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딱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 윤혜림

주현절 세번째주일 / 1월 세번째 주일
하나님을 딱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요한복음(John)1:35-51
윤혜림 전도사

 

여러분이 지금 인생에서 딱 한 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리고 단 하나의 질문만을 할 수 있다면, 어떤 질문을 하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하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펜이 있으시다면 주보에 질문을 끄적여 보셔도 좋고, 핸드폰에 기록해 보셔도 좋습니다. 너무 오래 생각하지 마시고, 딱 떠오르는 생각, 순간적으로 마음에 확 와 닿는 솔직한 질문을 한번 적어보세요.

이 질문은 제가 한창 제 소명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직접 받았던 질문입니다.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저는 신학을 너무나 좋아하면서도 목회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성 목회자들을 많이 만나보지도 못했었고, 제가 목회에 소명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었죠.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졸업 때 까지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밤낮으로, “하나님, 저를 왜 만드셨나요?”라는 기도를 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지만 어떤 구체적인 소명이 있는지를 몰랐던 저는 매일 주님께 저를 만드신 이유를 알려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응답을 받지 못했었죠. 그렇게 꽤나 긴 시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신학생으로서의 기간을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졸업을 겨우 일주일 남짓 앞둔 때에 우연히 신학생 리더십 컨퍼런스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만난 한 동료 신학생이 저에게 바로 오늘의 이 질문을 하더군요. 네가 지금 인생에서 딱 한번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딱 하나의 질문을 할 수 있다면, 어떤 질문을 하겠느냐고. 그 순간 저는, 망설임도 없이 이런 대답을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 했습니다. 그때 제가 탁 뱉은 질문은 바로, “하나님, 제가 목회를 해도 될까요?” 였습니다.

스스로 제가 한 질문에 저는 순간 너무도 놀랐습니다. 제가 그 동안 하나님께서 저를 왜 만드셨는지, 소명을 찾아가며 갈구하는 동안 저는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다고 생각 했었는데, 알고보니, 제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품고 있던 소망,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스스로 깨닫고 자신 있게 그 말을 제가 내뱉을 때 까지 기다려 주신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웠던 점은, 저를 그날 처음 만났던 그 동료 신학생, 저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져주었던, 그 친구가 저의 응답을 듣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너를 만드신 이유인 것 같아” 라구요. 그 순간 저는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일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 밤 한 기도를 모두 듣고 계셨고, 그에 대한 명백한 응답을 해 주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짧은 대화 후 저는 너무도 큰 감동을 받아 한 삼일 정도를 온 얼굴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감동과, 기쁨과,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감사함이 모두 뒤섞인 그런 울음이었죠. 그렇게 저는 이 질문을 통해 저의 소명이 무엇인지 분별해냈고, 당시 제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지금 딱 한번 만날 수 있고 단 하나의 질문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하시겠습니까?”라는 이 질문은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서 중요하게 느껴졌던 다른 곁가지들이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음을 알게 되는 동시에, 나의 영혼이 현재 가장 갈구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지요. 각자 적으신 그 질문을 곰곰이 잘 들여다 보시면, 여러분이 현재 삶에서 가장 갈구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여러분의 신앙 생활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나 현재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보일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의 말씀은 요한복음 1장의, 첫번째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첫번째 제자들은 본래 세례자 요한을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보자마자 자신의 제자들에게 저 분이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해주며 제자들에게 예수를 따라 갈 것을 넌지시 권했습니다. 두 제자는 그 말뜻을 알아 듣고 예수를 따라 갑니다. 갑자기 자신을 따라오는 그들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바로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가장 처음 만났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장 처음 하신 질문, “무엇을 찾고 있느냐” 는 질문을 받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곧바로 인지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지금 당장 궁금해하는 점이 무엇인지는 알았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어디에서 묵고 계시는지를 궁금해 했지요. 예수님의 거처를 궁금해 한다는 것은 사실은 그들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며 예수님이 가시는 그 여정에 함께 하고 싶다는 열망이 깃들어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예수님을 더 알아가고 싶음을, 그리고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 속 깊은 소망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들의 마음 속 깊은 소망을 그들의 질문을 통해 꿰뚫어 보신 예수께서는 더 묻지 않고 바로 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머물고 계시는 그 공간에, 자신의 거처에 제자들을 기꺼이 들이심으로써, 자신의 삶의 자리를 나누시고, 제자들이 자신의 삶에, 자신이 제자들의 삶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경본문은 이 첫 두 제자들에 대해 그 중 한명은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였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익명의 다른 한 명의 제자는, 요한 복음을 직접 작성한 요한 본인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더 알아가게 된 이 둘은, 처음에는 ‘랍비’로만 생각했던 예수님과 함께 머물며 그 분에 대한 이해가 점차 넓어져 예수가 메시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소명이 단순히 스승에게 가르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고 소외된 자들을 구원하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안드레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소명을 또 다른 이에게 전파합니다. 그는 자신의 형 시몬을 만나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한 후 그를 직접 예수께로 데리고 가죠.

시몬을 바로 알아보신 예수께서는, 시몬의 이름을 부르시며, 그를 앞으로 ‘게바’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게바’는 아람어로, ‘바위’, 즉 ‘반석’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똑같은 단어가 그리스어로는 “페트로스” 즉 베드로, 영어로는 피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심으로써 교회의 반석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시고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먼저 알아본 자신의 동생 안드레를 통해 그 소명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죠.

그 이후에 나오는 제자들의 이야기에서도 이처럼 한 제자가 다른 제자에게로 소명을 전파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빌립은 그 부르심을 받고 즉시 자신의 친구 나다니엘을 찾아가, ‘율법과 예언서가 예언한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합니다. 나다니엘은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빌립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바로 “와서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예수께서 “와서 보라”라고 한 것과 같이, 빌립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나다니엘을 그리스도의 삶 속으로 초대한 것이지요.  예수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본 나다니엘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곧바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또한 메시아를 따라 사는 자신만의  소명을 분별하게 되지요.

우리들 한 명 한명은,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한 작품 속에서 한 조각, 한 조각, 다른 모습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하나님 나라’의 작품을 완성하는 퍼즐 조각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각자의 소명 안으로 부르시고, 그 각기 다른 삶의 자리와 역할을 통해 하나님 나라라는 걸작을 한땀 한땀 이루어 나가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각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큰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퍼즐 조각 하나라도 없어지거나 훼손이 되는 순간, 그 작품은 완성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또한 우리는,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에게도 그 소명을 전파한 것과 같이, 다른 이웃 퍼즐 조각들도 자신의 자리를 찾고 그 작품속에 맞춰질 수 있도록 다른 이들을 격려하고 하나님 나라 안으로 초대할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전파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협력하여 일구어 나갈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자만의 유일무이한 소명을 분별하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하고, 또한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의 열망이고, 무엇이 우리를 감동시키며, 무엇이 우리 삶에 의미를 가져다 주는 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우리 스스로에 대해 알아 나가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소망, 우리 각자의 순간순간 변화하는 열정과 삶의 자리를 통해,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질문은 ‘하나님을 인생에서 딱 한번만 만날 수 있다면’으로 국한되었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딱 한번만 만나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시지요. 그리고 우리가 오늘은 혹여나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좇았을 지라도, 주님은 당신께로 나아올 몇 번이고의 기회를 다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담겨 있는 요한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한 이후, 부활해서 돌아오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찾아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다시 한번 세번에 걸쳐 물으신 그 이야기가 유일하게 담겨 있는 복음서 입니다.

베드로는 복음서에서 여러 제자들의 이름이 나열될 때, 이름이 가장 먼저 나열되는 자로, 이는 열두 제자 중 베드로가 그들의 리더였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런 수제자가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자 두려움에 휩싸여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부활해 돌아오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에 걸쳐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질문을 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던 사건을 떠올리며 너무도 죄송하고 죄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반복해서 하신 것은 베드로의 치부를 들추어내려고 하심이 아니었음을 본문은 드러냅니다. 한국어나 영어 번역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 세번의 질문을 그리스어 원어로 읽었을 때에는 예수님께서 반복해서 질문하신 의도가 정확히 드러납니다. 처음 두 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했을 때에 예수께서 사용하신 ‘사랑’을 뜻하는 단어는 그리스어 원어로 ‘아가페’ 입니다. 즉, 조건 없는 사랑, 이타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해 질문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두 번 다, 베드로는 아가페가 아닌 ‘필리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예수님께 대답합니다. ‘필리아’는 우정, 즉, 형제애처럼 상호적이고 더 인간적인, 그렇기에 조건이 따를 수도 있는 사랑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베드로가 두 번 다 ‘아가페’의 사랑이 아닌 ‘필리아’의 사랑으로 대답을 한 것이지요. 그러자 예수께서는 마지막 세번째에 한번 더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필리아’ 사랑하느냐’. 베드로의 입장에 맞추어 그 ‘필리아’ 사랑을 할 수 있느냐며, 당신의 질문을 바꾸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께서 다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필리아’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을 베드로에게 강요하시지 않고,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추어 베드로가 예수께 드릴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을 기뻐 받겠노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베드로의 현재 삶에 맞는 또 새로운 소명, “내 양 떼를 먹여라”라는 소명을 베드로에게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사랑 혹은 헌신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와서 보라’ 라고 주님의 삶 안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초대에 응답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함께 보고, 상상하고, 꿈꿔보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사랑하겠노라 마음먹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애쓰는 우리 한 명 한 명의 결심과 마음이 주님께는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하루하루 변화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우리 각자의 소명을 찾고, 이후 또 더 나아가 또 다른 소명을 찾고, 때로는 무너지고, 때로는 용감하게 도전하고,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기쁨에 넘치면서, 때로는 크게, 때로는 작게 나마 우리 각자의 소명을 이루어 나갑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며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소명을 전파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의 초대는 그 소명을 먼저 분별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퍼즐 조각 하나하나가 맞춰져 나가는 것이지요.

다시 한번 여러분께 처음 드렸던 그 질문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하나님을 지금 딱 한번 만날 수 있다면 어떤 질문을 하시겠습니까? 지금 여러분 삶에서 찾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질문 속에는 어떤 소망과 갈망이 내포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그를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을 또 어떤 삶의 자리로 부르시나요? 어떤 새로운 소명을 보여 주시나요?

오늘 그 대답이 떠오르지 않으시더라도, 이후 삶의 변곡점에서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삶의 변화하는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주시는 소명을 분별해내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소명을 매 순간 분별해 내며, 주께서 우리 각자를 부르시는 곳으로 가, 그 자리에서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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