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주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

창조절 열두번째 주일 / 11월 세번째 주일
우리가 믿는 하나님
베드로전서(1 Peter) 2:9–12, 히브리서(Hebrew) 1:1-2
윤용섭

 

우리가 믿는 하느님

– 박훈주 목사의 설교집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에서 –

제가 여기 선 것은 설교문 하나를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제목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라는 이 설교문을 읽어드리고 싶었던 것은, 교우님들은 이미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이신지 잘 아실 줄 믿지만 다시 한 번 복습해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되어서 입니다. 이 설교문은 고 박훈주 목사의 설교문으로 그 분은 일정시대 일본대학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한 후 다시 도쿄신학대학에 진학하여 대학과정과 대학원 과정을 밟았았고, 졸업 후 재일한인동포사회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해방 후 귀국해서 대학에서 교수로 교회의 목회자로 일했습니다. 읽다가 제가 참고 말씀을 드리고자 할 때는 이것은 제가 붙이는 말입니다 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 읽은 후에 제 생각 한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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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에 관하여 얼마나 많은 말들이 언급되어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철학자 포이에르바하는 “하느님은 인간이 자기 소망의 대상을 이상화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고, 칼 마르크스는 “하느님은 인간이 빈곤한 나머지 만들어 낸 소산”이라고 주장했으며, 니체는 “하느님은 죽었다”고 사망진단을 내렸고, 사르트르는 “하느님은 지금 부재이시다”고 부재증명을 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범신론자는 하느님은 여기저기 가릴 것 없이 충만하다면서 인간탐구의 그 무엇, 인간적 동경이나 인간적 향수의 그 무엇을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또 어떤 유신론자는 세계의 궁극적 이상 같은 것을 하느님이라고 이름 짓고 있습니다.이렇게 철학자나 사상가는 법칙성, 세계이성, 절대관념 같은 것을 하느님 위치에 앉히는가 하면, 일반 서민들은 어떤 곤궁이나 위기에 직면하면 무작정 하느님을 부르면서 도와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성서가 말하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리스도교의 교회와 교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첫째로 인간이 발명한 하느님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계시의 하느님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계시의 하느님은 우리 인간 편에서 알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 1 : 1-2 공동번역 / 이 설교문의 바탕 성경구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이나 자연에 의하여 인식되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를 계시해 주시는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철학의 하느님, 관념의 하느님, 사유의 하느님, 발명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으로 우리의 삶 속에 그리고 역사의 현장마다에 인간과 동행하는 살아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참고> : 방금 읽은 히브리서 말씀이 이 설교문의 바탕 성경구절인데, 여기서 ‘우리 조상들’의 ‘우리’는 저와 여러분들을 뜻하는 ‘우리’가 아니고, 유대민족으로서의 ‘우리’입니다. 이것으로 기독교는 유대민족의 종족종교에서 나온 종교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나 기독교의 하느님은 단지 개인의 삶에만 동참하시는 하느님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의 역사 현장에도 동참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복음서 1장 14절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 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께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 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하느님은 말씀의 하느님이시고 그 말씀이 성육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성육 없이는 하느님의 말씀은 역사 가운데 전달될 수 없고, 하느님의 성육 없이는 하느님의 말씀에 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아들의 성육은 하느님 계시의 최후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느님의 계시에 의거하여 예언자도 사도도 하느님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며, 교회도 이 밖에 다른 방법으로는 하느님에 관하여 말하지 아니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 같으신 그 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고 말합니다.

둘째로, 성서에서 계시하는 하느님은 자기를 살아계시는 인격의 하느님이십니다. 즉, 성서의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역사하시는 인격의 하느님으로 증언되어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야훼라고 칭하는데, 이것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민수기와 신명기에 따르면, 야훼는 “나는 살아 있다”고 말씀하시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 야훼는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도 야훼는 살아계시는 하느님으로 인간에게 친교를 구하신다고 요한복음, 고린도후서, 디모데전서, 히브리서 등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참고> : 출애굽기 3장 13절에 보면, 모세가 애급 미디언 광야의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자기 민족을 구하라는 사명을 받은 후에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하느님은 ‘나는 나 I am who I am’ 이라는 신이라고 답변합니다. 그 ‘나는 나’라는 신의 이름을 유대인들은 ‘야훼’라고 명명했는데 그 야훼의 본뜻이 바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동양사상에선 천지만물은 저절로 생겨났다는 자연론인데 비해 성경에서 출발한 서양사상에선 창조주가 창조했다는 창조론입니다. 그러면 그 창조주는 누가 만들었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지요. 그 경우 야훼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즉 피조된 존재가 아니고 본래부터 스스로 있어온 신이란 말입니다. 그 야훼라는 신의 명칭을 영어성경은 대문자 God으로 표기하고 우리는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라 표현하는데, 그 단어들 속에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the Creator 창조주’가 그 낱말들의 뜻입니다.

창세기 3장 9절에 보면 하느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면서 아담에게 말씀하시고 그의 응답을 구하십니다. 하느님은 계속해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인간과 대화를 나누시고 관계를 맺으십니다. 그러므로 나와 당신이라는 인격적 관계에서 경험되는 하느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는 인격의 하느님이십니다.

신약성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육하셔서 인간을 찾아오시고 친교하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살아계신 인격의 하느님으로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살아계셔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고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하는 이 성육(incarnation)이 그리스도론의 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들의 성육이야말로 하느님에 관한 신앙적 해석의 최후 표현인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통하여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하고 간청하는 필립보에게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하고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들으면 하느님에게서 들은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을 믿는 것이 됩니다. 그는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계시하는 아들의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셋째로,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마태복음 11장 13절, 사도행전 17장 24절, 로마서 1장 25절, 에베소서 3장 9절 등등에서 천지가 하느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표현과 그 창조역사에 하느님의 아들이 관여하셨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는 그의 선교의 중심주제인데 그것은 하느님의 지배, 하느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과 세계가 스스로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세계와 인간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이며, 세계와 인간은 하느님과의 의존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이 천지의 창조자라 말할 때 그것은 하느님께서 세계와 인간을 지배하시는 주권자라는 것을 뜻합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을 주(Adonai)로 나타내고 있는 곳이 수 없이 많은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세계와 인간에 대하여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신다는 뜻합니다.

출애굽기 1장 3절에 “나는 너희의 하느님 야훼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처럼 야훼는 절대 주권자로서 이스라엘에게 절대복종을 요구하십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야훼의 명령은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나는 야훼 이외의 것을 하느님으로 모실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 : 동양의 자연설에서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해도 인간 역시 자연의 한 부분으로 보는데 비해 성경의 창조설에서는 인간 역시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이 창조한 것들을 rule over 즉, 관리하고 경영하고 개발할 권한을 받은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즘 환경학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학자들 간에 논란들이 나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그렇게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받은 인간은 인간의 유일한 생존 처인 지구라는 별과 거기서 동거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다스리느냐는 논란입니다. 지구라는 별은 자기 자신의 병을 자신이 치료하고 자정시키면서 유지되는 생명체와 같은 별인데, 오늘날 지구는 자신을 치료하고 자정시킬 능력이상의 쓰레기와 오염물질을 인간들이 쏟아내는 바람에 흙도 물도 공기도 죽어갑니다. 인간들은 그 다스림 권한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소유욕 채우기, 호기심 시험하기, 편의욕구 추구하기에만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인간이란 생명체가 지구상에 남아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려야 한다고 호루라기를 부는 예언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럼에도 현재로는 그 예언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교회도 별 관심을 갖지 않아서 교인들에게 환경문제에 대한 설교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넷째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칭하고 있으며, 바울은 하느님을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엡1:3)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기도는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신약성서의 핵심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외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를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은 요한1서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 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셔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고> : 이 대목에서 제 뇌리에 얼핏 떠오른 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은 어떤 위급한 일이나 당혹스런 일을 당하면 나도 모르게 “아이구 어머니”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구원자’는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또 떠오른 생각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의 생각 속에 몇 만 년 잠재되어 온 남존여비 사상이 노출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2천 년 전 당시 유대지방에선 사람 수효를 셀 때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은 그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하거든요. 그런 점으로 보면, 인간의 역사에서 남자들은 참 긴 세월동안 여성에게 아주 공공연하게 사회적 폭력과 문화적 차별을 휘둘러 왔다는 점을 감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복음 15장 11에서 32절에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죄인에 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은혜가 최고로 잘 묘사되어 있으며, 모든 비유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아버지의 비유는 예술적 기교에 있어서도 절대로 흠이 없는 작품입니다. 이 비유는 아버지 하느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로운 사랑의 하느님이신가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서 하느님은 내 비유의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죄인이 하느님에게 돌아갈 때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내서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며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고 기뻐하면서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하느님께서 죄인을 취급하는 근본적 원리를 말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마태 20장 15절에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는데, 하느님의 은혜가 가장 잘 선언되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보수는 인간의 공덕에 의하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에 의해 평가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은혜란 인간구원을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공덕 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이 친절한 포도원 주인을 닮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친절은 우리들의 공덕과 관계없이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냐?” 하느님은 자신의 후한 처사에 항의하는 사람에게 “나는 이와 같이 인심 좋은 처사를 한다. 그러니 너희도 인심 좋은 처사를 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상 드린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하느님, 살아계시는 하느님, 창조자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알려진 인식의 순서에서 말하면, 아들이 첫째이며, 그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 하느님이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다음으로 아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시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아들이 약속한 영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신앙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하여 이 아버지 하느님, 아들의 하느님, 성령의 하느님으로 축도하고 세례를 베풉니다. 이 경우 우리는 아버지는 창조자로, 아들은 화해자로, 성령은 구원자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나는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증언해드렸는데,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을 말하면서 시종일관 하나의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을 설명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

<낭독자가 붙이는 후기> 이상으로 설교문을 다 읽었고, 이제 제 생각을 좀 말씀드리려 합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감옥에 있던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에게 보내서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묻게 했는데, 그 물음에 예수께서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고 답변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성경구절은 당시 사람들이 메시아를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을 증언해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당시 사람들이 어떤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상황에서 얼마나 힘들고 참담한 삶을 살았기에 그렇게 메시아를 기다렸고, 그 메시아가 와서 무엇을 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대체로 예수님을 교회가 전통적으로 전해준 뜻으로만 인식해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화적이고 신격적인 존재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을 바탕에 깔고 그 분의 말씀 내용과 삶의 방식과 심지어 희생적 죽음까지를 해석합니다. 성도들을 영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교회로서 예수님을 신성화해서 가르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상을 종합적으로 알기에는 그런 이해만으로는 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민중들이 기다리면서 머리속에 그렸던 메시아 상은 자기들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했던 영도자 다윗 왕이었거든요. 즉 그들은 다윗 같은 위대한 임금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여러 번 자신은 세상의 임금으로 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 하느님이 보내셔서 왔으며, 그러나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몇 번에 걸쳐 말씀하셨는데도 재자들마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들을 중용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민중들에게 설교하시고, 병을 치료해주시고, 당시 권력자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시고, 자기가 죽은 후에 자기의 하느님 사상과 메시아적 삶을 계승할 사람들을 골라 제자를 삼으시고, 그러다가 권력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는 것, 그것이 복음서의 얼개이고 내용입니다. , 그는 당시 그 나라 사람들이 기대했던 왕으로 왔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과 일부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처럼 세상의 임금으로 온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이야말로 진짜 메시아였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이 승천한 후 3일쯤 지나서부터였습니다. “아하, 예수 그가 진짜 메시아였구나. 그이야 말로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으로만 전해오던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온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그 깨달음이 정리되고 전파되어 오늘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에 온 참 목적은 땅위에 평화를 심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사랑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온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즘 문재인 대통령이 그동안 적대적 공존관계로 이어져온 남북관계를 평화적 공존관계로 바꿔보려고 무등 애를 쓰는 것을 봅니다. 아직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 내지 방해하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머지않아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해하고 동조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통일로 가는 길이고 한민족이 번영하고 세계로부터 존경받게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사셨던 그 절박하고 우울했던 사회와는 많이 다른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오늘날엔 예수님이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하셨던 일들을 정부와 각종 공공기관과 사회단체들이 전문성을 갖고 비교적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예배드리고 찬송부르고 예수믿고 천당가라고 하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한 발짝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세상 곳곳에선 강자들이 약자들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짓누르고 차별하고 학대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도 아예 법과 제도를 만들어 아주 합법적으로 괴롭히고 착취하고 억압하는 일들도 숫합니다. 그래서 토론도 벌어지고 비판도 가해지고 그리고 시위도 하고 궐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그런 일들에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아니, 의도적으로 관심갖기를 피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가 그처럼 세상사에 무관심할 때, 세상 사람들 사이에 도대체 교회란 게 필요한 거야?” “신이란 게 과연 있는 거야?” “종교란 것이 꼭 필요한 거야?” 하는 생각과 말이 생겨나고 퍼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서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들으시오. 세상에 완전무결한 시대는 없었소. 지금도 아니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요. 그러니 내가 내 살던 시대에 세상사에 관심을 갖고 주시했고 그러다가 뛰어들었 듯이 당신들도 당신들이 사는 시대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외면치 말고 유심히 보면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그 일을 해결해보려는 일에 동참하시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좀 거친 운동에 뛰어든다 해도 정부가 잡아가지도 감옥에 처넣지도 않지 않소.” 최근 프란치스코 로마 교황이 종종 세상문제에 대해 말해서 인기가 상당히 높습니다. 제가 보기엔 세상은 교회가 세상문제에 대해 바로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생각됩니다.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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