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에 대하여
요한복음 1 : 1-18
예수님이 누구시냐 하는 물음은 오랜 것이기도 하고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우리 일생을 두고 생각할 문제인데, 그중에서 몇 가지만 생각해 보려 합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한 인격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든 사람이 아주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이 이해한다든지 느낀다든지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도 같습니다. 어떤 한 인간을 놓고 볼 때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그 A라는 인간을 똑같게 보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각각 다르게 봅니다.
예수님이 세상 떠난 후 가장 힘있게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한 사람들은 복음서 기자들이고 또 사도 바울 선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 제자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증언을 들으면 각각 다 다릅니다. 마태가 말하는 것과 마가가 말하는 것이 다르고, 요한 또한 엄청나게 다르고, 바울 선생에게 가면 또 다릅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에 대한 얘기는 장님들이 코끼리를 더듬어서 코끼리는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300년이 지난 후 교회가 자유를 얻게 됨에 따라 차차 이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토론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통이 불편한 시대에 회의를 자주 모였습니다. 로마에서도 모이고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모이고 여기저기서 회의를 모여 예수에 대한 이해를 통일시키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이 생기고 교리가 생겼습니다. 니카야 회의라고 하는 유명한 회의가 300년 대에 모여서 소위 말하는 기독론 논쟁을 했습니다. 교회가 만들어낸 교리에 담겨져 있는 예수상이 이렇게 해서 생긴 셈입니다.
나는 생각하기를 그런 교리적인 공통분모 같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는 예수님을 이런 분이라고 믿고 따른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교리를 만들어 놓아도, 아무리 판에 박은 것 같은 신조를 만들어 놓아도, 그것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 양심에서 순수하게 고백이 되지 아니하면 참 생명이 그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점점 생각하기를 모든 크리스챤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가지고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신앙고백이 다양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다양한 것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각 다르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 개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시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는 본래 기독교 세계와는 인연이 없는 세계에서 자라서 후에 기독교에 들어온 사람인데 내 경험을 몇 가지 나누어 보면, 나는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 예를 들면 ‘처녀탄생을 하신 분이다’ ‘기적을 많이 하신 분이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 분이다’ ‘물 위를 걸어가신 분이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다’ 등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것이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설화 속에도 많이 있는 것들입니다. 처녀탄생 같은 것도 많이 있습니다.
주몽이라는 사람이 태어난 이야기를 보면 거미가 침실에 들어와 여인과 동침하여 애기를 낳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 예수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들이 많아서 예수님의 이야기가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꼭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아마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나는 중학교 시절, 아직 예수를 믿기 전에 무작정 아무 책이나 덮어놓고 많이 읽었습니다. 어떤 때는 밤을 세우고 읽다가 아침에 학교에 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다 읽지 못하면 학교가는 것을 집어치우고 그냥 하숙방에 처박혀 책을 읽고 거짓말로 아팠다는 결석계를 내기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 시대에 한창 많이 읽혀지던 책들, 이광수의 ‘흙’이나 ‘사랑’이라든지 박계주의 ‘순애보’라든지 일본의 하천 충얼이 쓴 ‘사선을 넘어서’라든지 도스도에프스키가 쓴 ‘죄와 벌’ 등등 누가 이런 것을 읽어야 한다고 별로 지도해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무작정 학교에 있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자꾸 읽어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것들을 읽어가면서 그 책들 속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인공들이 아주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처럼 제 마음에 막 압박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점진적으로 내가 배운 것은 “아, 이 사람들이 이렇게 뚜렷하고 부러울 정도로 발랄한 삶을 사는데 이 사람들이 다 예수를 아는 사람들이다”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예수를 믿으면서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에게 매혹이 된 셈입니다. 그것이 이광수의 가공적인 인간이고 박계주의 가공적인 인간이었지만, 만일에 인간이 이렇게 멋지게 사는 데 그 이유가 예수라는 분을 알게 된 데 있었다고 하면 나도 예수를 좀 만나 봐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식으로 내 마음이 발전해 간 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점진적으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교회에 가서 듣게 되고 집회에 가서 듣게 되고 책을 읽어서 깊이 알게 되고, 그러면서 하나씩 둘씩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내 마음 속에서 정리가 되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본래 굉장히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온 소년이었다고 기억합니다. 그것은 내 집이 가난하고 내 부모가 무식하고 사회적으로 밑바닥에 사는 인간이라 느껴져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점진적으로 예수를 믿으면서 이런 것이 치명적인 부끄러움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열등감을 극복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내 삶 속에는 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빛이라”고 했는데 힘찬 표현입니다. 내게는 큰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반드시 그렇지도 않구나 하는 생각을 예수님을 알기 시작한 후부터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그분을 바라보고 희망을 가지고 하나씩 둘씩 해결해 가는 일들을 축적해 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무렵 내 삶에 있어서 예수님은 내 선생님이시었고 내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었고 나에게 있어서는 영웅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후에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신학을 공부하게 되니까 기독론이라는 것을 배워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 하는 것을 훨씬 짜임새 있고 논리적으로 연구해 놓은 분들의 자료를 읽어가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성서를 중심으로 요한의 기독론이나 바울의 기독론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교회역사에 나타나는 기독론을 배우는 과정에서는 기독론이 긴 시간 동안 격심한 논쟁들을 거쳐 발전되어 왔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300년대의 아다나시우스라는 사람하고 아리우스하는 사람이 기독논쟁을 합니다. 양쪽이 팽팽한 대립의식을 가지고 “예수의 본성은 하나님의 본성과 같으냐 같지 않으냐” “예수는 태초부터 계셨던 분이냐 하나님의 피조물이냐” 등등의 논쟁을 합니다. 논쟁에 이기려고 동지나 동조자들을 규합하고 설득하고 강연을 하고 회의에 가서 주장을 하고 힘의 표징인 황제의 힘을 빌어서 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리우스하고 팽팽하게 맞서서 싸움을 하면서 다섯 번이나 정배를 갔습니다. 정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면 또 논쟁을 하다가 쫓겨나곤 했는데, 신기한 것은 아다나시우스가 다섯 번째 정배에서 돌아와 보니까 아리우스파가 사분오열이 되어서 이론적으로 통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힘으로도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아다나시우스가 자기 입장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주장해서 많은 주교들의 지지를 받아 승리를 거두고 아리우스 기독론이 교회역사에서 패배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후세 사람들이 잘 읽어보면, 두 사람이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단어를 가지고 아웅다웅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 역사를 읽어가며 공부를 해보면 가치도 없는 필요 없는 싸움이구나 하는 결론을 가지게 됩니다.
어쨌든 우리가 사도신경이라고 부르면서 외우는 신앙고백도 조금씩 수정이 되었지만 이 아다나시우스의 전통에서 받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론을 학문적으로 논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가면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더 많이 읽어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더 많은 혼돈에 빠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어느 단계에 가면 시험을 쳐야 하니까 공부해서 시험답안을 써야 하지만 그렇게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다나시우스는 그렇게 말했고 아리우스는 이렇게 말했지 하는 식의 표현을 하게 되지만, 나는 이렇게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점진적으로 나는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면서 신학교에 다닐 때보다는 더 많은 복음서를 읽어 가게 되었는데, 그 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자꾸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한때 바울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가 그렇게 훌륭하다고 생각했는데 점진적으로 그 책들보다는 훨씬 더 복음서가 살아있는 책이구나 하는 이해가 생겨졌는데, 나는 그것을 퍽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복음서 속에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처럼 교리라고 하는 틀에다가 담아 놓은 예수는 없습니다. 갈릴리 호수 가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고 짓밟힌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하고, 먹을 것이 없으면 기적을 행해서 먹을 것을 주고, 길가에서 소경을 만나면 눈을 뜨게 해주고, 현장에서 잡혀온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돌로 쳐 죽이겠다고 하는 군중들 틈에 서서 “죄 없는 사람 먼저 돌을 들어 쳐라”하니까 아무도 안 치고 다 물러갔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잘 살아 보아라”하시는 땀 냄새가 나는 겉옷을 걸친 예수가 자연스럽게 복음서들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점점 이 갈릴리 사람 예수에게 반해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 속에서 자유인의 기상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참 마음이 벅차게 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많은 율법학자들이 율법에 사로잡혀서 율법의 그 무거운 압박 밑에서 인간의 느름한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는데 이 분이 나타나서 아무것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인의 기상을 보여주는 것이 복음서에 역력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분은 탐욕이란 것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분 같았습니다. 권세를 가지고 무엇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조소를 할 만큼 냉소적인 분이었습니다. 아무런 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는 아주 자유스럽고 자연스러운 늠름한 인간 예수가 복음서 속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냥 미쳐버릴 만큼 좋은 분이라고 믿습니다. 아마 여기 사람 식으로 말하면 “I am crazy about him”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분이 너무 좋아서, 그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너무 태연스러워서, 꾸밈이 하나도 없어서 그분에게 미쳐버립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보통 인간이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다나시우스와 아리우스가 아무리 서로 설명해보려고 싸우다가 정배도 가고 죽기도 하고 했지만 각각 반쪼가리 주장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유스럽고 자연스러운 한 인간이신데 그분은 아무도 범할 수가 없는 권위와 높음과 깊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이 타고난 하나의 성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한번 제자들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온전하신 분이니까 너희도 온전해지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오래 동안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고 의아했는데 어느 단계에 이르러 그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자기를 가리킨 말씀이었구나 하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놓고 하나님이냐 사람이냐 하는 논쟁을 합니다. 그리고 그가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면 주춤하게 됩니다. 나는 점진적으로 그분이 정말 온전한 사람이지 하고 느껴지고 그분 안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즉 인성과 신성이 어색함 없이 엉켜 하나가 될 수 있었다고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점진적으로 내 마음에 아로새기기 시작하니까 무어라고 꼭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내 삶과 예수님의 삶이 엉키어 하나가 되어가는 것 같은 환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요한복음에서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어야 되겠다”하신 말씀을 알아들을 것 같은 마음이 생깁니다.
결국은 예수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싹틀 때 정말로 예수가 내 예수가 되는 것이겠지요. 저기 멀리 세워놓고 선생님으로 바라보고 영으로 바라보고 할 때보다는 그분이 내 안에서 산다고 느껴질 때 예수와 내가 더 긴밀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마 바울 같은 분도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다”라고 말씀했는데, 그 말도 오랫동안 이해가 잘 안 되었지만 점점 내 생각에 “그렇지! 그게 예수 믿는다는 뜻이구나”하고 머리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말을 하며 수긍을 할 때 내가 무슨 높은 경지에 가 있다고 하는 생각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조금씩 조금씩 분명해진다는 기쁨이 있는 것 뿐입니다.
그런 마음이 생기니까 어떤 때 문득 나의 삶에 있어서 예수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고 심각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내가 예수 없이 60평생을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내 삶이 있었을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세계와 인류를 보는 눈이 조금씩 열려가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세계는 그분의 집입니다. 온 인류는 그분의 가족들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행동하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자기중심적인 데가 없습니다. 또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절대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아직도 다 보지 못한 전 세계를 늘 생각하고 아직도 다 만나보지 못한 인류를 생각하면서 사셨는데 이렇게 달라져 가는 세계 속에서 이천 년 전에 가졌던 그분의 삶의 자세가 그렇게 돋보입니다. 그분이 이천 년 전에 벌써 그런 생각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천 년 전에 벌써 그분은 온 세계와 온 인류를 자기의 가족처럼 생각했습니다. 참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그런 담대한 마음이 나왔겠습니까? 이렇게 더듬더듬 예수의 마음을 배워가는 경험은 흥분되고 감격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오늘도 여기 둘러앉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서 살아계십니다. 신학자가 뭐라고 하고 목사가 뭐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게 있어서는 예수는 누구인가?” 함을 고백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각각 우리가 그 고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서툴러도, 그것이 다른 사람하고 달라도, 그것이 신학자의 학설하고 달라도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 속에 살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예수를 발견하고 경험을 해야 합니다. 내 예수, 내 삶에 오늘도 생명을 주고, 나로 하여금 살게 만들어 주는 그 예수를 고백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 때에 우리가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 차차 성숙한 경지로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986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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