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과부를 돌보는 보아스

창조절 열번째 주일 / 11월 첫번째 주일
룻기 4:9-10, 마가복음 12:38-44
창조절, 과부를 돌보는 보아스
정해빈목사

 

지난 주일에 이어서 룻기의 대한 말씀을 한번 더 증거하려고 합니다. 나오미는 인생을 살면서 3번의 재난을 만났습니다.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난 것이 첫번째 재난이었고 낯선 땅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남편이 죽은 것이 두번째 재난이었고 10년쯤 지나서 두 아들을 잃은 것이 세번째 재난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인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도 없고 두 아들도 없는데 여기서 살아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착한 며느리 룻이 나오미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이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보니 고향 사람들이 두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습니다. 룻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고향 사람들이 나오미와 룻을 환영해주고 보살펴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밭에서 일하던 남자 일꾼들은 룻이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이삭을 줍던 여인들은 룻이 자신들과 함께 이삭을 줍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보기에 룻은 모압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베들레헴 사람들이 인종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룻이 이삭을 줍지 못하도록 괴롭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들레헴 사람들은 모압 사람 룻을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룻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나오미의 친척 보아스 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절대로 룻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였고 룻이 이삭을 줍도록 여러 가지를 배려해 주었습니다.

보아스는 2:12절에서 룻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댁이 한 일은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이제 댁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

보아스는 첫째로 룻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것을 칭찬하였고 둘째로 그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주님께서 그대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그대가 모압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하나님께서 그대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인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보아스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주의 날개 밑으로 불러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보호해 주십니다. 룻은 과부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서 사는 외국인/나그네였습니다. 외국인 과부이기 때문에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가장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그대를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보아스의 이 말이 룻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를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룻처럼 외국인 노동자로 낯선 땅에 왔는데 그 땅에 사는 어떤 사람이 나를 향해서 당신이 이곳에 왔으니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 주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신명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히브리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가 이집트에서 종살이한 것을 잊지 말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아라”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를 읽어보면 “밭에서 추수할 때 밭에 떨어진 곡식과 네 귀퉁이에 있는 곡식을 거두지 말라, 밭에 떨어진 곡식과 네 귀퉁이에 있는 곡식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몫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회적인 약자들을 특별히 기억하시고 배려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약자들을 보호하는 제도를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은 나를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공동체가 살아야 나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살려면 나도 살아야 하고 남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들과 언약을 맺을 때 약자보호법을 지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아스는 하나님과 조상들 사이에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언약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외국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베들레헴 사람들과 언약의 정신을 기억하는 보아스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와 룻은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고향 땅에서 살 수 있게 된 나오미와 룻은 보아스에게 자신들을 가족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을 영원히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레위기 25장을 보면 어떤 사람이 가난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땅을 팔았을 경우, 가까운 친척이 그 땅을 사서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거나, 땅을 산 사람이 50년, 희년이 되면 그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친척이 땅을 사면 땅이 다른 사람들에게 팔리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가리켜서 “고엘 제도” 라고 부릅니다. 고엘은 무른다/되찾는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친척을 도와주는 사람을 가리켜서 “기업 무를 자(kinsman-redeemer)” 라고 표현을 합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가 되어주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자신보다 나오미에게 더 가까운 친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그 친척을 찾아가서 나오미의 땅을 사고 나오미와 룻을 가족으로 받아줄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고 그 친척은 고엘 제도를 거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룻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나오미의 땅을 그 아이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 친척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오미의 땅을 사고 과부 2명을 가족으로 받아주는 것이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서 그 친척은 친척의 의무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기업 무를 자가 되면 나오미의 땅을 사야하고 룻이 아이를 낳으면 나오미의 땅을 그 아이에게 주어야 합니다. 나오미의 땅을 사는 것이나 과부 2명을 가족으로 받아주는 것이 보아스에게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성경에 기록된 고엘제도, 친척의 의무를 감당하였습니다. 언약을 지키고 친척의 의무를 다하는 보아스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나오미와 룻은 가정을 다시 일으킬 수가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2명의 과부에게 다시 살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자신을 희생해서 희망이 없는 과부들을 다시 일으켜 주었습니다. 보아스의 삶이 예수님의 삶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희생하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보아스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도 더 이런 뜻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가복음 12장을 보면 여기에도 과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심판 때에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다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그 구체적인 예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어떤 과부가 동전 2개를 성전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 그 과부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렙돈은 오늘날로 말하면 1달러짜리 동전 2개를 가리킵니다. 보통 교회에서 헌금을 강조할 때 이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께서 과부가 한 행동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찾은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부유한 성전이 과부를 돌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은 과부를 돌보지 않고 오히려 과부로 하여금 가진 것을 다 털어서 헌금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의 탐욕과 교만과 위선을 책망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옛날 보아스는 과부들을 보살펴 주었고 보아스의 후손인 예수님은 과부들의 삶을 불쌍히 여기셨고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율법학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과부들을 돌보고 가족/친척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보아스 같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들도 저 옛날의 보아스처럼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주민들/이민자들/난민들/나그네들,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위로하고 보살피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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