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세번째 주일 / 1월 네번째 주일
주현절, 토지공개념과 희년
누가복음서 4:14-21, 고린도전서 12:12-20
정해빈목사
토지공개념(土地公槪念, public concept of land ownership)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토지는 본래 우리들 모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개인이 지나치게 토지를 많이 소유하면 안되고 가능하면 공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개념이 토지공개념입니다. 그래서 개인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면 무거운 세금을 내야 합니다. 그린벨트, 도시공원, 공공임대주택 같은 정책들이 토지공개념에 속합니다.1800년대에 태어난 미국의 경제학자인 헨리 조지(Henry George)라는 사람이 토지공개념을 처음 주장하였습니다. 헨리 조지는 급진적인 사람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1800년대 공산주의자들은 땅과 자본 모두를 개인이 소유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헨리 조지는 토지와 자본을 구분해서, 자본은 개인재산이니까 국가가 간섭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토지는 다릅니다. 토지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땅을 소유한 사람은 재산의 일부를 사회를 위해서 공헌해야 합니다. 토지공개념이 없으면 사회는 양극화가 심해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매일 힘들게 일해서 먹고 사는데 어떤 사람은 땅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부를 쌓는다면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은 일할 의욕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먹고 살기 위해서 건물주가 되고 싶어 합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토지는 늘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구가 많아지면 가치가 계속 올라갑니다. 그러다보면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엄청난 부를 쌓게 될 것이고 사회의 빈부격차는 더 커질 것입니다. 헨리 조지는 국가가 개인의 소득에 대해서 세금을 매기는 것처럼, 토지에 대해서 반드시 세금을 매겨서 토지가 지나치게 개인재산의 증식수단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나서 북한정부는 지주들이 가지고 있던 땅을 국가가 소유하고 농민들에게는 경작권만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남한정부는 농민들에게 경작권과 소유권을 모두 다 주었습니다. 연간 소출의 30%를 5년간 지주에게 내면 농민은 자신이 경작하는 땅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대부분의 농민들이 소작인이었기 때문에 땅을 소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5년이 지나면 농민들은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생산이 늘어나고 중산층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소유권을 주지 않고 경작권만을 주는 정책보다 소유권과 경작권을 모두 주는 정책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그 소득을 자신이 가질 수 있으니까 농민들이 자기 땅에서 더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토지공개념이 있어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토지를 통해서 얻어진 이익의 일부는 모두를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땅은 햇빛과 공기와 물과 같습니다. 햇빛과 공기와 물과 땅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만들어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통해서 개인이 지나치게 사사로운 이익을 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토지공개념을 말씀드린 이유는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4장이 토지공개념과 같은 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후에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 61장을 읽으시고 이 말씀에 근거해서 취임설교를 하셨습니다. 대통령이나 수상의 취임연설을 들어보면 그들이 자신의 임기동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취임설교를 들어보면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무엇을 하시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할 것입니다.”
가난하고 억눌리고 아픈 사람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2절,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이 부분은 읽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바로 세우고 사람과 세상을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복수하겠다는 이사야의 글을 읽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역사적이고 정의롭고 자비로운지, 개인을 향해서는 사랑이 풍성하고 사회를 향해서는 개혁적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정의와 자유와 해방의 신앙이었고 개혁적인 신앙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는 정의와 자유와 해방의 신앙이 되지 못하고 있고 개혁적인 신앙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개혁적인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들과 유명한 목회자들이 권력을 추구하였고 돈의 노예가 되었고 비리를 저지르고 교회를 자식에게 세습하였고 윤리적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취임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예수님의 취임설교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누가복음 4장 18절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예수님의 삶과 말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오늘 말씀을 신앙의 좌우명으로 삼고 묵상하고 실천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4장 19절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은혜의 해”는 희년을 가리키는데 이 희년이 오늘날의 토지공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발전해서 안식년이 되었고 안식년이 발전해서 희년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사람과 동물이 휴식을 취해야 하고 7년째 되는 안식년에는 땅이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7년이 일곱 번 지나서 50년째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서 샀던 땅을 본래 주인에게로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7년째 되는 안식년에 땅을 쉬게 하고 50년째 되는 희년에 땅을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줌으로서 빈부격차를 막고 토지공개념을 실천하였습니다. 토지공개념이 수천 년 전에 이미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백성들이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밭의 네 귀퉁이를 남겨두라고 말씀하셨고 추수할 때 밭에 떨어진 이삭을 그들을 위해 남겨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히브리 백성들은 희년을 지키면서 땅을 보호하고 이웃이 너무 가난해지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오랫동안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해 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갈릴리에서는 희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이 쳐들어와서 농민들을 수탈하고 그 다음에는 헤롯왕이 농민들을 억압하고 그 다음에는 성전 관리들이 세금을 거두어 갑니다. 이렇게 삼중으로 고통받다 보니 마을과 공동체는 무너졌고 희년의 말씀은 사라졌습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가셔서 희년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무너진 마을과 공동체를 다시 살리고 무너진 희년의 말씀을 다시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공생애, 하나님나라 사역이 개인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고 자연을 살리는 아름다운 발걸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인류학자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을 찾아가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 먹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류학자가 “시작” 하고 외치자 아이들이 모두 함께 손을 잡고 가서 나무에 매달린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인류학자가 일등이 되면 혼자 먹을 수 있는데 왜 함께 가느냐고 묻자 아이들이 “우분투”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우분투”는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I am because we are)”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는 것처럼, 우리들 모두가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요, 작은 지체일수록 더 소중하다고 말했습니다. 눈과 입과 코와 귀는 크기는 작지만 가장 소중한 지체입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지체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의도하지 않게 학교와 가정과 직장에서 코로나에 감염되어 고통받는 분들이 있습니다. 감염이 되면 육체도 고통스럽지만 왠지 죄인이 된 것 같아 마음도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따뜻하게 위로하고 작은 지체를 더 소중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취임설교로 선포하신 말씀을 묵상하면서 선착순이 아니라 서로를 배려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희년정신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Leave a Comment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