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네번째 주일 / 12월 네번째 주일
충만한 기다림을 명상하다
미가(Micah) 5:2-5, 요한복음(John) 5:2-9
유상진 목사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언제 부턴가 저희 집사람에게도 남자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렇다할 물증은 없는데, 두 사람이 서로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는 그런 사이입니다. 제가 보아도 그 남자는 일단 여자에게 굉장히 매너가 좋습니다.
친절하고, 사려 깊지요. 눈치도 빨라서 여자의 필요를 먼저 알아차리고 그것을 말하기도 전에 눈앞에 차려 놓는 겁니다.
제가 봐도 여자들의 사족을 못 쓰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뭐 저 같은 사람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능숙하고, 인정받고, 가끔은 제가 정말 하기 힘들어 하는 적당한 거드름도 피울 줄 압니다.
그래도 여러분, 그 사람이 아무리 잘나도 그렇지, 어떤 남자가 바람난 여자를 그냥 보아 넘깁니까?
가만히 안두죠!
그런데 제가 이렇게 바람난 두 남녀를 불륜의 현장에서 덮치고, 까짓것 드라마처럼 완력을 써서라도 이 둘의 사이를 끝내지 못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이유 밖에 없습니다. 저희 집사람과 이 남자의 어찌할 수 없는 기묘한 거리 때문입니다. 그러니깐 저는 이 둘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사는 겁니다. 딱하게도 제가 매일 먹는 밥은 눈칫밥입니다. 그 눈칫밥이 올해로 48그릇째입니다.
아니, 저 목사가 무슨 헛소리를 하나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미 저의 이야기를 공감하는 세대가 있는 것도 같습니다. 마흔 중반을 이미 넘겼고, 갱년기에 접어드는 연세의 남자성도님들… 제 얘기 이해하시지요?
각자 댁에서 아내 분들이 정말 사랑하는 남자가 자기 자신입니까? 당연히 아니지요. 우리 자신보다 훨씬 더 훌륭한 남자를 사랑합니다. 뭐 저처럼 못난 사람은 그 갭이 건널 수 없는 강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잘 웃어 주던 아내가 어느날 새초롬해서 아재개그 좀 그만해라고 말할 때 즈음이면 이미 아내는 이 이상형의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다고 봐도 괜찮습니다.
그 외에 뭐 밥을 씹으면서 말하지 말라든가, 아무데나 가서 술 먹지 말라든가, 뭘 질질 흘리고 다니지 말라는 등의 잔소리가 시작 되면 아내는 이미 딴 남자와 연애하고 있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러한 소소한 일상의 일들 말고도 공적이든지, 사적이든지 어떤 자리에서의 태도나 거기에서 했던 말에 대해서 일일이 나열한다?
뭐 그러면 아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정체는 점점 더 확실해집니다. 물론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시겠지만, 아내가 사랑하는 그런 남자가 될 수 있는 남자 분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 남자와 아내의 그 기묘한 거리 사이에서 사실 눈치만 살필 뿐입니다.
여러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요?
어디 가셔서, 야 우리 교회 목사가 설교시간에 와이프가 바람났다고 고백하더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우리 어른들의 놀란 눈매를 뵈니깐, 제가 괜히 걱정이 듭니다. 저희 집사람이 아무리 잘난 남자하고 바람이 나도 잘 살테니 걱정 마셔요?
그러면 이제 바람난 아내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아내 여러분, 여러분들이 그렇게 기대하고, 흠모하는 그런 남자가 어느 날 “짠”하고 나타날 것 같습니까? 절대 안 나타납니다.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나타날 리가 없습니다.
왜냐면 여러분, 각자 옆에서 사는 그 남자는 그냥 그렇게 생겨 먹은 거예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한편으로 세상의 모든 아내 분들에게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슬아슬하고도 기묘한 거리 사이에서 사랑하는 그 남자가 나타나기를 부단히 기다리는 아내 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을 그 기다림의 끝을 포기하지 않고, 시린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 내시는 아내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마 그런 여러분 때문에 이런 말이 생겼을 겁니다. 남자는 죽을 때, 철든다는 말요. 여러분들의 그 아름답고도 슬픈 기다림 때문에 그래도 남자들이 죽기 직전에는 철이 들잖아요?
그리고 다시 이번에는 남자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우리의 여자들은 이렇게 일상이 기다림인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기다리고 계십니까? 저는 성질이 급해서 기다리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꼭 저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좋든 싫든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 같은 분은 기다린다는 것을 우리가 현재 있는 곳과 우리가 있고 싶어 하는 곳 사이에 있는 메마른 사막이라고 표현합니다. 기다림의 고통을 메마른 사막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메마른 사막 한 가운데서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이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오랜 기다림 앞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지칩니다. 지치다가 지치다가 결국에 포기합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끝없는 기다림 앞에서 사람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대림절 넷째주일입니다. 요 대림절이라는 말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한자로 기다릴 待자에, 임할 臨자를 씁니다.
뭐 예수님이 임하시길 기다리는 절기라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저 제단에 촛불을 밝혔습니다.
희망을 상징하는 일명 예언의 촛불을 필두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베들레헴의 촛불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기쁨을 상징하는 목자들의 촛불을 밝혔고, 오늘은 사랑을 상징하는 분홍색, 천사들의 촛불까지 밝혔습니다. 이제 성탄전야부터는 저 가운데의 흰색의 초까지 다 밝히는 데 곧 예수님의 강림을 의미하는 촛불을 밝힐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저 촛불을 작년에도 밝혔습니다. 재작년에도 밝혔고, 3년 전에도 밝혔습니다.
아마도 저는 잘 몰라도 우리 교회가 개척된 이후로 수십 년을 때만 되면, 저렇게 밝혔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까지 촛불을 밝혀야 합니까? 사실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비아냥거립니다. 아니, 하루, 이틀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한 달 두 달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일 년 이 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백 년 이 백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천 년 이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다리는 데 아직까지 너 네들이 기다리는 예수가 오지 안았잖느냐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의 말이 맞습니다. 그 분이 오시기는 오실 것 같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생애에, 우리 대에 오실지, 안 오실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 하나는 압니다. 아직까지, 우리가 아직까지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은혜라는 사실요.
저는 2000년이 지나도 안 온 예수에 대해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인간의 역사를 끝내고,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실 재림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데, 너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만약에 너에게 더 이상의 기다림이 없다면, 네가 기다리는 그 무엇은 이미 왔는가? 솔직히 딱 까놓고 이야기해서 사실 세상에 기다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집 살 때까지든, 아들 장가 갈 때까지든, 남편이 돌아 올 때 까지든 생각해 보면, 지나온 삶의 여정… 그 마디마디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땅 꺼지는 한숨만 나올 때 그래도, 실날같은 작은 기다림, 지푸라기 같은 작은 희망을 움켜쥐며 살지 않았습니까?
누구를 막론하고 한 점의 희망이라도 있는 한, 그리고 그 희망을 준 절망이 있는 한, 사람들의 가파른 삶은 무엇인가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아내들처럼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잔소리도 해야 하고, 때로는 체념도 하고, 때로는 투정도 하고…
좀 직설적인 표현을 쓰자면 기다린다는 것은 그냥 삶을 사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증거이고, 그러니 아직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일면에서는 은혜입니다.
오늘 신약성서 본문의 말씀은 아직도, 여전히, 지금도 기다리는 모든 인간 군상들의 삶의 현장, 마치 이 세상의 작은 축소판 같습니다. 사실 오늘 신약성서의 본문은 교회력과는 거리가 좀 멉니다. 구약성서의 본문은 대림절 4째 주일, 오늘의 성서일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사실 제가 가장 최근에 함께 트럭드라이버로 일했던 한 청년과의 대화중에 묵상했던 말씀입니다. 그 분이 퇴사하고 난 이 후에 그 분이 돌던 코스를 지금 제가 맡고 있으니깐 제 선배 드라이버지요. 이제 군대를 가서 더 이상 트럭드라이버로 일하시지는 않지만 그 분과 하루 종일 이런 저런 삶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이 복권 한 장을 가져와서 저보고 기도 해 달라는 겁니다. 그 분이 오늘 산 복권을 보여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걸 안사면 희망도 없다는 겁니다.
No buy, No hope.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요한복음 5장의 이야기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신약성서 본문에는 어떤 무속 신앙이 깃들어 있는 연못이 하나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10개의 문중에 북쪽 벽에 두 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양의 문입니다. 왜, 양의 문이냐?
그 당시에 희생제단에 바칠 순백의 양들을 이 양의 문을 통해서 들여왔기 때문입니다. 양들의 입장에서는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문인 거지요.
생각해 보세요. 한 번 들어가면 죽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그 양의 문 곁에 베드자다라는 못이 있고 그 주변에 다섯 개의 주랑이 있고, 그 주랑에 눈먼 사람들, 다리 저는 사람들, 중풍병자들… 수 많은 환자들이 누워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그렇게 누워있는 것은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습니다. 기다리는 겁니다.
3절에 보니깐,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기다리느냐?
때때로 천사들이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낳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온천수가 터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2-3세기 경의 기독교 순례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 베드자다의 물이 붉은 색으로 변할 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쨌든 이 풍경을 한번 그려 보십시오. 하나 같이 병색이 짙은 얼굴로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조그만 연못을 응시하고 있는 수많은 환자들의 눈!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없는 눈먼 사람들은 부스럭 거리는 소리 하나에도 청각을 곤두세웠을 겁니다. 누군가 움직일 기세면 그것은 물이 움직인다는 신호일 테니까요. 그래도 몸은 성하니 누군가의 뒤척이는 소리를 듣고 다짜고짜 누운 사람들을 밟고 영문 모르게 물에 뛰어 들기를 몇 번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곳과 거기가 다른 점이 뭐가 있습니까? 다 그렇잖아요?
지푸라기 같은 작은 희망, 실 날 같은 기다림을 움켜쥐며 살았잖아요?
그 때 거기서도 기다리고, 지금 여기서도 기다리는데 정작 문제는 이 기다림이 그 누구의 삶도 변화시킬 수도 없고, 그 누구의 삶도 궁극적으로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겁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해 왔던 그 작은 삶의 기다림이 우리 저 깊은 곳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는 겁니다. 기다림이 우리에게 온전한 삶을 허락해 줍니까? 복권당첨을 기다리며 살기는 살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깐, 그것은 삶이 아니라 차라리 버팀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 때 거기의 베드자다나 지금 여기 우리들의 삶의 현장은 같은 곳입니다.
그 베드자다, 삶의 현장을 예수님께서 찾아 가신 겁니다.
여러분, 오늘 이 38년된 환자에게 너무나도 간절한 기다림이 있어서 예수님이 찾아 가신 겁니까? 아니면, 그의 그 간절한 기다림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거기에 가신 겁니까? 어떠신 것 같으세요?
오늘 구약성서 본문의 말씀과 함께 묵상하면 진정한 기다림의 주체자가 누구인지 더 명확해 집니다. 오늘 예언자 미가를 통해서 메시아 선언을 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의 여러 족속 가운데서 가장 작은 족속이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너에게서 나에게로 나올 것이다.”
여기서 누가 누구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까? 유다의 가장 작은 족속,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에게로 오기를 기다리는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기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계속해서 성서는 그 메시아의 기다림은 아득한 옛날부터, 태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 베드자다에서 가장 오래 앓아 보이는 38년된 이 환자의 기다림보다 더 오래된 기다림이, 더 지순한 기다림이 아득한 옛날부터 이미 있었다는 겁니다. 38년된 환자가 앓을 만큼 앓고, 그리고 한 편으로는 포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실 날 같은 희망을 갖고 이 궁색스러운 삶을 이어가기도 하는 그 동안의 기다림 이전에, 심지어는 이 세상 만물을 만들기 이전부터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가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은 마치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의 기다림, 오늘 산고의 밤을 넘어 순산의 아침을 맞은 여인처럼 예수님께서 이 38년된 환자 앞에 그의 기다림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신 겁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낫고 싶으냐?”
세상에 이런 우문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이 불쌍한 38년된 환자! 몸을 운신하지 못하여 들 것에 실린 채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반신불수의 중한 중풍병 환자일 것 같고, 당연히 혼자 걸어서 여기까지 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낫고 싶어서 성전의 문이 열릴 때, 가족이나 친구에게 어렵게 부탁을 해서 들것에 실려서 여기 왔고, 해질 녘에 다시 들것에 실려서 집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낫고 싶어서, 궁색스런 도시락까지 싸가져 왔을 것입니다. 낫고 싶어서, 그러기를 일주일이 아니라, 1년이 아니라 10년, 20년, 30년 이상을 했을 것입니다. 혹 물이 움직였다 하더라도 반신불수의 환자가 제일 먼저 못에 내려가기란 100년이 지나도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을 잘 알면서도 낫고 싶다는 그 작은 희망으로 그렇게 매일매일 이 베드자다에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낫고 싶으냐?”라고 묻는 것은 우문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차라리 이 질문은 자신의 궁핍하고 불운한 연대와 그 속에서의 선험적인 판단으로 엉켜 붙은 삶의 밑둥을 뿌리 채 흔들어 놓는 질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이미 아시고 물으신 질문…
“낫고 싶으냐?”
그것은 오히려 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기다림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더 깊고, 더 오랜, 더 지순한 기다림이 먼저 있었다. 이 세상 만물이 만들어 지기 전부터 너를 알았고, 네가 낫기를 기다린 한없는 기다림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너 보다 더 아프게 너를 기다리는 이가 있다. 그 기다림의 본질을 아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을 알았다면 38년 동안 이 베드자다에서 이러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이 38년된 환자는 쭈뼛거리면서 대답합니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몸을 질질 끌고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이 환자가 38년 동안 기다리던 메시아는 누굽니까? 자기를 번쩍 들어서 물에 넣어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입니까?
나에게 명예와 권세를 주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나에게 적당한 지위에서 안락을 주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에게 복권을 당첨 시켜주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다려야할 메시아는 우리에게 돈버는 지혜를 주시는 분도 아니고,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득하는 재주를 주시는 분도 아니고, 오늘 우리가 기다려야 할 메시아는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는 메시아입니다.
38년이나 골골 앓던 환자를 만나신 주님께서는 다짜고짜 말씀하십니다. 그 동안 38년 동안 땅에 한 번도 발을 디디지 못했던 그 환자에게 주님은 일어나 걸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가능성도, 방법도 제시해 주시지 않으시고, 니 알량한 거적대기를 들고 일어나 걸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던 그 애타는 기다림을 박차고, 너를 물에 넣어줄 사람을 기다리던 그 타성의 거적대기 치워버리고 일어나라.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엉켜 붙은 타성과 불운과 물질과 명예와 권력과 자랑의 알량한 거적대기를 박차고, 운명의 거적대기를 박차고 일어나라!
걸어가라!
그러므로 여러분, 진정한 기다림은 또 하나의 가슴에 길을 내는 일입니다. 이 세상의 관성과 타성에 충분히 젖어 있는 나의 길이 아니라, 그의 길을 내는 것입니다.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으로도 오시는 그분의 나라를 향해 우리를 온통 활짝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기다림은 어딘가에 가 닿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다림보다 더 원초적이고, 더 오래고, 더 지순한 저 하나님의 기다림에 가 닿는 것입니다.
요 최근에 요나회원들과 내년도 사업계획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나회 성경공부로 모이는 청년들은 평균 4명 내외입니다. 50년이 다 되어 가는 우리 교회의 예배에 출석하는 청년들이 4명입니다. 세들어 있는 설움이지요, 그나마 모일 공간도 부족해서 이리 저리 쫓겨 다닙니다. 아마도 우리 교회에서 가장 연약한 소회일 것입니다.
그 몇이 머리를 맞대고 내년도 사업계획을 짜자니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뭐 지금 이런 거 필요합니까?”
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만 두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 알파교회를 가만히 두지 않으실 것이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어린 아이들이 내일이 되게 하실 것이고, 우리의 어른들을 춤추게 하실 것이고, 우리들을 새로운 비전으로 들끓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반드시 흥왕하게 하실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실 지도, 또 그 때가 언제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지만 나는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 대에 우리들을 통해서 그 일 이루시길 바랄뿐이다.”
사랑하는 알파교회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오늘은 대림절 넷째주일입니다. 내일 모레면 성탄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카네이션-화육하셨다는 겁니다. 그 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습니다! 그런 분이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의 절기는 이 얼척도 없는 일의 첫 도화선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 겨울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경의로운 감정들이 교차됩니다. 한량없는 기쁨이기도 하지만, 또한 숨막힐 듯 고요한 거룩입니다. 참 어여쁘고, 연약한 한 아기 앞이지만 말 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맨 바깥 한데 한없는 소외 같지만,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참여입니다.
이 겨울은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한 발자욱 더 나아갈 것을 다짐하고, 우리의 기다림을 재장전하고, 그 기다림의 날을 더욱 벼리는 절기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넋 놓고 세월을 죽이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멈춤이 아닌 치열한 준비이며 소비가 아닌 새로운 창조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의 성취의 시간이 올 때까지 긴장감 속에서 깨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거의 그리움을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러나 이미 존재하시는 그 분의 현존 안에서 그분의 성취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알파교회 교우 여러분, 이 겨울에 여러분은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베드자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라면, 아무리 둘러보아도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를 이 절망의 자리에서 견고하게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이 있는데, 우리를 이 낙담과 탄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이 있는데, 희망 없는 이 땅에서 다시 희망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가슴에 또 하나의 길을 내는 충만한 기다림입니다.
이 베드자다에서 산고의 밤을 지나 순산의 아침을 맞이한 얼굴로 찾아온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네 알량한 삶의 거적대기를 박차고 일어나 걸어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다시 걸읍시다.
똑바로 걸읍시다. 아니 차라리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현장으로 의연하게 달려 가십시다.
이 베드자다가 아니라 저 마을로 다시 돌아가십시다. 굳은 살이 못나도, 다시 망치와 정을 잡읍시다.
다시 컴퓨터 자판을 잡읍시다.
다시 운전대를 잡읍시다.
다시 빗자루를 잡읍시다.
다시 펜을 잡읍시다.
그런 우리들에게 오늘 구약성서 본문의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그리고 그는 우리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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