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심장(心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心腸)으로 (빌1:8-11)

 

1. 2004년 3월12일 , 대한민국국회 3개 야당의 의기투합으로 발의된 ‘대통령 탄핵소추발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국민은 1987년 6월항쟁이후, 또다시 거국적으로 누가 시키거나 인위적 조작이나 동원명령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참여민주정치, 공론정치의 시민운동 열기가  온땅에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는 시대상황 입니다.  이런 시대상황속에서,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맘의 자세와 실천신앙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성찰해야 할 과제에 신학도 또한 직면해 있습니다.

2.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설교자는 지난 겨울,  ‘한국 근현대사에서 기독교가 한국사회의 역사와 문화에 미친영향연구’라는 주제를 추구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카나다에 가서 경험했던 한토막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연구출장의 목적은 장공 김재준 목사님을 정점으로한 1974-1983년동안 , 북미주에서 일어났던 해외 인권-민주화-평화통일 운동의 역사적 자료들을, 모두 훼손되거나 없어지기 전에 수집하여 자료화함으로서, 한국 교회사나 정치사회사 속에서 기독교인들과 국민들이 댓가나 명예도 없이 땀흘려 이룩한 결과를 정리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행이 약30년이 지나가는 이때, 장공 선생께서 북미주 인권-민주화-평화통일 운동의 중심축이 되셨고 그 곳에서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큰 일을 행하셨으며, 자료들을 대체로 선비습관대로 손에 들어온 유인물자료를 스크랩 해두셨기에,  장공 자녀들의 집에 분류정리되지 않은채로 보관중인  중요한 자료만 간추려 가지고 와서 3-4개월안에 1차자료집으로서 출간할 계획입니다.

3. 그런 작업을 하는 중에, 나는 장공 직계가족 자녀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본시 장공이 말수가 적고 과묵하신 분이라, 그 자녀들도 성품이 비슷하지만, 다음과 같은 매우 인상깊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장공의 더 깊은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반성하기를 장공신학을 바로 알려면, 문자로 언표되어 있는 그분의 설교나 논문이나 역사참여적 외양 행동에만 주목하지 말고, 좀더 깊은 그분의 “에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는 신앙의 깊이‘ 에로 들어가야 하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 이야기의 에피소드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아마 때는 1980년대 광주민주항쟁사건이 터지고 수많은 시민과 특히 젊은 이들이 억울한 희생을 당하여 그들의 무모와 시민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고, 서울에서나 지방에서나 학생, 문인들, 성직자, 양심 언론 지성인들이 옥고를 치루는 1980년 년 말쯤이었다고 합니다. 북미주 민주통일 국민연합 의장 및 자문위원으로 일하시던 장공은 토론토 시내 작은 사무실 하나를 얻어 전 북미주  각지역에서 날아들어오는 각종 운동정보를 수집종합하고 행동지침을 제시하는 지휘본부역활을 하는 사무실이 있엇습니다. 그런데 그날,일기예보는 폭설과 강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일기예보여답니다. 오후 5시경 일과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온 장공선생이 귀가를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장공 연세는 이미 80고령, 거주지는 둘째아드님 경용씨의 집이었는데, 시내 다운타운에서 공공 버스로 3–40분 걸리는 시외작은 지역이었는데 밤 9시 10시가 되어도 귀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들은 염려가 되고, 혹시 폭설속에서 무슨 변이라도 나신 것 아닌가 하여,  전화로 알아볼만한 사람은 수십명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보았으나, 행방이 묘연 했더랍니다. 할수 없이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실종신고를 경찰에 해야겠다고 생각중인데, 밥10시가 다되어 폭설에 눈썹과 수염이 온통 흰눈으로 다 덮히고 만쯤 얼어붙은 장공이 현관 벨을 울리더랍니다. 가족들은 너무나 놀라고, 화가나서, 둘째 아드님이 평소에 쌓인 불만을 터뜨리면서, 아버지는 평생 교회걱정 나라걱정하시면서 가족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시느냐고, 길에서 이 폭설에 쓸어지면 행려병자취급받아 어느 이름 모를 병원 냉동보관실로 실려갈 텐데 왜이리도 가족들 맘을 애태우는가고 항변했담니다. 장공선생은 들리락 말락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눈이 많이 내리기에, 광주에서 자식잃은 부모들 생각하면서, 감옥에 있는 젊은이들 생각하면서 걷다보니, 이렇게 늦어진 것 뿐이다”라고 하시면서 말 없이 세면실로 들어가시더랍니다. 그 일을  다시 회상하면서 말하는 둘째아드님 김경용씨와 가족자녀들 눈시울이 다시 붉어져 있음을 나는 보았습니다.

5. 오늘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 이시니라”(빌1:8)고 말 합니다. 새번역과 표준새번역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라고 현대인들이 좀더 쉽게 알아듣게 번역했고, 영역본 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Revised Standard Version 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를 ’with the affection of Christ Jesus’라고 번역했더군요.  그런데, 본래 원문이나 개역본 ‘예수 그리스도의심장으로’라는 표현을 다시 곰곰이 음미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쓴 헬라어 단어 ‘스프랏스논’(splagchnon)은  영어의  하트 곧 염통으로서의 심장이 아니고, 염통과 창자라는 두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한 Intestine / Colon을 말합니다. 한문으로 심장이라고 쓸 때, ‘장’자를 오장육부나 장기이식이라 할 때 쓰는 ‘장’자가 아니고 큰창자 작은창자라고 할 때의 창자 장(腸)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인간관의 반영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7:9절을 보면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 하시나이다“.  그리고 예레미야 11: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말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차거운 논리적  분석을 강조하고, 희비애락의 인간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폄하하는  논리적 법리주의나 이성주의적 형식윤리가 아니라, 염통과 창자속에서 도리혀 사람의 역동적 생명실재를 보았던 희브리적 사유가 헬라적 사유에 대조되어 잘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나 보수적 교리학자들은 머리로서 말하고, 경건한  신앙인은 가슴으로 말하지만, 농사짓고 노동하는 민중들은 뱃심으로 말한다고 하지요.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은 뜨거운 심장과 뱃심으로 말한다는 것, 곧 생명의 바닥에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그 언행이 무질서나 광기나 혼란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삼장을 가지고 살고 말하는자는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하고 사는자들인데, 그 사랑은 9절과 10절에서 말하는대로, 지식과 총명으로 더 풍성해지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진실하고 허물없이 하여 의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하기 때문이지요.

6. 지금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젊은 신학동지들에게, 장공김재준목사님이나 신천 함석헌 옹을 직접 가까이 모시고 뵐 수 있엇던 세대의 한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꼭 증언해주고 싶은 점이 바로 그점 입니다. 그 두분들은 당시 어떤 지식인 못지않게  동서학문을 섭렵하고 높은 지식의 소유자였으나,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 집단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오늘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민초와 씨알들을 대했고, 옥중에서 고난당하는 자들과 자녀를 거룩한 역사의 제단에  바친 부모들의 심장을 함께 체휼하셨던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공은 역사참여의 신학운동을 펼친 것이고 바보처럼 눈바람 폭설몰아치는 이국 카나다 땅에서 행려실종인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늦게 4.19 학생의거 소식을 듣고 장공은 뒤늦게나마, 시내로 진입해서 교수단의 대모데열 한쪽 구석을 따라 걸었었노라고 범용기에 적고있으며, 신천옹 함석헌은 절대비폭력 평화주의자이지만,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모르고 저항 해야 할 때 저항할 줄 모르는 사이비, 중용주의자, 사이비 양비론자  되기를 거절하고 ‘예와 아니오’를 똑똑히 말했으며, 목요기도회와 민주인사 법정 진술 방청석을 빠지지 않고 방청하려 했던 것입니다.
7. 자, 이런 성경의 멧시지를 맘에 깔고, 오늘우리사회의 문제점과 향후 행동방향을 생각하면 어떻게 오늘의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 자명해집니다. 오늘 국회안에 몸담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우리들이 존경하는 평소의 동지들도 있고, 한나라당은 그만두고서라도 민주당의 조순형 추미애 의원같은 이들이 다른 정치인에 비하여 청렴결백하고, 법정신에 투철하려 한다는 평소 나의 평가도 감추고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그들이 직간접으로 얽혀있는 정치적, 정당적, 정략적  이해관계 때문에, 사태의 젖체를 좀더 멀리 떨어져서 볼 해석학적 눈이 없습니다. 너무나 사건의 이해관게에  얽혀있어서, 모든 문제와 현실을 부분적으로 왜곡해석하게 됨니다. 고의적으로 그런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모든 인간들이 빠져있는  원죄적 현실성 곧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 때문에 진리의 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된다는 인간의 한계성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8.   오늘 참여민주주의 정신이 다시 폭발하면서, 시민이 자발적으로 광화문 광장과 종로길거리에 모이는 이유는,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삼권분립에 의한 대의의회주의를 우리가 받아드려, 국회가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대의적 의회주의를 동의한 것인데, 국민다수의 뜻을 반영하고 받들어 실천해주어야 할 국회의원들이, 민의의 진정성을 왜곡시키고, 국회의원 숫자라는 물리력에 의지하여 지난 30년간 그렇게 수많은 생명의 희생과  고난을 통해 이만큼 싹틔우고 키워온 민주주의라고하는  한민족 공동체의 삶의 틀을 추잡한 정당들의 정략적 야합에 의해 완전히 무너뜨렸다느데에 대한 분노인 것입니다. 노무현대통령의 통치와 정책수행에 과오나 잘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드러난 그만한 일로서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담당하는 사람을 ‘탄핵소추’하는 일은 않된다는 견해를 여러 가지 민의의 통계조자사, 민변협회나, 시민단체나, 소위 야당텃밭의 민의 조사에서도 드러났는데, 그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헌법정신준수’, ‘국민대의정치의 승리’, ‘의회주의 승리’라는등 갖은 자기합리화의 논리로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괘변입니다. 소피스트들의 얄팍한 변론입니다. 권력투쟁에 집착한 나머지 피해망상이나 과대망상에 사로잡혀서, 현실을 현실대로 보고 판단 할 수 있는 건강한 상식인의 ‘현실검증능력’을 상실해버린것입니다. 이나라 제도권정치의 정당중에서 가장 민주주의 법통을 이어온다고 자부하고 인정받던 민주당이, 그렇게 민중과 민초들의 사랑을 받던 민주당이 ‘서청원’ 의원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한나라당과 협조하면서 감옥에서  빼내올 때부터, 민주당은 하늘의 뜻을, 민중의 뜻을, 역사의 뜻을 배반하고 자기당의 활로를 찾아 부당한 정치세력과 야합을 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일은 그릇되기 시작했습니다.
8.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대의의회주의 제도를 골격으로 그대로 지켜가되, 의회주의자들도 소속정당의 집단적 이해관게에 의하여, ‘대의제 의회제도의 근본정신’을  배반할 수 있다는 경험적 사실, 그리고 인간 삶의 구조가 보다 다양화되어가고 전문화 되가기 때문에,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민주주의 운동이 필요하고 더욱강화되는 것은 21세기 세계지구촌의 큰 흐름입니다. 비정부기관단체 NGO 그룹들, 예들어 환경운동단체, 여성운동단체, 언론개혁단체, 경제저의실천단체, 노동단체, 농민단체,  행정개혁시민운동단체, 컴퓨터망을 통한 네티즌드르이 공론화와 참여정치, 총선시민연대, 대학생 대학원생들의 젊은 지식인 학생집단, 기존의 ymca ywca조직체, 그리고 종교단체들의 운동이 이러한 제3의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9. 이러한 새로운 21세기  참여민주주의 시민운동을 보수적 기득권자들은 소요유발집단, 기존의 제도적 정치의사 수렴제도와 장치를 무력화시키고 혁명하려는 포퓨리즘,이라고 매도하려 합니다. 보수 언론들은 이러한 창조적이고도 자기절제적이며, 유연성과 문화예술성을 모두 겸비한 새로운 참여민주주의 시민운동을 ‘사회안정’이라는 명분으로 폄하하고 비판하려 듭니다. 물론 특정 집단에 의해서 왜곡되거나 조작되거나 고의적인 폭력사태로 변질시켜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서울수도 한복판에서 일과를 끝내고 시민들이 5만명 이상이 모여 정치적 민의를  표출하는 생생한 사실보도를 굳이 외면하려는  신문이나 방송사도 있습니다. 심지어  민주당의 인기도가 떨어지고 ‘탄핵소추’에 대한 국민의 반응이 부정적으로 나오는 사실자체를 ‘통계조사의 조작설’이네 ‘언론방송사의 편파보도’로 책임전가시키는 비이성적 언행까지 보이는 실정입니다.  맘이 아프고 씁씁함을 넘어서, 라인홀드 니버가 말하는바처럼 인간의 원죄성이란 이렇게도 무서운 것인가?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이   진실을 보고 분별하는 눈을 이렇게도 가리워 버리는 것일까 하여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10 성서는 증언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사건은 그당시 사제들과 정치정략자들과 우매한 민중들이 선동당하여 거의 100% 가까운 절대다수의 의결로서  ‘사형판결’ 받아  죽임당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원죄성을 알기에, 인간의 숫자적인 다수가 반드시  진리와 진실을 담보해준다는 소박한 신념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기도하는대로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일을 모르고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하신 것을 볼 때, 인간의 집단무리가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야심가에 의해 조종당하지 않도록, 표퓰리즘에 희생이 되지 않도록, 인간성 속에 간직된 하나님의 씨앗을 키워서 싹트게 하는 어려운 일을 짐짓 포기해서도 절대 않된다는 사명을 자각합니다. 함석헌이 말하는바 ‘생갈하는 씨알’이 되어야 씨알도 살고, 나라도 살고, 인류가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막중한 ‘근본적인 인간혁명’을 지치지 않꼬 일생동안 거듭 실패하고 모독을 당하고 시련과 고난을 당해도 불사조처럼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오직 ”에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일하는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숨밭 김경재 신학 아키브에 발표된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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