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절 여덟번째 주일/ 7월 네번째 주일
지상에서 천상을 살다 2
창세기(Genesis) 28:10-19a, 로마서 8:12-25, 마태복음 13:24-30, 36-43
유상진 목사
요즘도 그런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자신의 천국 체험을 간증하시는 분들요. 오래전입니다. 굳이 기원을 따지자면,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어네스트 앵글리(Earnest Angley)라는 미국 오순절교회의 목사가 쓴 “휴거”라는 소설이 한때 한국 사회를 풍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이런 분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이장림 목사라는 사람이 이 “휴거”라는 소설을 번역하면서 한국 기독교 대중들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장림목사는 미국의 신앙서적을 번역출판하는 “생명의말씀사”라는 기독교 출판사의 번역위원으로 일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이장림목사가 아니라, 이답게목사지요. 시한부 종말론 다미선교회 사건의 장본인이지요. 아무튼 뭐 이름 하나는 잘 지어내는 것 같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고 다미선교회고, 사람답게 살라고 이답게고… 저는 어떻게 이런 아메바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 숱한 사람들이 농락당하는지 미스터리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휴거론이나 재림론에 경도되어서 소위 “내가 본 천국”을 간증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미스터리입니다. 뭐 어떤 면에서 오랜 신앙의 연륜을 통해서 경험하는 신비한 체험은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기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워낙 사람이 좁은지라 도저히 이해 불가입니다. 그분들 간증의 메커니즘은 뭐 다 거기서 거깁니다. 어느 순간 의식을 잃고 얼마 뒤에 다시 돌아왔다거나, 잠시 잠이 들었다 깨었다거나 그 짧은 시간이 마치 1년 같았는데, 그동안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를 체험하게 해주셨다 이겁니다. 제가 그런 분들의 간증을 듣노라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이겁니다. ‘아니, 그 좋은 천국에 갔으면 거기서 그냥 살지, 왜, 이 지상에 또 내려왔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드는 겁니다. ‘참 불행하다.’ 그런 생각들이 드는 건 제 신앙이 부족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반면에 신앙심이 투철하신 분들은 뭐 천국의 누구 집은 크고, 누구 집은 작고, 천국의 입구에 커다란 서랍장이 있는데 누구의 서랍은 크고, 누구의 서랍은 작고, 누구의 이름은 있고, 누구의 이름은 없고 하는 대목까지 가면 거의 그 간증 집회의 절정에 가 닿습니다. 그런 집회에서 “아멘”하고 열광하는 뜨거운 분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잘못은 다 목사님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기성교회의 목사님들은 천국의 축복과 상급을 운운하면서 교회에의 헌금과 헌신을 은근히 강요합니다. 정말로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있는 대로 다 교회에 헌납하고 몸으로 헌신하신 분들이 그런 간증을 들으면 정말 설레지 않겠어요? 유수한 신학대학교의 교수라는 분도 천국에도 상급이 있다고 천국 상급론 논문을 내는 마당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은 그런 하늘나라 가고 싶으세요? 이 세상의 논리와 계급이 그대로 유지되는 천국요. 상급에서 차이가 있고, 소유의 편차가 있고, 계급의 차별이 여전히 존재하는 그런 천국요. 그게 정말 천국이라면 전 안 갈랍니다. 사람의 논리와 욕망으로 충분히 표현되는 하나님 나라는 가짜입니다. 적어도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뒹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고,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사11:6-8) 그 정도는 되어야 천국이지요. 그런데 무슨 말도 안 되게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서랍이 있는데 누구의 서랍은 크고, 누구의 서랍은 작고, 누구 이름은 있고, 누구 이름은 없고 막 이러면서 겁박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개인적인 천국 체험들이 왜, 사람들 앞에서 행해지는 유명 간증이 될까요? 그렇게 간증입네 하고, 사람들을 겁박해도 왜, 인기가 있는 걸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이 그 천상의 이야기에 집중된다는 것은 이 지상에서의 삶이 별로 그렇게 재미가 없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왜, 세상살이가 재미없는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혹 나는 세상 재미가 절로 난다고 반문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 일테면, 어떤 잘나가는 사업가는 “아, 요사이 저는 돈 버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자는 “아, 요사이 저는 투자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갓 난 손자를 품에 안은 어른들은 “아, 요사이 저는 손자 보는 재미로 삽니다.” 그렇게 말할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말 그대로 “요사이”입니다. 이 모든 재미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잘나가는 사업가도, 투자자도, 우리 모두도 다 알고 있습니다. 짐짓 모른 체 할 뿐이지 내 손에 주어진 재미난 그 어떤 것도 모두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오늘의 서신서, 로마서 8장 20절은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허무한 모든 것 중에 가장 허무한 것이 뭘까요? 예, 죽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제아무리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장미도 한철입니다. 시들어 꽃잎이 우수수 땅바닥에 떨어지면 허무합니다. 수백 년의 기억을 간직한 아름드리나무도 결국 그루터기만 남습니다. 허무입니다. 한때, 이 세상을 호령했던 영웅호걸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혜자들도 허무에 굴복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하늘의 달과 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지구도 긴 호흡으로 보면, 허무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의가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22절에,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모든 피조물이 이 죽음, 허무 앞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마치 해산의 고통을 겪듯이 신음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모든 피조물의 신음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제외될까요? 아니요, 정말 그랬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천국의 이야기에 그렇게 목메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열심 있는 분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과 똑같이 신음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이 세상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아무리 제 속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아도 그분들이 말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확실히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저의 주변에는 구원과 거리가 먼 일들이 번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실존은 어떤가요? 아니 당장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요? 요사이 우리가 살고 있는 토론토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총질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매일 같이 영문 모르게 죽어 나갑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의 고국 한국에서는 도시의 한 골목에서 33살의 청년이 140M의 거리를 칼을 들고 뛰어다니면서 마구 휘둘러서 4명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다 이 청년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청년이 경찰에 진술한 범행동기는 가관입니다. 세상이 뭐 같아서 그랬답니다. 여러분 이 근원적인 악의 힘을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악의 준동은 우리의 믿음이 적어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로마서 8장 23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도 속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음은 세상 사람들의 신음보다 더 깊습니다. 그것은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언가를 고대하는 사람의 신음이 더 깊은 법입니다. 그렇게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이 세상살이의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보십시오. 우리는 먹지 않고 생존할 수 없습니다. 먹고 살려다 보니 돈도 벌어야 합니다. 솔직히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고 돈을 버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과 피할 수 없는 경쟁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본주의 사회와 인간의 욕망이 이미 이렇게 거대한 판을 짜놓은 겁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캐나다 지난 6월의 물가상승률은 2.8%였습니다. 그런데 식품물가상승률이 8.3%입니다. 부분적으로 많게는 15%까지 올랐습니다. 산지의 생산가격이 오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생산가격은 5.5%가 줄었습니다. 그것은 식품회사들이 소폭의 인플레이션을 이용해서 가격 담합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결과는 캐나다 전체 식품의 유통을 담당하는 3개 회사, Loblaws, Metro, Sobeys의 최대의 흑자로 나타났습니다. 말하자면 이미 돈벌이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도 배려하지 않는 세상이 된 거지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그런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겁니다. 어떻게든 우리는 진정성 있는 대화가 어려운 사람들과 직장생활을 함께 해야 하고, 어떻게든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들과도 이웃해야 합니다. 누군가 돈을 고대하다가 얻지 못해서 내는 신음과 전혀 다른 차원의 신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대해 목말라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서일과 복음서의 말씀은 그런 상황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도 지난 주일의 복음서의 말씀과 패턴이 비슷합니다. 마태복음 13장 24절에서 30절에는 예수님의 비유 자체가 나오고요, 그리고 36절에서 43절은 예수님께서 직접 이 비유를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복음서 말씀의 첫 구절인 2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이 첫 구절만 들으셔도 여러분은 어떤 내용의 비유인지 다 아실 것입니다. 이름하여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어떤 농부가 일꾼들과 더불어 거룩한 마음으로 좋은 씨앗을 자신의 밭에 뿌렸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농사의 성패는 생사와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겠지요. 농부의 일꾼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밭을 둘러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빠듯한 마음으로 밭을 관리하는 일꾼들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습니다. 26절입니다.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가라지는 밀 이삭과 비슷하게 생겨 먹은 잡초의 일종입니다. 좋은 밀 종자를 뿌린 밭이 이제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밭이 된 겁니다. 지금 일꾼들은 매우 황당하고 난감한 상황에 직면한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잠을 자고 있던 밤에 주인의 원수가 와서 자신들이 파종한 밭에 가라지 씨를 뿌린 것을 모르는 상황 아닙니까? 일꾼들은 다급해지기 시작합니다. 27절 이하를 읽겠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 세 절만 읽어도 그 다급함이 전해집니다. 곧바로 주인에게 쫓아가서 지금의 상황을 보고하고, 이 문제의 원인을 주인에게 묻고 있는 일꾼들의 모습에서 이 다급함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당장 뽑자고 하는 의견과 그러다가 다른 밀을 상하게 할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의견이 대립되는 일종의 전체대책회의에서도 그 다급함이 여실히 느껴집니다. 당연하지 않겠어요? 양질의 밀을 더 많이 수확하려면, 한시라도 빨리 손을 쓰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전체대책회의의 결과는 그대로 두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다른 밀 이삭이 상하는 것을 막자는 주인의 의견이 전격적으로 반영되었습니다. 30절입니다.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 전부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두 번째 본문에 해당하는 마태복음 13장 36절에서 43절은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 나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다. 좋은 씨는 그 나라의 자녀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요, 추수 때는 세상 끝 날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다. 가라지를 모아다가 불에 태워 버리는 것과 같이, 세상 끝 날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마13:37-40) 이 예수님의 비유와 해석을 종합해 볼 때, 예수님께서는 이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두 가지의 메시지를 전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세상으로 표현되는 밭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놔두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상 끝 날로 표현되는 추수 때가 되면 이 둘은 완전히 분리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상의 현실과 이 지상에서 신음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 대한 성서의 입장이며, 또한 거기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이런 성급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밭의 주인으로 지칭되는 인자, 곧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드님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책임지시고, 자신의 밭인 이 세상을 깨끗하게 정리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당신의 밭에 가라지를 뽑아내지 않으십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게으르신 겁니까? 아니면, 예수님께는 그럴 능력이 없으신 겁니까?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이 이 세상의 가라지를 지금 그냥 두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모든 논리와 가설은 한마디로 인간의 방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논리와 방식대로 이루어지는 하늘나라가 어디 하늘나라겠습니까? 실제로 예수님이 그때 거기서, 가라지라고 여겨지는 모든 악을 소멸하신다 해도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 시대의 철인, 아니면 혁명가 정도로 여겨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에 의하면 당신의 밭에 있는 가라지는 추수 때에 완전히 소멸된다는 겁니다. 추수 때요.
여러분, 저는 지난 주간 내내 우리들에게 주시는 성서일과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서 왜,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나에게서 왜, 예수님이신가?’하고 스스로 물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질문한다면 ‘정말로 추수 때를 기다리는 것은 누구인가?’ 물었습니다. 우리가 이 지상, 악의 현실에서 신음하는 우리 자신의 삶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꾸면서 하늘나라를 소망한다고 하고, 혹은 주님만 바라본다고 하고, 그러면서 어떤 경우는 다른 신앙인들의 “내가 본 천국 이야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했던 우리가 정말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비유의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새겨 보십시오. 그리고 이 비유의 이야기와 해석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가장 빛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찾아보십시오. 여러분, 제아무리 일꾼들이 다급하다고 해도 그 땅의 주인만큼만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이 가라지의 비유에서 드러나지 않은 그러나 가장 빛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농부, 밭의 주인이신 인자의 밑도 끝도 없는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하나님이신지,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예수님이신지 세상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 내고 계신 겁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누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지금까지 이 지상에서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요? 솔직히요, 솔직히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내가 본 천국을 간증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찬란한 복지와 풍요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닙니까? 그들의 욕망이 투사된 최후의 승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 아닙니까? 생각해 보면, 나는 단 한 번도 기다린 적이 없었습니다. 기다리지 않았던 겁니다. 제가 이 진정한 기다림의 주체를 여러분들에게 좀 쉽게 설명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1971년 생입니다. 그해 늦가을 새벽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때부터 이 지상에서의 알량한 삶을 살기 시작해서 몇 년인가요? 2023년 오늘 7월 23일까지 53년간 이 지상에서 신음하며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제가 태어나던 1971년 이전에 하나님은 존재하고 계셨을까요? 존재하지 않으셨을까요? 당연히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큰 사고가 없다면 앞으로 저는 2~30년 더 살다가 허무에 굴복할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아주 짧게 잡아서 100년 뒤에, 200년 뒤에 하나님은 존재 하실까요? 존재하시지 않을까요? 당연히 존재하실 겁니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세월의 연수로 계수하고 있는 이 시간은 정말 지혜롭게 낮과 밤,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지구의 자전과 공전, 그리고 지구의 기울기 때문에 생긴 기후의 변화와 절기들을 감안해서 사람들이 만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사람이 만든 시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영원 안에서는 얼마의 기간이겠습니까? 그것만 빗대어 보아도 금방 압니다. 우리가 고작 우리 삶의 몇 십년을 살면서 이 모든 존재의 토대를 기다려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니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진정한 인내, 진정한 기다림의 주체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이 세상을 창조하기도 전에, 아니 저 맨 처음에 나를 택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을 통해서 본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님을 알파와 오메가로,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분으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겁니다.(계1:8) 여러분, 솔직히 누가 누구를 기다린 겁니까? 오늘 이 가라지의 비유를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더 똑똑히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인자, 곧 예수님 자신이 하늘나라라고 이미 천명하신 겁니다. 여러분,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하늘나라는 이미 너희 속에 있다. 예수님의 제 일성, “하늘나라가 이미 가까이 와 있다!”라는 선언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일부 신앙인들의 천국에 대한 간증은 단순히 색다른 신앙 체험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나 폭력적입니다. “내가 본 천국”이라는 말 자체에는 천국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내포되어있는 것이고, 이것은 모든 기독교 신앙인들의 삶의 양태와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유대인들이 꿈꾸던 나라는 메시아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던 유대교 당국자들이 핍박했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가 사람이 죽거나 혹은 휴거가 되어서 가는 어떤 행복한 장소로 인식하고 있다면, 제가 서두에 예를 든 간증들이 내용은 어떻든 간에 논리적으로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와 사랑이 실현되는 어떤 영역, 혹은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는 어떤 공간으로 인식한다면 그 간증들은 다 환상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현실 삶에서 이 하나님의 통치에 근거해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의 조직을 믿고, 율법을 절대화했던 유대교 당국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예수님이 불편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근거해서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오히려 참람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하나님 나라는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고, 율법을 완성하므로 가능한 하나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하늘나라를 어떻게 인식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신앙인들의 삶의 양태에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구약성서의 말씀은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입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의 야곱은 지금 도망 중입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에 나왔던 것처럼 형을 속여서 맏아들의 권리를 가로챈 일 때문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사실 야곱의 입장에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현실입니다. 악한 현실입니다. 야곱이 이런 한 데서 돌베개를 베어야 하는 신세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형을 속이고, 아버지까지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아냈겠습니까? 사실 야곱은 자신의 인생이 장미정원인 줄만 알았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복, 하나님께서 아버지 이삭에게 물려주시기로 하신 기업, 그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시온의 대로가 열리고, 매사가 형통해야 될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28장 11절 상반절에 그의 상황을 설명하는 말은 참 처연합니다.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어받고, 아버지 이삭의 기업을 이어받아도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는 해가 저물고 맙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실존이기도 합니다.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반듯이 우리의 인생에서 마지막이 있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의 시작에 행진 찬송으로 함께 불렀던 찬양의 가사가 그렇습니다. “내 고생 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이 찬양의 가사에 의하면,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다는 것은, 그래서 돌베개를 베고 잘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리 인생살이 동안의 크고, 작은 실패와 그로 인한 고생을 의미합니다. 어저께를 살았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야 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처지입니다.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의 처지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았어도, 우리도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롬8:23) 오늘 야곱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창세기 28장 11절 하반절입니다. “그 어떤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잤다.” 야곱의 초라한 삶의 현실입니다. 이때 야곱의 나이는 강철도 씹어 삼킨다는 10대 20대가 아닙니다. 이미 칠순 중반을 넘긴 초로의 나이였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출생부터 성장까지 그리고, 속임수로 만들어 놓은 그의 성취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그렇게 존경할만한 인사가 되지도 못하는 아니, 조금은 화자 있는 인생을 살아온 야곱입니다. 그렇게 그 어떤 곳까지 온 겁니다. 그런데 그때 거기서 일생일대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28장 12절 이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층계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창28:12-13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야곱은 난생처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 여러분, 여기서 여러분이 보시기에 누가 누구를 기다린 것 같습니까? 야곱의 나이가 칠십 중반이 되도록, 그 어떤 곳까지 누가 누구를 기다린 겁니까? 야곱이 그때, 거기까지 하나님을 기다린 겁니까? 아니요, 절대 아니지요! 야곱은 기다린 게 아니라, 내 고단한 하루의 삶을 그저 돌베개에라도 뉘였을 뿐입니다. 진정 기다리고 있었던 분은 저 태초부터 여기까지, 야곱의 그 고단한 삶의 현장까지, 그 어떤 곳에서의 밤까지 기다리고 계셨던 분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야곱이 꼭 저 같아서요. 저만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여러분은요?
하늘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여러분, 하늘나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본문에 야곱과 하나님의 불꽃같은 첫 만남이 이루어진 이 순간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창28:13b) 대부분의 한글 번역 성서는 이 하나님의 자기소개를 더 소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주로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소유격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누군가의 소유로서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일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것을 제가 굳이 사역한다면, 이런 의미일 것입니다. “나는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경험한 하나님, 네 아버지 이삭이 경험한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기다리고 기다려서 야곱의 삶, 해 저문 어떤 곳까지 기다려서 만난 겁니다. 이 야곱의 하나님 경험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경이로운 발견으로 그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16절입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이 처절한 발견은 온갖 신음으로 가득 찬 자신의 삶의 현장이 다름 아닌 하늘나라라는 사실을 발견한 한 신앙인의 독백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계속해서 17절 말씀에 “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70 중반의 노인이 도망자의 신세로 쫓겨 온 자신의 삶의 자리, 그 어떤 곳이 하나님의 집, 곧 천국이 되는 순간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로 말하자면, 가라지가 공존하는 이 악한 현실의 삶에서도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린 사람, 밑도 끝도 없이 하염없이 기다리는 농부, 바로 주님을 인식하는 것이 곧 하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 신앙 자체가 곧 하늘나라입니다. 내 있는 곳이 높은 산이든 거친 들이든 상관없습니다. 내 사는 곳이 초막이든, 궁궐이든 상관없습니다. 지금도 나를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온몸으로 느끼는 그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오늘 이 예배의 맨 처음에 우리가 마주 읽은 시편의 노래는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심”의 영성이 절정에 가 닿아 있는 한 시인의 노래입니다. “아아, 주님,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시139:7-10) Living Heavenly on Earth! 여러분, 이미 이 시인은 지상에서 천상을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분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연세가 연만하신 어른들에게도 아직 직장생활이나 사업을 하시면서 마지막 불꽃을 사르고 계신 저의 친구들과 형님 누님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호렙산 부근의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이 임재하시잖아요? 이 떨기나무는 광야지방에서 잘 자라는 관목들을 통칭해서 부릅니다. 키가 작고 잔가지로만 이루어져 있으니 바짝 마른 광야에서는 얼마나 잘 타겠습니까? 실제로 광야에서 자연 발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캐나다의 산불처럼 큰불로 번지지 않는 것은 광야의 특성상, 이 관목들이 조밀하게 밀집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세 타다가 꺼지는 거지요.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뭐 흔히 보는 불꽃으로 모세에게 나타났는데 그 불은 평소처럼 금방 사그라들지 않고, 계속 불타고 있는 겁니다. 그게 신기해서 모세가 더 가까이 가려 하는데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이 이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시는 겁니다. 이제 여든에 접어든 노인이 ‘여기까지인가 보다.’하고 인식할 때 즈음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겁니다. 모세는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지체 없이 대답합니다.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곧이어 또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출3:5)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이 구절입니다. 여러분, “네가 서 있는 곳”, “지금 모세가 서 있는 곳”, 이곳이 어딥니까? 여러분, 이곳이 어딥니까? 자신의 장인인 사제 이드로와 함께 갔을지도 모를 신전입니까? 여러분, 이곳이 어딥니까? 살인범 신세로 미디안 광야로 도망쳐 나온 자신을 신랑으로 맞이한 십보라의 신방입니까? 이곳이 어딥니까? 이곳이 어딥니까? 여러분, 이곳은 황량하고, 메마른, 먼지 휘날리는 황무지, 모세가 늘 양떼를 몰고 가던 길이었고, 혹 동료 목동과 만나면 앉아서 목을 축이던 모세의 일터였습니다. 이곳은 모세 자신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동료 목동들의 땀냄새가 베어 있는 곳, 모세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니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아무리 팍팍한 광야라 할지라도 그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아니요, 목사님, 모세의 일터여서 거룩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어서 거룩한 곳이 된 거지요! 나의 일터에는 아직 하나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이루어진 곳, 하나님의 나라는 이 예배당도, 오래된 명승지도 아닌 모세의 삶의 현장이었다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두려움 없이 저 예배당 문을 열고 담대하게 나아가십시오. 이전투구가 횡횡하는 세상, 신음 깊은 세상이라도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라고 우리도 야곱처럼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저 신음 깊은 거친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하나님의 품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한 세월 우리와 똑같이 속으로 신음하며 살았던 사도바울의 말로 권면 드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롬8:17, 2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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