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살아남은 자의 사명

사순절 세번째 주일 / 3월 세번째 주일
사순절, 살아남은 자의 사명
누가복음 13:1-5, 6-9
정해빈목사

 

사순절을 맞이해서 고난당하는 사람들, 특히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과 코로나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며 오늘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빌라도 총독이 성전에서 제사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그 피를 동물의 피와 섞었다니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반역을 꾸민다고 생각해서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 순간에 쳐들어가서 그들을 죽였을 것입니다. 갈릴리 지역은 옛날부터 저항 운동이 많이 일어난 지역이었기 때문에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빌라도 총독은 그들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갈릴리 사람들은 반역운동을 꾀하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드리는 중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단지 갈릴리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도 성전에서 거룩하게 제사를 드리는 중에 죽임을 당했으니 그것은 억울한 죽음이었고 학살이었고 살인이었습니다. 죽음에는 나이가 들어서 죽는 자연스러운 죽음도 있고 사고나 자연재해 때문에 죽는 안타까운 죽음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억울한 죽음은 나쁜 권력자에 의해서 학살당하는 죽음입니다. 요즘 우리가 우크라이나 뉴스를 보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 군인들이 민간인 아파트와 병원에 대포를 쏴서 죄없는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나쁜 권력자들 때문에 죽는 죽음이 많이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황제는 기독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안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경기장에 보내 맹수의 밥이 되도록 했고 독일의 히틀러는 유대인들과 집시들을 학살했고 소련의 스탈린은 자기 나라의 국민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실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들은 어떤 신앙적인 관점을 가지고 이런 일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나쁜 권력자에 의해서 학살당하는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라면 사고나 자연재해로 인해 죽는 죽음은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억울한 죽음에 이어서 안타까운 죽음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습니다. 실로암은 기혼에서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한 저수지 이름인데 이 지역의 경비를 위해서 세운 탑이 갑자기 무너져서 18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고였지만 막을 수 있는 사고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갑자기 아파트가 무너지거나 다리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 그 건물을 짓는 사람들이 잘못된 부실공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사고로 인해 죽는 죽음도 권력자에 의해서 학살당하는 죽음 못지않게 억울하고 슬픈 죽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실로암 탑 공사를 잘 하였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서 죽은 사람들과 사고로 인해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죄를 지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신에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억울한 죽음과 안타까운 죽음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두가지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이런 죽음이 그 사람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사람이 죽는 것은 그 사람이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거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권력자를 통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사고를 통해서 사람을 죽이는 그런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억울한 죽음이나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사람의 가족에게 찾아가서 당신의 가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당신의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또 한번의 큰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이 갑자기 고난을 당했을 때 욥을 찾아온 친구들이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내세우며 네가 고난을 받는 것은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번째로 예수께서는 “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같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회개하라는 말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는 희생자들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나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회개하라는 말씀이요,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쉽게 잊어버리는 태도를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은 재수가 없어서 죽은 것이고 나는 그렇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태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죽음을 내 일로 여기고 다시는 그런 죽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개인적인 일로 여기고 쉽게 잊어버리면 그런 일이 머지않아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지 않으면 잘못된 과거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끔찍한 일을 목격하고서도 그 일이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일을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가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너희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성경은 나이가 들어서 죽는 죽음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대신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죽는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이요 축복스러운 죽음입니다. 구약성경은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을 가리켜서 조상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나이가 들어서 죽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 장례식에 가보면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는 고인의 삶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축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비정상적인 죽음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 죽음이 불의하고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사람은 왜 나이가 들면 죽을까 같은 한가로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에 왜 억울한 죽음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가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살아남은 자가 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3년을 기다렸는데 열매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저 나무가 땅만 차지하니까 찍어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줄 터이니 일 년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을 했습니다. 포도원지기의 간청 덕분에 3년째 열매가 열리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일 년 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 년 후에 열매를 맺으면 나무는 살 것이고 열매를 맺히지 않으면 뽑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억울하고 안타깝게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우리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래 살아야 합니다. 그냥 오래사는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몫까지 짊어지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오래 살아야 합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다시는 이 땅에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정의의 열매, 평화의 열매,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다면 그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사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순절을 묵상하면서 고난받는 사람들과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몫까지 감당하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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