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만 시선을 주면, 우리가 읽은 창세기 22장은 아주 편안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지순한 순종의 이야기라고 해도 되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바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라고 해도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인공 아브라함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조금만 시선을 돌려 보십시오. 오늘의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지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시선을 돌려 보십시오.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여성분들, 여러분들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라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늦둥이 외동아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여러분은 남편 아브라함을 가만히 놔두시겠어요? 너 죽고, 나 죽자 할 겁니다. 아니면 남편이 미쳤다고 짐 싸서 어린 아들과 야반도주라도 하지 않았겠어요? 유대에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사라는 이 이야기를 듣고 6일 동안 소리 지르면서 흥분하다가 결국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앓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화병인 거지요. 실제 이 이삭 번제 사건 이후로 아브라함과 별거했다는 설이 학자들에 의해서 정설로 받아드려지고 있습니다. 뭐 사실 여부를 떠나서 여러분, 사라의 입장에서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일 아닙니까? 사라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아닙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 있었던 이삭에게도 시선을 돌려 보십시오.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한 눈매로 아버지에게 하나님께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 있냐고 묻는 외동아들 이삭 한번 보십시오. 고대 근동에서 행해지던 번제 규례가 레위기 1장 전체에 걸쳐서 명시되어 있습니다. 번제는 산채로 가죽을 벗기고, 머리와 팔과 다리를 자르고 내장을 따로 취급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나오는 피는 제단의 사면에 뿌리고, 멱통을 비롯한 더러운 오물은 제단 동쪽의 잿더미에 버립니다. 각을 떠서 저며 놓은 고기와, 머리, 그리고 기름기는 불타는 장작 위에 벌려 놓습니다.
그리고 씻은 팔다리와 내장을 모두 제단 위에 놓고, 완전히 불사르는 제사 의식의 일종입니다. 이것은 그때, 고대 근동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는 일종의 상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제사를 이삭도 이미 여러 차례 보았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함께 제단을 쌓던 아버지가 돌변해서 그 제물로 자신을 결박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거짓말을 깨닫는 순간 아찔했을 겁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수렁처럼 깊은 절망에 빠졌을 거고요.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의 눈동자를 보면서 칼을 들이댈 수 있습니까? 이게 사실이라면, 이삭은 요즘 말하는 트라우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한평생 가지고 살았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큰 축복을 받고, 믿음의 조상이라도 되었지요. 그러나 이 어린 이삭에게 오늘의 일은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사실 이렇게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오늘 아브라함의 인신 제사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 모든 것을 백번 양보하더라도 여러분의 시선을 하나님에게 돌려 보십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
아브라함의 믿음을 미루어 아시지 않았겠어요? 하나님은 그러고도 남으실 분 아닌가요? 아니,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렇게까지 시험하실 수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습니까? 솔직히 저는 이 아브라함의 인신 제사를 읽을 때마다 서먹합니다. 서먹해서 머뭇거려집니다.
그리고 이 머뭇거림은 사사기 1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사사 입다와 그의 딸 이야기에서 더 심해집니다. 사사기 11장 전체에 걸쳐서 나오는 입다의 인신 제사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인신 제사처럼 해피엔딩도 아닙니다. 실제로 입다의 어린 딸은 번제물로 죽임을 당합니다. 이렇게 애 닳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형제들로부터 타향으로 쫓겨나 살았던 입다. 그런 그가 열두지파의 우두머리인 사사가 되고, 힘겨운 전쟁을 수행하면서 바람 앞의 등불이던 이스라엘을 지켜냅니다. 입다는 암몬과의 힘겨운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께 서원하였습니다. 사사기 11장 31절의 말씀이 그의 서원기도입니다. “하나님, 내가 암몬 자손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오는 그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번제물로 그를 드리겠습니다.” 그 서원기도 후에 입다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폭풍처럼 적진을 향해 돌격합니다. “입다는 암몬 자손에게 건너가서, 그들과 싸웠다.”(삿11:3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서원기도에 힘입어서인지 입다는
대승을 거둡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깁니다. 계속해서 3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올 때, 소구를 치고 춤추며 그를 맞으려고 나오는 사람은 바로 그의 딸이었다. 그는 입다의 무남독녀였다.” 여러분,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힘겨운 전쟁을 치루면서 승리의 간절함을 담아 서원기도를
했잖아요? 내가 이기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내 집 문에서 제일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온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이를 어떡합니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입니까? 자기를 제일 먼저 맞으러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입다의 외동딸이었던 겁니다. 저기 먼발치에서 예쁜 옷을 입고, 작은 북을 치면서, 춤을 추고 있는
딸이 보이는 겁니다. 입다는 자기 딸을 보는 순간 옷을 찢으며 부르짖었습니다. “아이고, 이 자식아, 네가 이 아버지의 가슴을 후벼 파는구나. 나를 이렇게 괴롭히는 것이 하필이면 왜 너란 말이냐! 주님께 서원한 것이어서 돌이킬 수도 없으니, 어찌한단 말이냐!”(삿11:35) 아버지의 승전에 춤을 추던 효심 깊은 딸은 아마 아버지의
최측근에게 이런 사실을 전해 들었겠지요. 이 딸은 입다가 차분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아룁니다. 36절의 말씀입니다. “그러자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입으로 주님께 서원하셨으니, 서원하신 말씀대로 저에게 하십시오.”” 그리고 입다의 딸은 한 가지 청원을 더 합니다. 처녀로 죽는 이 몸을 위해,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가서 두 달 동안 실컷 울도록 해 달라는 겁니다. 입다는 이 간청을 허락하고, 두 달의 말미를 주어 딸을 보냈습니다. 입다의 딸은 친구들과 더불어 산으로 올라가서, 처녀로 죽는 것을 슬퍼하며 실컷 울었습니다. 두 달 만에 딸이 입다에게로 돌아오자,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켰고, 그 딸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으로 죽었습니다. 이것이 사사기 11장의 전체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런 슬픈 이야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 슬픔이라고 표현하기도 가볍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시선을 입다가 아니라, 입다의 어린 딸에게 한 번 돌려 보십시오. 입다는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서 옷을 찢으며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어린 딸의 슬픔과 두려움만 하겠습니까? 이 어린 딸의 입장에서 이 일은 너무나도 가혹합니다. 입다의 딸이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오매불망 전장에 나가신 아버지의 승전을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버지가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오시는데,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나아가 북을 치며, 춤을 추며 아버지의 승전을 기뻐하던 딸이었습니다. 이 어린 딸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입다는 히브리서
11장 32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스라엘의 믿음의 선조라도 되었지요. 이 어린 딸은 뭡니까? 사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사기 11장의 입다와 그의 딸의 이야기는 해석하기에 매우 불편한 이른바 성서의 난제에 속하는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 불경스럽지만 하나님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지금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착한 딸이 작은 북을 치며, 춤추기 전에 차라리 입다는 자신의 눈과 귀를 막고라도 집으로 들어가야만 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누가 제일 먼저 나왔는지 저는 못 듣고, 못 봤습니다.”라고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서원하기는 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했었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 입다가 그렇게 서원할 때, 차라리 하나님은 말리셔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극적이지는 않더라도 “나를 향한 너의 믿음이 크구나.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야 했습니다. 입다가 호기롭게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저를 맞으러 나온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했을 때, 하나님은 이미 누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다 알고 계셨을 거 아닙니까? 아니 그건 하나님이 아니라, 상식이 있는 일반인이라면 다 알만한 사실 아닌가요? 하나님은 그 전에 입다를 말리셔야 했습니다. 설사, 입다의 집에서 입다의 양식만 축내는 가장 무익한 종이 제일 먼저 나오더라도 그 일만은 막으셔야 하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부답이십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입다의 사사로서의 신앙적 용단과 그 딸의 믿음과 아름다운 순종이 우리를 감격하게 한다.”(그랜드성서주석) 뭐 이따위 소리 말구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잖아요?
오늘 우리가 읽은 사사기 11장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제의론적 해석과 비제의론적 해석이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제의론적 해석은 전통적으로 사사로서의 용단을 내린 입다가 그의 딸을 산채로 번제로 드린 것이고, 그 일로 입다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선조가 된 거지요. 그런데 14세기 중반에 이 성서해석에 반기를 든 학자가 처음 나왔습니다. 프랑스 태생의 유대인 랍비 데이비드 킴히(D. Kimhi)입니다. 입다의 어린 딸은 실제로 번제물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 평생 처녀로 성전에서 봉사하며 살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겁니다. 본문에 어린 딸이 자신을 가르켜 “처녀로 죽는 것을 슬퍼하였다.”는 표현이라든지, “그 딸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으로 죽었다.”라는 해설을 평생 처녀로 살면서, 한평생 성전봉사를 했다라는 진술로 보는 겁니다. 제의론적 해석을 하는 학자들은 입다의 서원기도로 그의 어린 딸이 번제물이 되었다는 논리를 펴고, 비제의론적 해석을 하는 학자들은 윤리적인 의구심을 가지고 입다의 딸은 성전에서 봉사하며 한평생 수절하며 살았다는 논리를 펴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게 뭐가 그리 중합니까? 이 착하고 어린 딸이 번제물로 짧은 생을 마감했든지, 아니면 전혀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외부와 단절된 채, 처녀로 성전 봉사자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든지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사실 이러한 첨예한 논의들은 동물적인 남성 기득권의 신학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입다의 윤리적인 의구심을 상쇄할 뿐이지, 이 어리고, 착한 딸의 피해에는 침묵합니다. 가해자들을 복권하기 위한 논리이지, 아무 죄 없는 이 어린 딸의 순정도, 미래도, 그리고 한 줌의 명예도 안중에 없습니다. 요새 말로 하자면 딱 2차 가해입니다.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요? 사실 인신제사는 그 당시의 이방 종교에서 실제적으로 행해지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비판하는 레위기 20장 4절 이하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 지방 사람이, 자식을 몰렉에게 준 자를 눈감아 주고, 그를 사형에 처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그와 그의 가문에 진노를 부어서 그는 물론이고, 그를 따라 몰렉을 섬기며 음란한 짓을 한 자들을, 모조리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게 하겠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도 자식을 인신제사의 제물로 바치는 것을 동조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인신 제사를 드리는 겁니까? 하나님 앞에서 나의 가장 정성스러운 제물을 찾고 찾다 보니깐, 내 몸의 열매 내 맏아들까지 가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낼 때, 일 년 된 송아지가 좋을까? 아니면 수천 마리의 양이 좋을까?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기름이 좋을까? 그도 아니면 내 맏아들이라도 바치는 것이 좋을까?”(미가6:6~7) 이겁니다. 나에게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 그것이 내 맏아들이라면, 그것을 신께 드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예물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오늘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입다의 서원도 한 번 되돌아봐야 합니다. 정말 입다는 자신의 개선행렬에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제일 먼저 달려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을까요? 이 어리고, 착한 딸이 멀리서 아버지의 개선군대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집 밖에 나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정말 그걸 입다가 몰랐을까요? 아니요, 생각해 보면, 입다의 서원은 이겁니다. “하나님, 나의 가장 귀한 것, 나의 딸이라도 제물로 드릴 테니 나에게 승리를 주십시오!” 사실 그 승리의 전리품은 입다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통치자가 되는 것이고, 천출로 태어나 고향에서도 쫓겨나고 객지를
떠돌며 온갖 설움을 겪었던 그의 젊은 시절의 보상이고, 자기와 등져 있고 원수가 되어 있는 자신의 지파와 형제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복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입다는 이 전쟁에서의 승리가 그만큼 간절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삽니까? 사실 입다는 자신의 어리고 착한 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고 고작 6년을 더 살고 저 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아니 좀 사람이 그래도 살아 있는 것처럼은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입다는 바람 앞의 등불인 민족의 운명을 걸고, 나의 권력을 삽니다. 나의 명예를 사기 위해, 다른 사람을 팔아버립니다. 저는 이 입다의 흥정을 보면서 오늘 이 시대를 보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의 고국 한국, 인천의 미추홀구에서는 몇 달 전부터 애간장을 끓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전세 사기 피해자들입니다. 정부의 특별법이 발효되었으나 아직도 구제가 묘연합니다. 돈벌이에 능한 어떤 사람이 7명의 공인중개사와 1명의 부동산 전문 변호사를 고용합니다.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의 명의로 건설, 부동산
관련 35개의 유령회사를 만들고, 전세 사업을 한 겁니다. 세입자의 전세금을 담보 잡혀서 다른 집을 사들이고, 또 그 전세금을 종자돈으로 융자를 내서 다른 집을 짓고 하는 식입니다. 그런 사기를 당한 사람이 바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세입자가 집이 담보 잡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꺼리면 고용된 공인중개사가 시세보다 싸게 내놓은 좋은 매물이라며 지불각서까지 써 주는데 뭐 어쩔 수 없이 속는 겁니다. 갑자기 은행의 차압이 들어오고, 한평생 모은 전세자금을 한 푼도 못 건지고, 길바닥에 나앉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 일로 낙담한 이·삼십 대의 청년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고단한 하루의 끝을 누일 보금자리가 또 어떤 이에게는 돈벌이의 수단이 되는겁니다. 사람의 집을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한 사람은 오히려 집값이 오르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집값이 오르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그래서 이것은 사고이지 사기가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모르겠습니다. 훗날 자신도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공간 윤리도 없는 사람의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지만, 그런 생각은 듭니다. 사람이 이렇게 까지 살아야 합니까? 아직도 대한민국 곳곳에 세계 곳곳에 이런 수많은 입다가 이 세상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일그러진 이 시대를 비추는 하나님의 선명한 거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보십니까? 죄 없는, 어리디 어린 이 딸의 죽음은 아버지 입다의 죄가 만든 죽음이었습니다. 착하고 어린 이 딸의 눈물은 아버지 입다의 욕망이 만든 눈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입다의 욕망이 칼춤을 추고 있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동력은 인간 입다들의 욕망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좋은 말로 “꿈의 실현, 자아 실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쁜 말로 바꾼다고 그 본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은 각자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각축장이 된 지 오래입니다. 저마다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 이 욕망을 실현하는 경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쟁의 가장 첨예한 결론은 다른 사람에 대한 거부로 나타납니다. 당연하지요. 1명의 성공을 위해, 99명의 실패가 필요한 세상 아닙니까?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달콤한 승리를 속삭이는 세상에서 어떨 땐 우리도 입다처럼 살기도 했습니다. 혹 우리 중에 나는 나의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살았고, 그런 찔림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런 분이 계실지라도, 정작 그분이 얼마나 고매한 인격으로 살아왔는지가 판단의 기준은 되지 못합니다. 진정한 판단 기준은 자신의 삶을 비출 거울이 얼마나 선명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세상살이에는 선명한 거울보다 좀 적당히 때가 낀 거울이 편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육신으로 사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이런 인간의 실존을 발견하고,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7:24) 그렇게 탄식했던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서신서 본문 로마서 6장 12절의 바울의 권면은 어쩌면 오늘 이 시대의 입다들에게 주는 마지막 경고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더 이상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후 다섯째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기는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던 사도들을 다시 불러일으켰던 성령의 역사를 신앙적으로 되새기는 절기이며,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고, 대변자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보십니까? 이 성령강림절기에 제가 제안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을 조금만 돌려 보십시오. 입다의 욕망이 넘실대는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입다의 어린 딸을 보십시오. 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 문 앞에 나와서 춤을 추며 기쁘게 맞이하고 있는 저 어린 딸을 보십시오. 이 어린 딸은 번제물로 바쳐지기 이전에 동무들과 더불어 산속 깊은 곳에서 두 달 동안이나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두 달 동안 통곡을 하고, 자신을 번제물로 바치려는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좁은 산 비탈길의 저 어린 딸을 보십시오. 그 길을 따라 퉁퉁 부은 눈으로 이제 막 마을 어귀로 들어서는 저 어린 딸을 보십시오. 차라리 친구들과 더불어 아버지를 피해서 산속으로
영영 도망가도 원망할 사람이 없었을 텐데요. 두 달이면 먼 다른 나라에라도 충분히 갈 수 있었을 텐데요. 이 어린 딸은 동구 밖에서부터 아버지의 집으로 난 작은 신작로를 그렇게 걸어오는 겁니다. 자신이 산채로 번제물로 바쳐진다 해도 꾸역꾸역 걸어오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무엇을 보십니까? 내가 비록
이 세상을 입다처럼 살았어도 가장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오신 이가 보이십니까? 내 저 깊은 삶의 낭하 속에서 검게 그을린 가슴을 안고 아파할 때, 가장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오신 이가 보이십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으셨어요? 남편도 모르고, 아내도 모르고, 자식들은 더더욱 모를 한숨의 끝에서 가장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오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혼자 속 앓던 깊은 밤, 하늘에 걸린 초생달이 가슴을 콕콕 찌를 때, 아버지하고 한숨 섞인 한마디에 가장 먼저 내 앞에 성큼 다가오셨던 그 분이 누구였습니까? “아아, 주님, 언제까지 나를 잊으시렵니까? 영원히 잊으시렵니까?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시렵니까?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아픔을 견디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여야 합니까? 그러나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시13:1~2,5a) 여러분 사실 오늘 우리가 이 예배의 맨 앞에 함께 마주 읽었던 시편의 시도, 가장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오신 이를 경험한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지요. “나는 주님의 이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가팔라도, 아무리 애닳고 슬퍼도 여지없이 이 못난 입다 앞에 나타날 어린 딸이 마치 하나님 같아서 저는 깜짝깜짝 놀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저는 오늘 이렇게 연세가 연만하신 어르신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 이유는 여기 어르신들은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어오신 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산전에서도, 수전에서도, 공중전에서도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의지합니다.”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 아닙니까? 우리 교회는 토론토 최초의 한인교회로 56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비록 작고, 연세가 연만하신 분들만 남아계시지만 아무상토 않습니다. 우리는 그 험한 세월의 마디 마디마다 제일 먼저 나를 맞으러 나오신 그분에 대한 숱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군사정권 시절에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어렵사리 살림을 쪼개어 모금 운동을 하실 때 나를 만나 주시던 분이 누구시던가요? 1980년 6월 29일에 속 끓이며 최초로 광주민중항쟁희생자 추도예배를 드릴 때 뜨겁게 나를 맞으시던 분이 누구시던가요? 1984년의 서울제일교회 사태 때, “우리의 양심선언” 성명서를 읽어 내려가실 적에 한적하게 나를 찾아오시던 분이 누구시던가요? 여러분의 기억에 간직되어 계신 분은 오늘도 여전히 이 못난 입다 앞에 나타나고야 말 하나님 아닙니까? 마침내 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번제물로 자신의 아들까지 바치려고, 아들의 목에 칼을 꽂으려는 순간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부르시면서 그의 아들을 살려주셨던 이 하나님은 정작 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소리소리 지르면서 죽어가던 당신의 아들을 모른 체 하셨다는 사실! 여러분의 실존은 지금 이 사실, 이 사랑 앞에 올곧게 서 계십니까? 여러분의 오늘을 사는 삶의 동력이 여전히 이 사랑의 능력입니까? 여러분의 시선은 지금 이 사실, 이사랑에 가 닿아있습니까?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소리소리 지를 때 왜 하나님은 침묵하셨을까요? 그것은 이미 당신도 함께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신을 번제물로 바치려는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가는 좁은 산 비탈길의 입다의 딸처럼요! 마치 그 비탈길을 따라 퉁퉁 부은 눈으로 이제 막 마을 어귀로 들어서는 이 어린 딸처럼요! 마치 자신이 산채로 번제물로 바쳐진다 해도 다시 나같이 못난 입다 앞에 꾸역꾸역 걸어오는 입다의 어린 딸처럼요! 이미 당신도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바라본 사도바울이 로마서 6장 23절에,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당시 세상에서 너울대던 율법이 아니라, 이 엄연한 사실로 시선을 돌린 사도바울의 선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시선을 돌리십시오. 그래서 여기 계신 어르신들, 한땀 한땀 하루 한 날, 한 시라도 이 사랑의 능력에 기대어서 남은 생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실재하는 사랑의 능력에 기대어 사실 여러분에게 저는 오늘 사도바울의 권면을 들려드리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롬6:1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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