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광야와 희망

창조절 세번째 주일 / 9월 세번째 주일
요엘서 1:8-10, 17-20, 로마서 8:18-27
창조절, 광야와 희망
정해빈 목사

 

캐나다의 일간 신문 Globe and Mail에 최근 [세상은 절망적이지만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The world seems dire. But we must not give up on hope] 라는 칼럼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는 희망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희망은 환상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이루어질 수 없는 막연한 환상을 심어줍니다. 둘째로 희망은 거짓말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지금의 어려운 현실을 숨기거나 왜곡하고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거짓된 정보를 심어줍니다. 셋째로 희망은 수동적이라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어려운 현실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누군가가 이 어려움을 해결해주기를 기다리거나 그냥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겠지 하는 수동적인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로마시대의 철학자 세네카는 “희망과 두려움은 쌍둥이이다. 나약한 사람은 고난을 만날 때 두려워하거나 막연히 희망한다. 희망과 두려움 모두 현실을 타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1600년대 네덜란드의 철학자였던 스피노자도 “희망은 지식이 부족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이 갖는 것이고 합리적인 이성의 도움을 받으면 쓸데없는 희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희망은 환상이고 거짓말이고 수동적이기 때문에 지금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주장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잘못된 희망을 가지면 환상에 빠지거나 거짓말에 속거나 수동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현실을 부인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현실에서부터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모든 희망은 쓸데없는 것이고 현실을 극복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일까요?

희망에는 잘못된 희망도 있지만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좋은 희망도 있습니다. 참된 희망은 현실을 부정하지도 않고 막연한 환상을 주지도 않습니다. 참된 희망은 어려운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최선을 다해서 해결책을 찾고 최선을 다해서 현실을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포기하지만 희망이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희망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희망을 포기하면 그 자리에 절망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가 힘든 고난을 만날지라도 절망하지 않는 것은 이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원리]라는 책을 쓴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두려움을 물리치고 미래를 상상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지금의 현실을 뚫고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희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현실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맞서 싸운다. 이 때문에 희망은 본래의 인간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간은 ‘보다 나은 가능한 삶’에 대한 희망을 통해 현실의 억압이 주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두려움을 피하기는커녕, 무엇이 두려움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뚜렷하게 바라보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희망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고 절망과 두려움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믿음과 지혜와 용기와 상상력과 창의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과 지혜와 용기와 상상력과 창의력을 합친 것이 희망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지혜/용기/상상력/창의력을 통해서 현실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희망입니다.

오늘 우리가 첫번째로 읽은 요엘서 말씀을 보면 기원전 400년대 페르시아 제국 밑에서 살던 백성들 가뭄과 메뚜기 재앙을 받아서 고통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뭄이 들어서 곡식이 떨어지고 풀밭이 사라지고 물이 마르고 땅이 갈라졌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이런 재난을 종종 경험합니다. 가뭄과 홍수와 태풍, 자연재해와 전염병을 경험합니다. 성경은 이런 재난을 한마디로 [광야생활]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창조절 세번째 주일의 주제는 광야(Wilderness)입니다. 성경에는 광야에서 고난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광야생활을 경험하는 것은 자연이 불완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람이 자연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일 수도 있고 권력자들이 부패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견디지 못해서 이집트를 탈출해서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이 선을 행하면 땅도 선을 행하고 사람이 악을 행하면 땅도 악을 행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땅이 황폐화된 것을 보며 부패한 제사장들과 귀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지금이라도 너희는 진심으로 회개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2:12).

이 말씀처럼 재난이 왔을 때 해야 할 첫번째는 회개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이 재난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로마서 8장에서 모든 피조물이 고난을 겪으며 신음하고 있고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광야와 같은 우리의 삶을 가리켜서 피조물이 신음하고 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질병 때문에 신음하고 억압 때문에 신음하고 죽음 때문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아프면 신음소리를 냅니다.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에서 평화를 누리는 일부를 제외하고 억압으로 인해 신음하고 종살이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목격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고통받는 이 세상을 구원해 주시기를 소망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소망은 수동적인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말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나라를 실천하라고 말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모든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신음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과 소망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코로나19, 소득감소, 빈부격차, 기후위기, 자연재해가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불안감/우울증이 증가하였고 이기주의/배타주의가 증가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격리생활이 길어지면서 사회생활은 축소되었고 이웃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었습니다. 세상이 불안하면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고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도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줄어들고 여행도 할 수 없고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인생에 대한 불안과 우울증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이기려는 용기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이 힘들면 힘들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희망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잃어버리면 절망이 우리를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을 온전하게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고통받고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을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우주만물을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협력하여 지금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믿음/지혜/용기/창의력/상상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지금 광야 같은 힘든 인생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고난 너머에 있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만드실 그날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새로운 미래를 위해 열심히 땀 흘리고 광야에서 희망을 바라보는 우리들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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