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두번째 주일 / 9월 세 번째 주일
영적인 처방
마태복음 18: 21 – 35
두 친구가 사막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읍니다. 걷는 도중에 둘 사이에 말다툼이 생겼습니다. 한 친구가 갑자기 같이가던 친구의 뺨을 때렸습니다. 빰을 얻어맞은 친구는 얼굴이 아프고 어른했지만 아무소리하지 않고, 모래위에 글을 썼습니다. “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뺨을 때렸다.”
둘은 계속걷다가 마침내 오아시스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덥고 지친김에 둘이 같이 목욕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뺨을 얻어맞은 친구가 잘못해서 심한 진흙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옆에 있던 친구가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거의 죽을뻔하다가 구출받은 친구는 바위 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생명을 구했다.”
그를 구해낸 친구가 묻습니다: ”내가 네 뺨을 때렸을 때는 모래위에 글을 쓰더니, 지금은 왜 바위 위에 글을 쓰느냐?” 구출받은 친구가 대답합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아프게 할때는 모래위에 그런 표현을 써야한다. 그러면, 용서의 바람이 불때 그 글이 지워질수있다. 그래서 참된 용서란 남의 잘못이나 죄 그리고 우리의 아픔을 과거의 것으로 내버려둘 수 있게된다.”
어느날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기를, 만일 누가 잘못하면 몇번정도 용서해주면 되느냐고, 일곱번 정도면 충분한가고.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번 정도가 아니고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매일 용서를 구하고 또 용서함을 받아야하지 않을까요?
2001년 9월 11 약 80개국의 배경을 가진 사람 3000 여명이 여러 대의 비행기 공격으로 미국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 월요일은 그 22년이 되는 날이었죠. 2003년에 데이빗 포톨티(David Potorti)가 “ 평화스러운 내일을 위한 9월 11일 가족들”(September 11th Families for Peaceful Tomorrows) 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날은 벽이 세워지는 대신 무너진 날이었다. 그 날은 우리가 갖고 있는 무기들이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해 줄수 없음을 깨닫는 날이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이 세상 저편에 있는 어린이들이 안전하지 않는 한 우리 어린이들도 안전할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때였다.”
이 가족들은 어떻게하면 새로운 연결관계, 새로운 사랑, 새로운 가능성으로 텅빈 그들의 마음을 채울수 있겠는가하는 책임감을 깨달았습니다. 서로 인간성을 나누고, 서로의 필요를 공유하고, 서로 갖고 있는 목표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날의 사건을 기억한다는 것은 전쟁이나 폭력이 아니라, 평화와 치유를 호소하는 일임을 알아야합니다.
계속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품의 하나이죠. 우리 인간이 늘 하는 성격이나 습관과는 차이가 있죠. 에수님은 그렇게 용서하는 일이 쉽지않다는 것을 이해하시죠. 그래서 그는 23절부터 용서하는 일에 도움을 줄 비유를 말씀하시죠.
성서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말씀하시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매일의 삶에 깊이 관여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 다른 피부의 인종, 다른 신조를 가진 사람들, 또는 다른 전통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시고 그들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을 사랑하시고 또 관여하시죠.
마틴루터킹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 나쁜 사람들이 음모를 할때, 착한 사람들은 좋은 계획을 세웁니다.
– 나쁜 사람들이 불을 지르고 폭탄을 터뜨릴때, 선한 사람들은 새롭게 세우고 묶는 일을 하지요.
– 나쁜 사람들이 증오에 찬 나쁜 말로 소리지를 때, 선한 사람들은 아름다운 사랑에 헌신합니다.
– 악한 사람들이 불의한 일에 안주할때, 바른 사람들은 참된 정의를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 마음을 아프게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갚아주려고하는 유혹을 거부하는 힘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응답하는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이미 용서함을 받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이미 순종하며 살고 있읍니다.
용서는 우리 교회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요소로서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요.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용서해야 하나요?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이 얼마나 용서함을 받았고, 또 받고 사는가를 벌써 알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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