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여섯번째 주일/ 7월 두번째 주일
시선통(視線痛)2 Pain of Perspective 2
스가랴(Zechariah) 9:9-12, 로마서 7:15-25a, 마태복음 11:16-19, 25-30
유상진 목사
제가 알파한인연합교회의 7월 다섯 주간의 설교를 맡았고 오늘은 두 번째 설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설교 제목도 시선통이라고 정했습니다. 뭐 말장난 같기도 하고, 설교 제목이 좀 요상스럽지요? 같은 설교 제목을 써먹어서 죄송합니다. 시선통이라는 말은 신경통이나 성장통 같은 어떤 병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한국말에는 없는 단어이고요, 영어에도 이런 단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Pain of Perspective라고 표기를 했습니다. 두 주간의 설교 제목 시선통은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그 시선의 길과 의도 안에 어떤 통증, 고통이 있다’라는 의미에서 이런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다.”(마13:16a)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당연히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눈의 수정체를 통해서 들어 온 빛이 망막에 투사되고 그것을 시신경이 뇌에 전하고 하는 그런 생물학적인 차원의 말씀이 아닐 겁니다. 예수님께서 입버릇처럼 하신 이 말씀은 무언가를 보지 못하는 눈을
전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보지 못하는 눈에 비해, 보는 눈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보라는 걸까요? 예수님의 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는 뭐 당장 “본질”, “의미”, “궁극” 이런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다 이 한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다 이 한 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다 이 한세상에서 한 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을 꿈꾸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보고 있는 눈과 그렇지 못한 눈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 아닙니까? 교회에서는 구원이라는 개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구원을 바라보는 시선 차이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분은 구원 같은 거 몰라도 이 세상을 사는 데는 아무 불편함이 없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구원은 우리 생필품이 아니라는 거지요. 아니 오히려 먹고 사는 게 바빠서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돈을 구원으로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의 삶은 돈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생을 진정한 구원이라고 보는 사람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 기대어 살 것입니다.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시선의 문제가 이런 겁니다. 우리 삶의 가장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의 말씀들에서도 저는 여전히 이 시선통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내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시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그들의 전격적인 복종을 받아내든지 아니면, 신적인 카리스마로 이런저런 불만을 초기에 진압하셨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순조로웠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한 그 수많은 순교자들의 희생도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회 지도층의 리더가 되시기는커녕 오히려 그들과 대립하셨고, 그들로부터 비판받으셨고, 급기야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분입니다. 어찌보면 서로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협력해야 할 관계 아닙니까? 그러나 이 양자의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끝난 겁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서 본문의 말씀은 이 암담한 파국의 직접적인 원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시선의 문제입니다. 오늘의 설교를 쉽게 따라오시기 위해서라도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실 신앙한다는 것은 시선의 문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는 질문은 지금 내가 무엇을 신앙하고 있느냐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내가 가장 간절하게 바라보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이 시선의 문제를 마태복음 본문 11장 16절 이하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 짧은 비유를 통해서 시선의 간극을 표현하신 거지요.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북적대는 어떤 도시의 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놀이를 비유하신 겁니다. 뭐 이름을 굳이 붙이자면 결혼식놀이, 장례식놀이 정도 되겠지요. 한쪽에서 결혼식에서의 악사처럼 피리를 불면 다른 한쪽에서는 하객들이 되어서 춤을 추어야 하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춤을 추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쪽에서 장례식에서의 곡부처럼 “에고! 에고!” 곡을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 소리에 맞추어서 조문객이 되어서 가슴을 치면서 울어야 하는 놀이인데 울지 않았다는 겁니다. 뭐 놀이가 제대로 안 되는 거지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한다.”(마11:18~19) 그러니깐 이겁니다. 세례 요한이 애곡하였으나 아무도 가슴을 치며 울지 않았고 오히려 “야, 저거 미친 거 아니야!?” 그랬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피리를 부셨으나 아무도 춤을 추지 않았고 오히려 “야, 저거 너무 경건하지 않은 거 아니야!?” 그랬다는 겁니다. 공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광야의 외치는 자, 세례요한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왜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이것을 극명한 시선의 간극에서 온 결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5절 이하에, 예수님의 짧은 기도가 나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본문의 말씀 그대로,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에게 맡겨주신 모든 것, “이 일”이라는 게 뭘까요?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오히려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신 “이 일”이라는 게 뭘까요? 당연히 여기에서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슬피 울지 않았던 그래서 예수님과 척지던 당시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입니다. 이들은 그 당시의 율법을 잘 지키고 아주 모범적인 삶을 살면서 나름 사회에서 인정받는 일종의 상류사회의 사람들이지요. “이 일”을 이런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셨고, 오히려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로 지칭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곧잘 어울리셨던 세리와 죄인들, 말
그대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등장하는 사람들로 나열하자면, 가난한 사람, 애통한 사람, 주리고 목마른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등등에게는 “이 일”을 드러내어 주셨다는 겁니다. 자 여러분, 예수님의 “이 일”은 뭘까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 보십시다. 본문 28절에,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깐 사람들에게 시선의 간극을 제공하고 있는 “이 일”은 모든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쉼을 주시는 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쉼이라는 것은 뭐 단순히 잠시 휴식을 취하는 그런 쉼을 의미하지는 않겠지요? 여기서 말하는 쉼은 우리 기독교회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에 해당하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구원을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평행절이라 할 수 있는 누가복음 10장 23절 이하는 이 예수님의 짧은 기도 뒤에 이런 말씀으로 갈무리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따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다.” 다시 시선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그동안 많은 예언자와 왕이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했던 이 일, 즉 모든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에게 주시는 그 쉼을 제대로 보는 눈은, 복이 있다. 이겁니다. 사랑하는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오늘 말씀의 설교자로서 여러분께서 어린아이들처럼 이 예수님의 쉼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신약성서 서신서 로마서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이 쉼에 대한 시선 차이를 극복해 가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바울입니다. 그 과정은 그렇게 순탄하게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통증이 있습니다. 오늘 서신서 로마서 7장 15절에 그 고통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을 자각한 거지요. 이어지는 말씀을 계속 읽어보면 좀 심각한 면도 있습니다. 19절에는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라고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즈음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위대한 대사도 바울의 고백이라는 것이 이상할 정도 아닙니까?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악한 일을 한다는 기록은 감형을 바라면서 쓰는 어떤 미결수 흉악범의 거짓 반성문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이 진술하고 있는 이 갈등과
고통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비윤리적이거나, 더 악해서 겪는 갈등과 고통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 할 정도로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회적으로 잘나가고, 가정적으로 안정적인 아주 모범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말 그대로 사회 지도층 인사에 속했습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 속에서도 리더가 될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사실 “내가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는 바울의 진술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더 근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에 대한 인식입니다. 존재론적으로 악한 자신을 발견한 겁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20절에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자신의 죄성, 죄인됨을 비로소 똑바로 보기 시작한 겁니다.
바울이 말하는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죄”는 단순히 어떤 악한 행위를 말하는 게 아니지요. 인간의 모든 악행의 근거, 일테면 악의 뿌리로서의 죄입니다. 인간 내부에 있는 어떤 존재론적인 악한 힘을 의미합니다. 제가 설명을 좀 어렵게 하지요? 여러분, 저의 경우로 쉽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저는 될 수 있는 한 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그러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가치관이 서로 다르거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피곤해하고, 일단 선을 그어 놓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저는 또 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을 흉보지 않아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그러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다른 사람을 아주 쉽게 판단하고 비판하는 저를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제 인생의 모토는 “꼬람 데오”, 하나님 앞에서 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내 자신 앞에서도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자!”고 저는 늘 다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저는 깊은 자기연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고요, 사람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행동이 달라질 때도 있습니다. 뭐 저를 포함해서 그런저런 사람들이 근무하는 조그만 직장에서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아도 저는 속으로 “하나님, 누구누구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ㅍ기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실 여러분, 정직하게 이런 거, 저런 거 다 따지고 보면 제 부끄러움을 다 말할 수도 없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교양이 있어도,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아무리 유명해도, 아무리 높아도 이런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들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획득한 우리의 교양이나 학식이나, 돈이나, 명예나, 권세가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할 능력을 주지 못한다는 방증입니다. 오늘날의 이런 교양이나, 학식이나, 돈과 명예와 권세를 한 마디로 바꾸면, 자기 성취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자기 성취는 곧 율법이었습니다. 바울은 한평생을 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성취를 위해서 끝없이 매진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만 바라보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가장 실존적인 자기 인식 끝에 율법이 저 깊은 내면의 죄를 결코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오히려 그 율법이 인간의 삶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만 제공해줄 뿐,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몽학선생, 개인교사일 뿐인 거예요.(갈3:25) 여러분, 이렇게 자신의 현실을 직시한 바울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7:24) 자신이 한평생 추구했던 율법이 자신에게 그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탄식입니다.
이 죄의 문제를 창세기에서는 선악과 설화를 통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과실은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은 먹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뱀이
하와를 유혹합니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하와가 그 선악과를 보니, 얼마나 먹음직하고, 얼마나 보암직하고, 얼마나 탐스럽든지… 하와는 그 열매를 따 먹고 맙니다. 그리고 자신의 남편 아담에게 권하고, 아담까지 먹게 됩니다.(창3:4~6) 이 일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결국 죽음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름하여 원죄라고 부르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게 고대 유대인들의 설화이고, 어떤 단순한 교리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여기서 사는 우리들도 여전히 아담과 하와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하와에게 속삭였던 뱀이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때 거기에서처럼 솔직히 오늘 여기서도 너의 눈이 밝아져서, 신적인 지혜를 얻을 것이고, 절대로 죽지 않을 무병장수의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지혜와 능력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다 갈아 넣었습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의 능력은 근원적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내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것 처럼요. 이것이 사도 바울이 도달한 가장 첨예한 자기 인식이었습니다.
한평생 율법을 바라보며 자기 성취에 매진했던 바울은 이제 더 이상 그것들이 이 정직한 자기 인식 앞에서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율법과 자기 성취가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로마서 7장 10절에,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율법과 자기 성취를 절대화했던 당시의 사회가 그랬습니다. 율법을 전격적으로 지키려 했던 당시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자신의 성취와 업적을 자랑했고, 그것을 지킬 수 없었던 대다수의 가난한 백성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교만이든, 절망이든, 어떤 것이든 그것은 누구에게나 수고하며, 무거운 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교만보다 절망이 낫지만, 설상가상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제1독서 구약성서 본문의 말씀은 종려주일에 낭독하는 대표적인 성 입니다. 스가랴 9장 9절에,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입성하실 때, 사람을 태워 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잖아요? 우리는 이 구절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예언적 진술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가랴의 예언은 예수님 당시의 설상가상,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의 처지를 이렇게 포개어 놓는 겁니다. 스가랴 9장 11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너에게는 특별히, 너와 나 사이에 피로 맺은 언약이 있으니, 사로잡힌 네 백성을 내가 물 없는 구덩이에서 건져 낼 것이다.” 그 당시의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사로잡힌 백성”,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지 백성”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거지요. 물 없는 구덩이는 오랜 옛날부터 아무런 물리력 없이 사람을 죽일 때 사용하던 곳이었습니다. 요셉도 물 없는 구덩이에 빠졌었습니다. 예레미야도 물 없는 구덩이에 빠졌었습니다. 물 없는 구덩이는 말 그대로 물도 없고, 음식도 없는 구덩이입니다. 너무 깊어서 자신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도 없는 구덩이… 이 물 없는 구덩이에 있다는 것은 3일 내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인간들의 궁극적인 실재입니다.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 온순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왕, 즉 예수님은 사로잡힌 백성,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진 자신의 백성을 건져 내신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십자가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죽음을 극복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통하여서 경험했던 겁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나 자기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존재론적인 죄의 힘이 무력화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삶으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25절 하반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에 사로잡혀 있던 나를, 마치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진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이 사도 바울의 감사는 거저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정직한 인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또렷한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너무 불공평한 것 아닌가? 그동안 인간이 율법을 빠듯하게 지켜내고, 자기 성취를 위해 애쓰고 성실하게 산 것은 아무것도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그것에 대해서는 제가 100% 게런티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자기 성취를 위해 애쓰고 성실하게 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의 노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입과 코를 막고 3분만 지나도, 지금 당장 물을 마시지 않고 3일만 지나도, 지금 당장 의복과 집 없이 3달만 지나도 우리는 금방 압니다. 한낱 우리가 마치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진 신세라는 걸요. 이 세상의 율법에 사로잡혀 있는 신세라는 걸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우리 생명의 근거가 우리 스스로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지금 내가 잘나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그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총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똑바로 보셔야 합니다. 아픈 사람이 조금 덜 아프다고 쉼이 아닙니다. 배고픈 사람이 좀 배불리 먹는다고 쉼이 아닙니다. 볕 들지 않던 내 고단한 삶이 좀 펴진다고 그것이 진정한 쉼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그 쉼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쉼!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는
데서만 주어지는 쉼입니다. 진정한 쉼은 이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방식 안에,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의 행위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복음이라 부르고, 오직 하나님의 행위로만 가능하다는 인식에서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전한 복음과 십자가의 구원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시선의 간극을 메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나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데 어떻게요? 예수 믿는 우리가 하루 하루의 밥벌이를 위해 더 이상 예수가 없다는 세상의 논리 안에서 살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년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마13:16, 눅10:23) 결국 우리의 신앙은 시선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여러분 설교의 맨 앞에 여러분 스스로에게 하신 질문을 다시 한 번 더 진지하게 해 주십시오. ‘지금 내가 가장 간절하게 바라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게 뭔가요? 솔직히요. 돈이었습니까? 명예나 권세였습니까?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이 지상에서의 자기 성취였습니까? 사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생명을 완성하려고 애썼던 겁니다.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요. 그러나 이제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돌려서 예수님의 복음과 십자가 구원을 바라본다면, 이제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돌려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생명을 바라본다면 아니 이미 그 생명 안에서 산다면 우리는 더 이상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쉼을, 그 생명을 이미 누린다면 이 세상의 방식에 그렇게 매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큰 집이나, 두둑한 통장의 잔고나, 명예와 출세 같은 세상의 방식에 강요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11:28)는 말씀은 저와 여러분의 시선을 끄는 예수님의 총총한 손짓입니다. 절절한 음성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보이십니까? 들리십니까? 어쩌면 오늘 우리가 이 예배의 부름에서 함께 마주 읽었던 아가서의 말씀은 이미 이 총총한 손짓을 보고, 절절한 음성을 들은 그야말로 사랑을 처음 느낀 한 처녀의 고백일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사랑하는 이가 나에게 속삭이네.”(아2:10a) 여러분, 보십시오. 이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누구에게 들리는 겁니까? 이 임의 목소리는 언제 들을 수 있는 겁니까? 여러분, 저는 지금 저와 함께 방을 쓰는 룸메이트 여성분과 3년을 뜨겁게 연애했고, 24년간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하아, 뭐 어버버하다 보니, 27년을 한시도 안 떨어지고, 붙어서 살고 있네요. 여러분, 제가 만약에 그 여성분한테, “수희야, 겨울이 지나고, 비도 그치고, 비구름도 걷혔다. 꽃 피고 새들 노래하는 계절이 이 땅에 돌아왔다.” 그렇게 속삭인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여성분이 “아, 사랑하는 임의 목소리! 아, 사랑하는 이가 나에게 속삭이네.” 그러겠습니까? 절대 안 그럽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제가 예상되는 말은 “우끼시네!” 뭐 요정도 될까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아아, 나의 사랑 그대,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그대, 어서 나오오.”라는 이 임의 목소리는 누구에게 들리겠습니까? 이 임의 목소리를 언제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예, 맞습니다. 조용하지만 서둘러 온 초겨울 새벽, 첫눈처럼 찾아온 사랑 앞에 선 한 순결한 처녀가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듣지요. 사랑을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숙녀가 사랑을 기다리고, 기다릴 때 이 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여러분, 기다린다는 것이 뭡니까? 뭐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남녀가 있다고 하십시다. 피치 못하게 3년을 헤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서로를 기다린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다린다고 해 놓고, 그리워하지도 않고, 자유분방하게 딴 사람하고 연애하고, 상대방의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고, 각자 즐길 것을 다 즐긴 다음에 3년 뒤에 만났다고 합시다. 그것을 우리는 3년 동안 기다린 것이라고 하지 않지요. 기다린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 사람을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그의 겸손을 닮고 싶어 하고, 그의 작아짐을 따라 하고, 그의 낮아짐을 신앙하고, 그의 사랑이 아련해서 항상 마음에 새기고, 그의 자취가 그리워서 그 그리움의 벽에 기대어 서는 것, 여러분 그것이 기다림이지요. 그래야 진정으로 기다린 것이지요. “아, 사랑하는 임의 목소리! 저기 오는구나. 산을 넘고 언덕을 넘어서 달려오는구나.”(아2:8) 지금 이 처녀의 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저기 오고 있습니다. 산을 넘고 언덕을 넘어서 달려오고 있습니다. 아직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이렇게 진정한 사랑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이 처녀는 이미 천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곳은 겨울이 지난 곳, 비가 그치고, 비구름도 완전히 걷힌 곳, 꽃 피고 새들 노래하는 곳, 무화과의 푸른 열매가 풍성한 곳, 포도나무의 활짝 핀 꽃이 향기를 내 품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속삭이는 신랑 되신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에게도 들리십니까? “나의 사랑 그대,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그대, 어서 나오오.”(아2:10b) 그것은 우리 모두를 진정한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우리 예수님의 음성과 동일한 것입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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