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가온찍기, 하늘과 땅 사이에서

창조절 세번째 주일 / 9월 세번째 주일
예레미야서 4:22-28, 시편 19:1-6
창조절, 가온찍기, 하늘과 땅 사이에서
정해빈목사

 

한국의 사상가인 다석 유영모 선생의 글 중에 “가온찍기(「·」)” 라는 글이 있습니다. 가운데 점을 찍는다는 말을 줄여서 “가온찍기(「·」)” 라고 부릅니다. 위에 있는 기억(ㄱ)과 아래에 있는 니은(ㄴ) 사이에 점이 있습니다. 위에 있는 기억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래에 있는 니은은 땅을 가리키고 가운데 있는 점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위에 있는 기억(ㄱ)은 평평한 하늘의 기운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가리키고 아래에 있는 니은(ㄴ)은 하늘의 기운이 아래로 내려와서 땅에 평평하게 퍼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서서 하늘의 뜻을 땅에서 이루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주의 기도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신 것처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동양/한자 문명에 익숙한 우리들은 천지인(天地人)이라는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만 있으면 안되고 그 사이에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가온찍기”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의 중간에 서서 하늘과 땅을 연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역할을 잘 하지 못하면 하늘과 땅이  망가집니다. 부동산 중개인이 중간에서 역할을 잘 하지 못하면 집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모두 손해를 봅니다. 중매를 서는 사람이 중매를 잘 못하면 양쪽 사람의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하늘과 땅의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사람은 하늘의 음성도 들어야 하고 땅의 음성도 들어야 합니다. 하늘의 음성을 듣고 하늘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동시에 땅의 음성을 듣고 땅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기에 따라서 하늘과 땅을 살릴 수도 있고 망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역할을 잘 하면 하늘은 맑고 높고 푸른 하늘이 될 수 있고 땅은 기름지고 풍성한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역할을 잘하면 천지인(天地人)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운명이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가온찍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다만 형이상도 아니고 형이하도 아닌 중간 존재로서 가운데 있는 나 속으로 찾아 들어가 가온찍기(「·」)를 성실하게 해야 한다. 가온찍기(「·」)는 참나인 얼나를 깨닫는 자각(自覺)이다. 맨 첫 끝과 맨 막 끝만 알려고 덤벼들면 자칫하면 잘못되기 쉽다. 첫 끝과 막 끝도 나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 속에 들어가 얼나를 안 자만이 형이상(形而上)도 알고 형이하(形而下)도 안다. 얼나 라는 것의 무한한 가치를 자각하고 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쏘아 맞히듯이 곧이 곧고 신성하고 영특하고 영원한 나의 한복판을 정확하게 명중시켜 진리의 나를 깨닫는 것이 가온찍기이다.” 가온찍기를 다른 말로 하면 중국의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나오는 “중용”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살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 중심에 서서 양쪽 모두를 품고 사는 삶이 가온찍기/중용입니다. 우리는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닙니다. 천사처럼 살 수도 없고 짐승처럼 살아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사는 천사처럼 아무 걱정없이 하나님 옆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짐승처럼 땅만 기어다니며 본능에 따라 움직이며 살 수도 없습니다. 천사는 하늘에서 살기 때문에 걱정할 것도 없고 고민할 것도 없습니다. 짐승도 땅만 쳐다보고 본능에 따라 살기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하늘을 보고 살아야 하고 동시에 항상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의 중간에 서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머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땅은 발을 딛고 사는 삶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고귀하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짐승처럼 땅을 딛고 살면서 땀 흘려야 하고 후손을 낳아야 하고 일해야 합니다. 때로는 짐승처럼 경쟁하기도 하고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짐승이 아닙니다. 하늘도 쳐다보아야 합니다.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늘의 높은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늘의 뜻을 깨닫는 사람, 얼,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 얼나가 되어야 한다고 다석 유영모 선생은 말했습니다. 머리를 들고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하늘의 음성을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하늘의 음성/뜻을 이 땅 위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사람이 해야 할 사명을 한마디로 말하면 가온찍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옛날, 시편 19편을 기록한 시인은 하늘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늘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시인이 보기에 낮하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고 밤하늘은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낮하늘은 낮하늘대로 아름답고, 밤하늘은 밤하늘대로 아름답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은 푸른 하늘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구름이 많은 날은 구름이 많아서 아름답고, 밤하늘은 별이 많아서 아름답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줍니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해에게 하늘에 장막을 쳐 주시니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처럼 기뻐하고 제 길을 달리는 용사처럼 즐거워합니다.” 시편 시인의 고백처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창조절에 절기에 딱 맞는 너무도 아름다운 시입니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찌는 가을을 맞아서 우리들도 시편 시인처럼 맑고 높고 푸른 하늘을 보며 주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성도님들, 가을을 맞아서 가을 하늘을 자주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이른 아침 햇살, 붉게 물드는 저녁 석양 노을, 음력 8월 한가위, 추석 보름달이 떠 있는 가을 하늘을 쳐다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맑고 높고 푸른 가을하늘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시편 시인은 하늘을 보면서 하늘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늘도 아름답고 땅도 아름답고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예레미야서 4장은 전혀 다른 하늘을 말하고 있습니다. “땅을 바라보니 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하늘에도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산들을 바라보니 모든 산이 진동하고 모든 언덕이 요동한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 하나 없으며 하늘을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가고 없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렇게 아름답던 하늘이 캄캄한 하늘이 되었고 산이 흔들렸고 땅이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모두 날아가고 없고 모든 것이 텅 비어있습니다. 하늘이 캄캄해지고 땅이 황무지가 된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는 사람이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범죄하니까 하늘이 캄캄해졌고 땅이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운명이 사람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600년경 남유다에서 활동한 예레미야는 북쪽 바벨론제국이 남유다를 침략할 것을 예언하였고 실제로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멸망한 것이 바베론제국이 강해서가 아니라 남유다의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백성들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람이 범죄하고 타락하니까 하늘도 타락해졌고 땅도 타락해졌습니다. 창세기, 신명기, 여호수아 같은 책을 보면 사람이 정의를 실천하면 땅이 풍성한 결실을 맺고 사람이 정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땅이 풍성한 결실을 맺지 않는다는 말씀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니까 땅에 떨어진 아벨의 피가 울부짖고 땅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사람이 하늘과 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을 만드는 것도 사람에게 달려있고 기름지고 풍성한 땅을 만드는 것도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사람 때문에 하늘도 더러워졌고 땅도 더러워졌습니다. 오늘날에는 공기가 오염되어서 마스크를 쓰고 산소통을 사는 시대가 되었고 물이 오염되어서 생수를 사야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시편 19편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가운데에 서서 하늘과 땅을 아름답게 만드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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