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세번째 주일 / 1월 네번째 주일
요나서 3:1-5, 10, 마가복음서 1:14-20
주현절, 사람을 살리는 어부
정해빈 목사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은퇴하신 이상현 교수는 주변인의 신학(Theology of Marginality)을 주장했습니다. 주변인은 미국사회 주류가 아닌 사람들, 그 중에서도 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을 가리킵니다. 주변인은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주류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받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이상현 교수는 주변인이 소외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주변인은 주류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고 주류가 가질 수 없는 창조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득권에 갇혀 있는 사람은 세상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지 못합니다. 하지면 주변인은 주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문제가 무엇인지, 세상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역사를 보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은 언제나 변방 주변부에서 일어났습니다. 또한 주변인은 경계인(Liminality)입니다. 경계(Liminality)는 문지방, 탁자의 가장자리,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 지대를 가리킵니다. 중심의 시각에서 경계를 보면 경계는 변두리입니다. 하지만 경계는 변두리가 아니라 창조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경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양쪽을 넘나들면서 양쪽과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이민자인 우리들은 캐나다와 한인의 경계(In-Between)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캐나다 문화와 한인 문화를 잘 융합하고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창조적인 변화는 주변/경계에서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주변인/경계인으로 사셨습니다.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고 하늘과 땅을 연결하셨습니다. 또한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지 않으시고 북쪽 변두리 경계에 위치한 갈릴리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당시 갈릴리에는 유대인/헬라인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치, 문화적으로 소외되었던 주변인/경계인 갈릴리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과 함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변화가 주변인/경계인들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주변인/경계인으로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새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민자, 주변인/경계인으로 이 땅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에 사는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창조성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주변/경계에 위치한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와 같은 이민자들을 통해서 북미 사회에 새로운 변화,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장은 예수께서 때가 되었을 때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리에 오셔서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선포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고 하나님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려면 하늘과 땅이 만나야 합니다. 땅이 움직여야 하늘이 움직입니다. 예수님은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말슴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위해 갈릴리 바닷가를 지나가시면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헬라 철학자들과 유대 랍비들은 제자들을 구하러 다니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직접 스승을 찾아 다녔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직접 갈릴리를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혼자서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고 함께 일할 동역자들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함께 협력하고 함께 일하는 공동체(community)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중에 행하신 첫번째 행동이 제자들을 찾으셨다는 것은 함께 일하는 동역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기독교 신앙은 공동체(community) 신앙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언제나 함께 기뻐하시고 함께 협력하시며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십니다. 예수께서도 혼자 일하시지 않으시고 함께 일할 동역자를 찾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닷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셨고 역시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결단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헬라 철학자들과 유대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지식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일의 본 훼퍼 신학자는 대부분의 독일 교회들이 히틀러의 게르만 국가주의에 찬성했을 때 이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는 [나를 따르라]는 책을 통해서 신앙을 갖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고난받으신 그리스도를 몸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믿는 사람만이 복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만이 믿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이 우리의 삶과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영어 성경은 “Follow me and I will make you fish for people”로 표현을 했습니다. 헬라어의 원래 뜻은 알리에이스 안트로폰(ἁλιεῖς ἀνθρώπων), “사람들의 어부들”입니다. 사기전화, 보이스 피싱(voice fishing)이라는 말이 쓰이는 것처럼,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쓰이기에 따라서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사람을 죽음에서 건진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헬라어가 말하는 본래 의미는 “사람들의 어부들” 즉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어부, 사람들을 살리는 어부입니다. 예수께서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어부, 사람들을 살리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는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일했다면 이제부터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요나서를 보면 요나가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시리아는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보기에 원수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였던 요나가 보기에 아시리아는 약소국을 괴롭히는 악의 상징과도 같은 제국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시는 분이라는 것이 못마땅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것이 못마땅하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3일 걸어가야 하는 도성을 하루만 걸으면서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의 불성실한 선포를 듣고도 모두 회개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어부, 사람들을 살리는 어부,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어부”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세상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요나와 갈릴리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변부/경계인으로 사는 우리들을 부르시고 우리들을 통해서 새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들은 주변부/경계인으로 살고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중심에 사는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창조성이 있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새역사를 시작하실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사람을 살리는 어부로서 이 땅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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