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천상을 살다

부활절 일곱번째 주일/6월 첫번째 주일
지상에서 천상을 살다
요한복음 17:20 – 26
유상진 목사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여 주시고, 창세 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장 20~26절)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우리 옛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아시지요? 제가 꼭 요런 일을 당한 게 몇 번 있습니다. 제가 트럭 운전을 하잖아요?
어느 날 제가 운전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막 하이라이트를 켜고, 심지어는 무리하게 추월을 해서 제 창문에 대고 뭔가를 막 손짓을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비상등을 켜고 차를 갓길에 세웠는데, 뒤에 가서 보니깐 트럭의 짐칸이 열려있고, 뒤에 실린 돌리가 그 짐칸에서 떨어질랑 말랑 하고 있는 거지요. 돌리가 뭐냐면요, 짐을 운전하는 바퀴가 두 개 달린 구루마 같은 겁니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그것이 떨어져 내리면 큰 사고가 날 수 밖에 없지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고요. 십년감수한 거지요. 안도의 한 숨을 쉬고, 곧바로 트럭의 짐칸의 문을 닫고 돌아왔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운전을 했습니다. 자연히 트럭의 짐칸을 닫는 일에 더 신경을 쓰면서 다녔겠지요. 그런데 회사 근방에 다와서 영/핀치의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하는데 땅땅땅 소리가 나는 겁니다. 저는 또 비상등을 켜고 급하게 차를 세워서 뒤쪽으로 달려갔습니다. 이건 분명히 돌리가 떨어지는 소리거든요. 제가 또 트럭의 짐칸문을 안 닫은 거지요. 그런데 뒤쪽으로 달려가 봤더니 허연 트럭 짐칸문이 꼭 닫혀 있는 겁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서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냈습니다. 또 땅땅땅 소리가 나는데 보니깐, 건너편에 어떤 공사를 하는데 뭐 땅을 다지는 기계 있지 않습니까?
바닥이 널찍한 쇠뭉치로 되어서 수직으로 퉁퉁퉁 바닥을 치는 기계요. 그 소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혼자 말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더니…”하고 중얼 거렸지요.

여러분, 이런 현상을 조금 유식한 말로하면, “선험적 정당화”라고 합니다. 교육학자들의 논의 가운데에서 나온 말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굉장히 수준 높은 논리와 논쟁이 있겠지요. 그런데요 교육학 용어를 제 식으로 쉽게 풀어 보자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상황에 대해서 판단할 때, 전적으로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내용을 기반으로 삼는다는 겁니다. 제가 어저께 트럭의 짐칸문을 열어 두고 운전해서 짐칸의 돌리가 떨어지기 일보직전의 위험한 경험이 있었던 거지요?
그리고 오늘 무언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는데, 어저께의 그 경험에 전적으로 지배를 받는 거지요. 일테면, 친구가 나는 주지도 않고 지 혼자서 굉장히 맛나게 피자를 먹고 있어요. 얄미운 그 친구한테 묻는 겁니다.
“피자 맛있니?”
그러나 그 질문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니지요. 이미 나는 맛있는 피자를 먹었던 경험이 있고, 지금 “그 피자 맛있지!”하고 정당화 하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어떤 상황에 대해서 판단할 때, 여러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연히 경험이지요. 어린 아리를 교육하는데도 이 선험적 정당화는 아주 자연스러운 기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들이 뜨거운 거, 차가운 거 모르잖아요.
밥상의 뜨거운 국물에 손을 넣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엄마들은 어떡합니까?
데이지 않을 만큼 적당히 뜨거운 거, 뭐 일테면 밥숟가락을 밥에 넣었다가 애기 손에 갖다 대는 겁니다. 그러면 애기는요?
대일 정도는 아니지만 뜨거워 하잖아요? 그 때, 엄마가 “아뜨, 아뜨”하고 소리를 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아이가 다른 뜨거운 물건이 앞에 있을 때 엄마들이 “아뜨, 아뜨”하면 아이들은 호기심은 생기지만 만질 생각을 안 하는 거지요. 그러고 보면, 이제까지 내 생을 통하여 경험되어진 것은 소중한 자산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어떤 직장에 들어갈 때는 이력서가 되는 것이고, 이 사람이 어떤 경험을 했느냐는 그 사람을 평가하는 귀중한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기반에 두고 어떤 상황들을 사고하고, 판단하고, 대처하고, 행동하는 거지요.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지구상에 77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개개인의 경험은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국적별로, 인종별로, 업종별로, 혹은 지역별로 공동의 경험이 있기는 하겠지요.
그런데 한 개인의 각기 다른 경험에서 보자면 사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의 경험치는 정확히 77억분의 1입니다. 이렇게 보면 “나”라는 한 사람은 참 보잘 것 없습니다. 77억분의 1밖에 안되는 내 알량한 경험으로 어떤 사건과 사물에 대해서 사고하고, 판단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늘 느끼는 거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나 사건들에 대해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는 재주 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자신의 기준이 그러면 사실과 다른 판단을 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경험은 곧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비합리적인 자신의 선험적 경험을 자신의 사고의 지평에 제일 첫 번째 기준으로 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학습하고, 연구합니다. 일테면 책을 읽는다든지, 영화를 본다든지, 학교에서 학습을 한다든지,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다른 경험들을 습득하는 겁니다.
지신이 우주에 가 본 경험은 없으나, 우주에 갔다 왔거나 그 분야의 연구를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주가 어떤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지요. 말하자면 지식을 쌓는 겁니다. 이것도 경험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자산이지요.
어떤 난제나 어려움이 있을 때 이런 지식인 그룹, 전문가의 의견을 먼저 듣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유식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유식해지고 싶어 합니다. 어떤 면에서 무식한 사람은 사람 축에도 안 끼워 줍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쌓은 지식, 이 앎을 기반에 두고 어떤 상황들을 사고하고, 판단하고, 대처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 배워봐야 얼마를 배울 수 있습니까?
물론 지식이 높아지고, 그것으로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많은 면에서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식의 폭이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증명할 만한 폭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저는 철든다는 것을 종종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아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 마치 내가 한줌의 미풍에도 봄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질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게 사람이 철드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쌓은 지식, 자신의 앎을 자신의 사고의 지평에 두 번째 기준으로 둔다는 겁니다.

여러분, 여기까지 동의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사고하고, 판단하고, 대처할 때 여러분의 경험이나, 여러분의 지식이 기준이 되지 않습니까?
사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마도 인간이 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자신의 경험이나 앎은 버릴 수 없는 사고의 지평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요. 그러나 여러분, 성서의 말씀은 그 생리적 본성에 정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하박국 2장 4절에,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사람이 이 지상의 삶을 살아갈 때,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근거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겁니다. 의인이라는 겁니다.
오히려 자신의 자랑스럽고 풍부한 경험과 쌓아 놓은 지식의 지평에만 갇혀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라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지상에서의 삶의 논리와 근거를 정면으로 뒤집어 놓고 있는 겁니다.
성서는 그런 책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들이 이 땅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과 수많은 업적들이 있잖아요? 세상은 그런 것들로 우리들을 줄 세울 수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대로 줄을 세울 수도 있고, 많이 배운 사람들대로 줄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권세를 가졌느냐로 줄을 세울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지상의 서열일지 모르겠으나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그 줄이 다 정렬되면 “뒤로 돌아!”하고 구령을 외치시고 그 뒷줄부터 맞이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가 일찌감치 이것이 순이라고 생각하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역순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그런가요?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시기 직전,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던 마지막 기도의 현장에서 이 역순행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일과 복음서의 말씀은 요한복음 17장 20~26절 말씀입니다. 17장 전체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리는 중보기도의 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을 위한 “예수의 대제사장적 중보기도”라고 명명하는 장이 요한복음 17장입니다.
그런데 왜, 이 장을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기도”라 일컫는가?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하고 마지막으로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과 함께 성서 가운데 예수님의 기도 내용 전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보기 드문 장이지요.
이 17장 전체에서 1절에서 5절까지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간구가 들어 있습니다, 6절에서 19절까지의 제자들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인 20절에서 26절까지는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간구가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오늘 현재 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한 예수님의 중보의 기도 첫 대목입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지금 이 대제사장의 중보의 기도는 이 사람들, 지금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 곁에 있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다시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을 오늘 이 지상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빌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일이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오를 것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입니다.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 자신을 철저히 배신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입니다. 그런 분이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 더구나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교회를 이룰 이 지상의 우리들을 위해서까지 기도하시는 겁니다. 우리로서는 눈물겨운 일이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본문의 말씀을 가만히 살펴보면, 역순행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겁니다. 역순행적 구조라는 것은 주로 문학작품에서 많이 사용하는 화법입니다, 저는 뭐 배운 게 없어서 이런 상식이 한참 떨어지지만 제가 이해하는 역순행적 구조는 이런 겁니다. 문학에서 강조법의 한 기법으로 일반적인 시간이나 사물의 순차성을 바꾸어 놓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백석이라는 여류시인이 있는데 여승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요 시가 대표적인 역순행구조의 시입니다.
그 첫 소절이 이렇습니다.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 내음새가 났다.
현재의 시점입니다.
그런데 2연에는 여인의 오래된 과거로, 그리고 3연에는 가까운 과거로, 그리고 4연에는 더 가까운 과거로 돌아오는 거지요. 각 연의 마지막 행만 읽어도 이 역순행적 구조를 쉽게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나 어린 딸 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순차적인 기술을 순행적 구조라고 하는데 이것을 막 바꾸어 놓은 겁니다.

오늘 설교 본문의 말씀을 받아 놓고 묵상하는 데 첫눈에 들어온 것이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지금 현재 이 지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을 위한 세 개의 간구가 이것입니다. 지상에서 살아가는 미래의 그들이 하나가 되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미래의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십자가의 영광을 미래의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십시오.

여러분, 여기에서 가장 선행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일이 뭔가요?
세상이 다 믿는 건가요?
세상이 다 아는 건가요?
아니면, 우리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을 보는 건가요?
당연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을 우리가 보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우리와 세상이 조금이라고 인지할 것이고, 그런 사랑 안에서 하나 된 우리들을 보고 세상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참 아들이었음을 믿게 될 것 아닙니까?
사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간구는 그 순서대로 해야 더욱 자연스럽습니다. 그게 세상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논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반대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지상의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세 개의 간구에 나오는 동사들,
“보게 하여 주십시오!”의 희랍어 동사 “데오레오”는 구경하다, 강제적인 의미에서는 인지시키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선험적인 경험을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의 가장 1차적인 사고의 지평으로 장착하고 있는 그거요. 우리의 알량한 경험요.

“알게 하여 주십시오!”의 희랍어 동사는 “기노쓰코”입니다. 알아차리다, 분석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선험적인 경험을 넘어서 학습을 통한 지식, 즉 앎을 말하는 거지요.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알량한 경험 다음으로 쳐주는 그거요. 우리의 지식, 앎이지요.

그리고 “믿게 하여 주십시오!”의 희랍어 동사 “피스튜오”는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믿음을 갖다, 모든 것을 맡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우리들은 이 지상에 사는 동안 내 자신의 경험을 우리 사고의 지평에서 제일 앞장 세웁니다. 그리고 알량한 나의 지식과 배움을 우리 사고의 지평에서 두 번째에 세워놓습니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다. 이 지상에 사는 너희들이 판단하고, 대처하고, 행동하는 모든 사고의 지평은 77억분의 1도 안 되는 너희들의 경험보다, 한 평생 쌓아 올려 보아야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너희들의 앎보다 믿음이어야 한다! 그렇게 선언하시는 겁니다.
네 알량한 경험과 옅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라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액면 그대로의 기도의 내용을 넘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논리적인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로 우리가 이 지상에서의 삶을 살다보면 우리의 경험과 지식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뭐 제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오늘 여러분,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지금 여기 이 지상의 현장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저는 지금까지 저의 알량한 경험과 지식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일들을 숱하게 겪었습니다. 이제 갓 50줄에 접어드는 애가 이런데 여기 한참 연배가 높으신 어르신들 어떠셨어요? 저는 예수 안 믿으면 안되겠더라고요. 이게 어디 저뿐이겠습니까?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서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제 동기 목사님인데, 제가 신학교를 한참 늦게 들어갔으니깐, 저보고 형이라고 부르는 거지요. 이 서목사님과 한 3년을 한 교회에서 함께 근무했습니다. 제가 이미 그 교회에서 수석부목사로 있었고, 제가 서목사님을 불러서 함께 부목사 생활을 했지요.
그런데 이 목사님께 따님이 둘 있는데 작은 따님이 자꾸 배탈처럼 아픈 거예요. 어느 날 다른 일 때문에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병원 의사가 큰 병원으로 빨리 가라는 거예요. 서목사님하고, 사모님이 세브란스 병원으로 먼저 가시고, 저도 뒤늦게 밤에 병원을 갔지요. 갔더니 청천벽력이었습니다. 4살도 안된 아기의 폐 밑에 직경 8Cm정도 되는 혹이 있고, 그것이 무슨 암인데 3만 명 중에 한 명 정도가 발병되는 희귀암이라는 거예요. 치료가능성이 없다는 거예요.
그날 밤 저희 집사람한테 이 내용을 전화로 알리면서 울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어린 것이 감당해야 할 목숨을 건 수술은 둘째 치더라도, 기나긴 병원생활은 둘째 치더라도 현대의학으로 완치가 불가능하다는데, 그리고 목사가 된 사람이 돈이 어디 있습니까? 그 때 한 달 사례비가 80만원…
사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으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맞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병원의 권고에 따라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이 따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맞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고린도후서 4장 18절의 바울의 고백처럼, 서목사님도, 사모님도, 저도, 저희 집사람도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스튜오”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요?  지금 이 네 식구는 섬마을에서 목회하면서 오순도순 잘 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 여러분, 지상에서 천상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이 지상에서 직조된 선험적인 경험과 경쟁적으로 획득한 앎의 지평에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지평으로 우리의 삶을 옮겨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 천상을 사는 것이지요.
이 믿음의 지평위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사는 곳이 초막이든, 궁궐이든 그 사람의 삶의 터전이 높은 산이든, 거친 들이든 그곳이 곧 하늘나라!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공생애를 출발하시며 하신 첫 번째 설교의 주제는 하늘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베푸셨던 모든 비유와 설교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생 붙들고 사신 것, 자신의 목숨과 아낌 없이 바꾸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일은 예수님의 지상과제였고, 당신의 몸이신 교회공동체를 세우면서 부탁하신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중보기도의 제 일성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왜, 알파한인연합교회 공동체로 여기에 모여 있습니까?
여러분, 여기 왜, 오셨어요? 예배드리러 오셨어요? 아니요! 우리가 공동으로 고백하는 하나님 만나고 싶어서 여기 오셨잖아요! 그리고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한 분, 한 분 이 지상에 존재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단 하나, 이 지상에서 천상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내 주 예수 계신 곳, 그 곳이 곧 하늘나라!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영원에 가 닿을 그 날까지, 오늘 여기서 우리가 영원의 한 점을 사는 겁니다.

그래서 솔직히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끝이 언제인가 따져보는 데 골몰하거나 죽어서 가는 천당만을 소망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죽어서 갈 천당에서 나의 높은 위상과 독점적인 상급을 저울질 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장사꾼처럼 헌금의 크기로, 혹은 목소리의 크기로 하나님의 나라를 거래하려고 합니다. 마치 교회를 욕망의 신전으로 만들어 놓고 맙니다.
여러분,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값싸고 천박한 기복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 지상에서 누리는 천상은 돈으로도, 힘으로도, 지식으로도, 많은 선행으로도 누릴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 여러분, 믿음이라는 게 뭡니까?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물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서야 기독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인식론적 고백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가슴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실존적 고백일 것입니다.

요 최근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당 주방의 식재료를 딜리버리하는 것이 제가 하는 일인데, 말이 좋아서 딜리버리지 뭐 막일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리고 식당의 주방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정말 고됩니다. 보통 12시간씩 일하는 것이 보통이고, 바쁜 때가 되면 정신이 없지요. 그리고 이분들은 일이 힘들고 고되어도 어디 화풀이 할 때가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뭐 손님들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사장님에게 화 낼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종종 우리 같은 배달부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거지요. 어디까지나 바이어들이니깐 물건을 팔아야하는 우리들과 언제나 갑과 을의 관계가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주방에서 일하는 분이 짜증을 내서 같이 짜증을 내 버리면 곧바로 사무실로 전화가 옵니다. 니네 배달부가 불친절해서 거래 끊는다 이래버리면 또 사장님께 혼이 나고 그러는 거죠. 생각하기를 이 일을 하려면 쓸개를 빼 놓고 해야 되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니깐요.
저는 제 삶을 통해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노동해 왔지만 이렇게 험한 일은 아마 처음만나는 것 같습니다. 뭐 그날도 여느 때하고 다름없는 날이었습니다. 거래하는 식당에 도착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물건을 막 정신없이 트럭에서 내리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불쑥 말을 시키는 겁니다. 그 첫마디가 이거였습니다.
“Jesus love you!”
가쁜 숨을 고르면서 그 소리 나는 쪽을 보았더니 어떤 중년의 여자 분이 무슨 전도지 한 장을 저에게 줄려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겁니다. 제가 숨을 돌리고 그 종이를 받으면서 대답했습니다.
“I know that.”
그랬더니 아주 반색을 하면서 저한테 성서가 필요하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나 영어도 못하고 해서 필요 없다고 얘기를 했지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몇 명이냐 아이들은 영어로 읽을 수 있지 않느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이들이 셋 있다고 하니깐 세권의 성서를 주는 겁니다. 기드온 협회에서 일하는 분이라는 것을 성서를 받아들고 알았습니다. 성서 보급 운동을 벌이고 있는 비영리 세계기구가 있거든요. 그 성경이 기드온 협회에서 발행하는 성서였습니다. 아무튼 뭐 시커먼 영어 성서 세권을 받아들고는 헤어졌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또 여념 없이 일했지요.

그런데 요만한 트럭 다시방의 공간에 앉아서 운전을 하고 있는데 자꾸만 자꾸만 그 여자 분의 말이 생각이 나는 겁니다.
“Jesus love you!” 쓸개까지 빼 놓고 일해야겠다고 몇 번이라도 되 뇌이는 저에게 “Jesus love you!” 한날 한날 이 지상에서 살아남느라 여념이 없는 저에게 “Jesus love you!” 천둥처럼 들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슬며시 드는 겁니다.
내가 수없이 설교도 하고, 수없이 성경공부도 인도하면서 목회했는데 정말로 나는 그냥 “I know that.” 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요. 오늘 본문에 우리로 하여금 지상에서 천상을 살기를 꿈꾸셨던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차라리 서원기도로 끝납니다.
본문 26절에, “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슬며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요. 나는 지금 In Jesus하고 있는가? In Jesus’s love하고 있는가? 그동안 나는 “I know about Jesus.”한 거 아닌가? 트럭을 운전하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부끄러워서요.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아이들과 한참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성경책도 한 권씩 나누어 주면서 오늘 체험한 은혜를 함께 나누었지요. 야, 아빠가 오늘 이래서 한참을 울었다. 아이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제 말에 화답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그 와중에 저와 방을 같이 쓰시는 룸메이트 여자 분이 한 마디 거드는 겁니다.
“니가 왜, Jesus love you!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은혜스러웠는지를 아냐?”
적어도 아이들과 저는 이 아주머니가 무슨 은혜스러운 말씀을 하실까 정말로 기대하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 분이 하시는 말씀이 “니가 알아듣는 말이 Jesus love you!라는 말밖에 없어서 그렇다.”그러는 거예요.
아니, 아이들하고 오늘 나눈 은혜를 나누고 서로 위로하고 따뜻하게 격려하고 그러는데 찬물을 확 끼얹어 버리는 겁니다.
진짜, 씨, 나니깐 참고 살지…

그런데 여러분, 정말입니다. 진짭니다. 그 중년의 여자 분은 저한테 딴 거 안 묻더라고요. 너 얼마나 배웠니?, 어느 학교 나왔니? 그런 거 묻지 않더라고요. 너 얼마나 가졌니?, 너 얼마나 큰 집에 사니? 그런 거 묻지 않더라고요. 그냥, “Jesus love you!” 그 한마디 밖에 안하더라고요. 여러분, 제가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저만 눈물이 많은가요? 내 빠듯하고, 숨 가쁜 지상의 삶을 천상의 은혜로 바꾸는 이 사랑 앞에 허물어지지 않을 사람 여기 누가 있을까요? 사람의 머리에서 가슴까지 얼마나 될까요? 한 30센티, 40센티 될까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시간이 30년 40년이 더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처럼 미련한 사람이 있는거지요.

여러분, 깊은 숨 한 번 내몰아 쉬고,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눈이 닿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 눈을 떴지요? 여전히 내가 숨 쉬고 있었지요? 내 코에 이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일어나서 아침에 무엇 드셨습니까? 오늘 아침 밥상 위에 오른 것, 전부다가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었습니다.(까칠하게)
여러분, 오늘 교회 오시는 길에 무엇을 보셨습니까? 영길에서, 쉐퍼드길에서,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들을 보셨지요? 교회 길목 어귀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들을 보셨지요? 전부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봄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서 온화하게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입김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보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도 이 넓고 온화한 예배당에서 함께 찬양하셨지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저 십자가 한 번 보십시오. 죽기까지 참, 모질게도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눈길 닿는 곳, 모든 곳이 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 사는 게 바빠서 마음에 틈이 생길 때도 수 없이 많았는데 이 하나님의 사랑이 여전히 내 지천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다시 새로운 천상의 삶을 날마다 날마다 시작하는 사람들입니다. 알파한인연합교회 교우 여러분, 이 세상이 규정한 수많은 선험과 높은 지식의 잣대가 제공한 평가에 속지 마십시오. 지금 좋은 것을 입든지 못 입든지, 지금 좋은 것을 먹든지 못 먹든지, 지금 좋은 곳에 살든지 못 살든지 그 어떤 것도 이 지상에서 천상을 사는 우리들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갈2:20)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올 한해 우리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정하신 목회의 지향점 중에 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기쁨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알파한인연합교회 모든 교우들이 이 지상에서 천상을 살게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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