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두번째 주일 / 9월 두번째 주일
창세기 3:16-19, 4:9-16, 마태복음 12:38-40
창조절,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갑니다
정해빈 목사
인류 역사를 위협하는 3가지 재앙은 전쟁과 자연재해와 전염병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전염병이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전쟁이나 자연재해로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중세시대 1300년대에는 유럽에서 전 인구의 1/3이 흑사병으로 죽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학기술과 의학기술이 전염병을 극복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겪고 보니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인간이 자연을 함부로 대할 때 자연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도 흑사병으로 인해 두 동생과 두 딸을 잃었습니다. 루터는 1527년 “치명적인 전염병에서 도망가야 하는가?”라는 짧은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전염병에서 도망가는 것은 죄가 아니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학적인 대처법과 약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악인이 독과 치명적인 병을 퍼트렸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지켜 달라고 간구할 것이다. 나는 소독하여 공기를 정화할 것이고 약을 지어 먹을 것이다. 나는 내가 꼭 가야 할 장소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면 피하여 나와 이웃 간의 감염을 예방할 것이다. 혹시라도 나의 무지와 태만으로 이웃이 죽임을 당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나는 누구든 어떤 곳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갈 것이다.”
“불이 났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물에 빠졌을 때 헤엄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익사해야 하는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의사의 도움을 받지 말고 ‘이건 하나님의 심판이야. 저절로 나을 때까지 참고 버터야 해’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배고프고 목마를 때 왜 당신은 먹고 마시는가? ‘우리를 악에서 구해 주소서’라는 주기도문을 암송해서는 안 되는가? 만일 누군가 고통 가운데 있다면 나는 즉시 기꺼이 뛰어들어 그를 구할 것이다.”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리를 지켜 주기를 권합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힘과 위로가 되어 주고 죽기 전에 성찬을 베풀어 줄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시장, 판사 같은 공직자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자의 자리를 지켜 주기를 권합니다. 시립병원의 의사, 간호사, 경찰관 같은 공무원들도 계속 맡은 직무를 수행해 주기를 권합니다. 부모와 후견인도 아이들에 대해 힘껏 보살펴 주기를 권합니다.”
마틴 루터는 위의 글에서 기독교인은 치료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동시에 위생관리에 솔선수범해야 하고 고통받는 이웃을 돕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위의 글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는 세상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되고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창조절 첫번째 주일의 주제가 나무/숲(Forest Sunday) 이라면, 오늘 창조절 두번째 주일의 주제는 땅(Land Sunday)입니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아담/하와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3가지의 벌을 받았습니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가족, 친척, 이웃, 직장에서 인간관계의 고통을 경험합니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이것은 경제, 돈, 노동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먹고 살기 위해서 거친 땅을 경작하며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죽음의 고통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고비를 넘으면서 살아야 하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특히 두번째 고통과 세번째 고통은 땅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사이가 멀어지니까 땅과 사람의 거리도 멀어졌습니다. 땅이 사람에게 등을 돌리니까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땅이 좋은 열매를 내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면 땅도 사람에게 불순종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땅도 사람에게 순종합니다. 창세기 4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여서 아벨의 피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 떨어졌다는 말은 가인이 한 행동을 땅이 목격했다는 것을 가리키고 땅이 약자의 증인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의 피가 땅에 떨어지니까 땅이 약자 편에 서서 울부짖었습니다. 왜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냐고, 왜 살인을 해서 피를 땅에 떨어 트리냐고 땅이 울부짖었습니다. 땅이 아담에게 등을 돌린 것처럼, 가인이 악을 행했기 때문에 땅이 가인에게도 등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무리 열심히 밭을 갈아도 농산물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땅이 사람에게 호의적일수도 있고 적대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흙에서 왔으니 마지막 때에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땅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저주인 것 같지만 우리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나라가 망했을 때 끝까지 남아서 농사짓는 사람들을 암하렛츠라고 불렀는데 번역하면 “땅의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땅의 사람들입니다. 땅을 많이 밟으면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우리는 땅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휴거(Rapture),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선택받은 사람들이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땅을 버리지 않습니다. 주의 기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뜻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고백하는 신앙이 참된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기 위해 이 땅으로 내려오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프고 병들고 오염된 이 땅을 버리지 않으시고 이 땅을 새하늘과 새땅으로 덧입혀 주실 것입니다. 땅을 버리고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땅이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영원히 살아야 할 곳입니다.
오늘 우리가 두번째로 읽은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기적/표징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요나가 사흘 낮과 밤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밤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땅 속에 묻히는 것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누구나 죽으면 땅 속에 매장되어야 합니다. 캄캄한 곳에 묻힌다고 생각하니 무섭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땅 속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부활 이전에 사흘 동안 땅 속에 묻히셨습니다. 우리 보다 먼저 땅 속에 매장되셨고 땅 속에서 3일을 지내셨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도 계시고 땅 속에도 계십니다. 이 땅/지구는 없어져야 할 곳이 아니라 우리의 고향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터전인 줄로 믿습니다. 창조절을 묵상하면서 이 땅, 이 지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땅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땅을 밟고 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터전, 우리의 고향인 이 땅을 소중히 여기고 아름답게 돌보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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