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절 첫 번째 주일 / 9월 두 번째 주일
하나님이 행복하실 때(Be friendly to my beautiful world )
예레미야 4: 11 – 12, 22-28
누가복음 15: 1– 10
신중현 목사
지난 주 예배 후에 딸들과 손녀들 함께 노동절 연휴를 지내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 동네에는 비가 왔더라구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텃밭 채소와 꽃들에게 물을 주셨네!” 이 말은 누구나 알아 듣죠. 그런데 많은 사람이 아직도 왜 하나님이 코비드로, 태풍으로, 사람을 죽이시는 겁니까 질문 합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문자적으로” 그리하시는 걸까요? “Ruling everything, God is now here” 하나님 모든 걸 다스리신다” 말할 때 우리가 맞닥뜨리는 온 삶의 현장에서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기 위한 동력을 얻으며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믿음으로” 하는 “종교적인 말”이지 과학적일 순 없는 말로 저는 받아 들이죠. 예를 들어 나의 짝을 내가 고르고 결정하곤 ”하나님께서 뽑아 보내주셨다” 그렇게 말하쟎아요? 그리 믿고 그에 걸맞게 살아 나가겠다는 고백적인 말이지요. “이렇게 과학은 언제나 How? “어떻게”를 묻고 종교는 Why “왜”를 묻지요. 물론 이 둘은 함께 가야하지만 각각 다른 언어로 말합니다. 그래서 과학의 언어를 종교에 들이대거나 종교의 언어를 과학의 영역에 그대로 들이댈 수가 없는건데 “창조과학”이란 괴상한 말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창조는 “신학”이며 성경은 과학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오늘 창조절 첫째 주일인데 우리 각 사람이 “창조 이야기”를 한 번 써 보도록 해 봅시다. 그러면 창조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분명해지리라 생각하기때문입니다. “에이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불경한 생각을요” 라고 말씀하지 마시고 쉽게 손주들의 질문에 답해 주려는 노력으로 생각해 보십시요. 개들의 입장에서 써 본 재미 있는 것도 어디서 봤는데 랄프 밀톤 Ralph Milton은 그의 책, “Living God’s Way” 에서 이렇게 써 보고 있습니다. (*제 번역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왜 (어떻게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을지 숙고해 보려는 맘에서 이런 얘기를 해왔단다: 아주 오랜 옛날 빛도 어둠도 아무 것도 없이 하나님만 계시던 옛적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들기로 하셨지. 먼저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났고 빛이 온 세상을 아름답게 비추게 되니 하나님이 “야, 참 좋다!” 말씀하셨지. 그리고는 “이 세상에 사람들을 만들어 나를 닮게 해야겠다” 하시고는 여자들과 남자들을 만드신게야.
그 다음에는 그들이 늙어 죽더라도 이 세상에 사람들이 계속 있어야 할테니까 어린 아이들이 계속해서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신 거지.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말씀 하셨단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마음껏 즐기라. 단 한가지 부탁은 나의 이 아름다운 세상을 친근히 대해 주렴.” 그리고는 아름다움으로 꽉 찬 세상을 둘러 보시며 “야, 정말 좋다!” 하셨어. (그리곤 하나님께서는 편안한 시간을 가질 수 있으셨지.)
This is a story people told many, many years ago. They told this story, because they were trying to understand why God made this world: Long, long, long ago, before there was anything, before there was a world, before there was light, before there was darkness, there was God. Just God. All alone. So God decided to make the world. Then God said, “Let there be light.” So there was. Beautiful light shining everywhere. And God said, “That’s good.” Then God said, “Let there be people in the world, and let the people be made so they are like me.” So God created people. Women and men. And God said to the people, “Let there be new babies born so there will always be new people in my world when the old people die.” Then God said to the people, “Take care of my world. It’s yours to use. All of it. But please be kind to my world.” Then God looked at all the world, and all the beautiful things in it. And, God said, “That’s very good.” (When it was all done, God rested.) 사실 영어를 직역해 놓으면 그 의미가 잘 전달이 안되는 때가 참 많아서 여기 “be kind” 를 저는 “친근하게 대해 주렴, “환대해 주렴”으로 번역하렵니다. “숙고해 본다”는 말도 그런 의미일수 있을 터이어서 Kind (친절한)란 낱말에서 저는 유교의 “인”, 불교의 “자비” 또한 정현경의 책 “결국엔 아름다움이 우릴 구원할거야”에서 얘기하는 그 “아름다움” 까지도 떠 올려 보았습니다. 이렇게 “천지만물을 환대하며 살기, 친절하게 살기”가 신학적인 삶, 신앙의 삶인거죠.
저는 개인적으로, 많은 동요들에서 볼 수있는, 예를 들어, “산 할아버지 구름모자 썼네 나비같이 훨훨 날아서 살금살금 다가가서 구름모자 벗겨오지. 이놈 하고 물벼락 내리시네 천둥처럼 고함을 치시네 너무 놀라 뒤로 자빠졌네 하하하하 웃으시네” 같은 그런 시적인 감수성 없이는 신학 공부가 어렵다고 생각해요. 또 낭만적으로 “달이 참 밝지요?” 말하는데 “보름달이니까 밝지”라거나 “이제 가면 언제 또 오시려나요?” “가 봐야 알지” 식으로 대답하는 이들에게 창조 이야기는 좀 많이 어렵지요. 아침 뒷 마당에 활짝 피어난 나팔꽃을 보며 “야 정말 좋다!” 할 수 있는 그런 시적 감수성이 창조주 하나님을 “친근히” “환대하는” 방식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진대 오늘날 우리에게 닥친 환경위기를 말해야 하겠지요. “환경 친화” (Eco-friendly) 라는 말을 그동안 많이 들어왔죠? 이제 2030년 부터 2060년 사이에 현 인류가 멸종할 수도 있다는 소리까지도 들려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저는 물론 과학자가 아닙니다. 비단 이 목사님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해오고 있는 말씀이지만, 이 상철 목사님을 다시 호출하고 싶습니다. “이제 모든 인류가 함께 살 생각을 하지 않는 한, 특히 미국이라는 나라가 온 세계와 더불어 함께 살려는 맘을 먹어 주지 않으면 인류의 종말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애.”
We are not alone. We live in God’s world. Thanks be to God! 미국 연합교회 찬송가에서 카나다 연합교회 새 신조를 처음 발견하고 얼마나 좋았던지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는 전통적인 신앙 고백을 어쩜 이리 쉬운 말로 표현해 냈을까? 이 것만으로도 연합교회에 들어 올 이유로 삼고 싶을 정도였었지요. 그래서 나중에 또 다른 신조 “A Song of Faith”를 발간 한다 했을 적에 “더 필요한 게 뭐가 있으려나?” 생각하기까지 했었습니다. 하지만 New Creed 를 우리 말로 직역해 놓은 건, 죄송하지만, 제겐 그 시적인 느낌이 와 닿질 않아요. (물론 번역자가 의역을 하는 데에 있을 제약과 주저스러움을 잘 알지요.)
그래서 제 자신만을 위해 자유롭게 새신조를 의역해서 두번째 독창 CD를 녹음할 때 “신중현 목사 새겨 읽음” 이라 붙여 낭송을 해서 넣었었지요: “하나님 지으신 세상에서 사람은 홀로 존재가 아님을, 창조의 신비를 존중하며 서로를 인정하며, 악에는 저항하며 정의에는 동참하며, 지금도 우리와 함께 창조의 사역을 계속하시는 그 분의 임재를 드러내며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존재임을 믿으며, 우리 가운데 새로운 ‘세상’ 온전한 세계의 예표인 ‘교회’를 위해 이 다른 질서를 몸소 사시고 보여 주신 예수를, 맨 먼저 부활하신 이, 우리의 소망이며 또한 길잡이로 삼아 죽음 너머의 삶, 삶도 너머의 삶을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우리는, 감사해라, 믿습니다. – (신 중현 목사 새겨 읽음, March 9, 2010)
“A Song of Faith”는 그 길이가 새신조 New Creed보다 훨씬 길어서 오늘은 그 중 가장 강력한 표현 하나만 뽑아 보렵니다. “Life beyond death 죽음 너머의 삶” 에서 “Life beyond life 삶 너머의 삶” 으로 “진화(?!)했더라구요. 종교의 이름으로 보통들 관심 가지는게 “죽은 후의 삶 Life after death”-전생, 후생인 분위기에서 새 신조는 “죽음 너머의 삶”을 분명하게 말 해줘서 박수를 쳤었는데 “A Song of Faith”에서는 “삶 너머의 삶”이라니! 오늘은 이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이 건 온 세계 교회를 위한 카나다 연합교회의 공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장례식 설교에서 ”Death is a part of life 죽음도 삶의 한 부분” 이란 말을 흔히 듣는데 저는 “eternal” 한 단어를 더 넣자고 말씀 드립니다. 그러면 “Death is a part of ‘eternal’ life, 곧 “영생”의 한 부분이 되게 되는 거고 “삶 너머의 삶” 이 바로 이 것이라 믿기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늘 해 오던대로 오늘도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 무슨 뜻? “진짜 하나님이라면 햇빛이나 비를 의인에게만 주셔야 한다”는 그런 뜻일거예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아니 우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정도라야지 저런 찌질이, 죄인들을 데리고 뭐, 하나님 나라를 운운한다고?” 여기서 예수의 설교의 주제는 “사랑” 보다 “하나님의 나라”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오늘 본문의 촛점은 얼핏 단순 분명해 보이는데 그럼 그 나라는 아흔 아홉만을 위한 나라? 의인에게만 햇빛이나 비를 내려 주는 나라? 아니면 “죄인 하나”에 신경 쓰는 나라? 또한 여기서 아가페와 에로스의 차이를 구별해 볼 수도 있죠. “남을 행복하게 해 줄때 내가 (나도) 행복한 것과, 남이야 어찌되건 개의치 않고 나는 (혹은 나만) 행복하기”가 그 차이라고 말이죠.
성경을 잘 보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저주까지 하십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이 필요 없는 의인이라 여겼기 때문이죠.. 코핀 (W. S. Coffin목사님 말입니다. “흔히 교회는 목발과 같은 거라 말들 하는데 그래요. 그런데, 무엇이 당신 자신은 다리를 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거죠?” (“It is often said that the Church is a crutch. Of course it’s a crutch. What makes you think you don’t limp?”) 과연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우를 범하는게 “하나님은 믿고 사람은 사랑해야 하는 건데“ 순서를 반대로 “하나님은 사랑하려 하고 사람은 믿습니다.” 그러다가 못 믿게되는 경우에 닥치게 될때 하나님께 덤비죠. “진짜 하나님이라면 모든 걸 똑바로 만들어 놓으셨어야지. 난 이따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어!”
그런데 오늘 본문을 새겨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의인”들만을 선발 해다가 (recruiting) 하늘 위에 세우시는 게 아니라 원래 처음 부터 당신 것을 찾아내시는 데 (reclaiming)- 회복 (restoring) 하시는 데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나의 잃었던 것을 찾았노라 나와 함께 즐기자!” 하나님이 더 행복하신 때가 바로 이 때입니다. 뒤 따라 나오는 “탕자의 비유”도 그렇다면 바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여겨주시며 다시 찾으시려는 은혜와 사랑의 발로에서 한 번 더 상기시켜주시는 말씀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수난을 향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열매 없었던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던 얘기를 아시죠? 그런데 마가 11: 13절은 그 때가 무화과의 철이 아니어서 열매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예수님은 죄없는 나무에게 뭘 하신 거지요? 한마디로, “내가 오는 것으로써 가짜 종교의 ‘스스로 의인, 성자 노릇하기 놀이’ – 심지어 종교 장사까지 하던 당시 유대교도 포함- 의 시절은 끝났다”는 선포를 상징적으로 해 주신 겁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엔 “어머니 아직 내 때가 아닙니다”하며 주저 하셨죠. “나의 때는 내 피로 포도주를 만들 때, 곧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는 때”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말씀하시쟎아요?
(요한 2: 19) 그래서 오늘 본문에선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대답하시는데.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그게 천국 비지니스이다. 미몽에서 깨어라. 예언자들이 고대하던 나의 때가-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임하였으니 너희 시절은 끝났다. 이제 부터 사람이 네게서 – 그런 “종교”에서 – 열매를 따 먹는 일은 더 이상 없을꺼다.” 라고 새겨 읽겠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마가 11: 14) 기록 되었듯이 오늘 우리도 영으로 혼으로 온 몸으로 들으며 눈으로 봅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처음부터” “원래” 그 분의 것이었음에 감사합니다! 그게 “Original Blessing원복”입니다. 진실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의인이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햋빛과 비를 주시는데 차이는 받는 이에게 있는거쟎아요? 여기서 천국의 기쁨을 더해주는, 하나님을 더 행복하게 해 드리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믿음-진리” (과학-진리가 아니라)에 “얼”의 눈을 열고 천지만물 생노병사 모두를 통짜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으로서 여기며 친근히 환대하는 “삶 너머의 삶”의 발걸음을 새롭게 떼어 놓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의 심리 상태를 “마음이 늘 춥다” 라고 표현하는데 오늘 마침 성가대 찬양이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이었어요. “오직 은총”으로 용서받은 죄인들로서 이 세상을 지으신 후 참 좋다 말씀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상으로 살아가려는 “삶 너머의 삶”을 위한 창조의 이야기를 오늘 써 보면서 하나님이 더 행복하신 때를 나눌 수 있다는 “믿음-사실”에 우리 모두 “따뜻한” 마음으로- 이제부터 영원히 따뜻할 마음으로 감사를 올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삽니다.” 할렐루야! 오, 성령이시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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