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절 여덟번째 주일/2월 네번째 주일
주현절, 황금률
누가복음 6:27 – 38
정해빈 목사
2월 네번째 주일, 주현절 여덟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누가복음 6장 말씀을 계속 묵상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6장 27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삶의 윤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다보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듣기 부담스러운 말씀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을 대표하는 말씀이 31절에 나오는 황금률(Golden Rule)입니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Do 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이 말씀대로만 살면 성경말씀 다 몰라도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다는 뜻에서 이 말씀을 황금 같은 율법이라는 뜻에서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대접하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이 인정받고 대접받고 사랑받고 싶으면 당신이 먼저 상대방을 인정하고 대접하고 사랑하십시오. 남들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당신이 먼저 그것을 하십시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황금률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 들어있습니다. 학교나 도서관이나 Community Centre에 가보면 여러 종교들의 황금률이 기록된 저런 그림/포스타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과 비슷한 시대 유대교를 대표하는 랍비 힐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해로운 것을 당신의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핵심이고 나머지는 부연설명입니다. 가서 이것을 실천하십시오.” 유교의 [논어]에 보면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이라는 한자가 나옵니다. 어느 날 자공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평생 지켜야 할 한마디 말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공자가 그것은 관용인데,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기독교는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대접하라고 능동적으로 표현을 했는데, 유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수동적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교의 가르침을 Silver Rule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쿠란에 보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신앙인이 아니다, 나의 이웃이 사랑하는 것을 같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신앙인이 아니다” 이런 말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종교들에 황금률이 나오는 것을 보면 황금률이 인간 삶에 필수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나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라는 [역지사지] 같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본능적으로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기대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좋은 관계의 출발점이 상대방이 아니라 나에게서 출발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잘 보여줍니다.
모든 종교에 황금률이 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황금률이나 다른 종교가 말하는 황금률이나 다 똑같은 말씀이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황금률이 다른 종교가 말하는 황금률보다 훨씬 더 강하고 철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접을 받고 싶거든 남을 먼저 대접하라는 황금률은 내가 남을 대접하면 나중에 그 사람이 나를 대접할 것이라는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황금률에 머무르지 말고 더 나아가서 보답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움을 주었으면 나중에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 로마 사회는 후견인/수혜자 사회였는데, 후견인이 수혜자를 보살펴 주면 수혜자는 후견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도움을 줘도 다시 나에게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대가를 기대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나를 미워하는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7절-28절을 보면 4가지 동사가 나오는데,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love, do good, bless and pray. 대접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 말씀도 지키기 어렵고 보답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지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됩니까? 나를 괴롭히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기도하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까?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다. 너희는 세상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니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말씀하셨고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면 하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큰 상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일 성서일과의 구약성경 본문인 창세기 45장을 보면 요셉이 형들과 화해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철저한 황금률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사로잡히지 말고 눈을 크게 뜨고 큰 그림을 볼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big picture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좁게 보지 말고 그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큰 그림을 보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이집트의 종으로 팔려간 이후로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요셉에게는 형들이 원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큰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집트/가나안 지방에 흉년이 들었을 때를 대비해서 우리 집안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이집트로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이 행동이 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형들은 분명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사랑하셔서 요셉의 비극적인 인생을 긍정적인 인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런 큰 그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요셉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4가지 명령, 형들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은 우리를 조종하는 인형극을 하는 사람(Puppeteer)이 아니라 화가(artist)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화가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비극/슬픔/아픔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십니다. 요셉이 만일 나를 팔아넘긴 형들 때문에 내 인생이 망쳤다고 생각하면 그는 형들을 사랑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화가가 때로는 부드러운 재료를 가지고 때로는 거친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듯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원수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과 시련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더 좋은 인생을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원수를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이 폭력으로 다스리니까 많은 유대인들이 폭력으로 저항을 했더니 로마제국이 더 큰 폭력으로 그들을 진압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원수를 부끄럽게 하자는 것입니다. 원수가 회개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저항을 하되 비폭력으로 저항하자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저항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비폭력 저항도 저항의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요셉처럼 아름다운 인생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주현절을 묵상하면서 황금률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더 철저한 황금률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piphany, Golden Rule
Luke 6:27 – 38
But I say to you that listen, Love your enemies, do good to those who hate you, bless those who curse you, pray for those who abuse you. If anyone strikes you on the cheek, offer the other also, and from anyone who takes away your coat do not withhold even your shirt. Give to everyone who begs from you, and if anyone takes away your goods, do not ask for them again. Do 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If you love those who love you, what credit is that to you? For even sinners love those who love them. If you do good to those who do good to you, what credit is that to you? For even sinners do the same. If you lend to those from whom you hope to receive, what credit is that to you? Even sinners lend to sinners, to receive as much again. But love your enemies, do good, and lend, expecting nothing in return. Your reward will be great, and you will be children of the Most High, for he is kind to the ungrateful and the wicked. Be merciful, just as your Father is merciful. Do not judge, and you will not be judged, do not condemn, and you will not be condemned. Forgive, and you will be forgiven, give, and it will be given to you. A good measure, pressed down, shaken together, running over, will be put into your lap, for the measure you give will be the measure you get back. (Luke 6:27-38)
Not only did Jesus tell us the Golden Rule, But he also taught us a more complete and thorough ethic. It was to give good to those who could not reward us, and to love our enemies, to do good, to bless, and to pray. Jesus told us to prevail over evil with good. When we do good, God will change our lives just as God has changed the life of Joseph. We are called not only to remember the golden rule but also to meditate and practice a more thorough golden rule.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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